2015년 12월 15일 공화당 대선후보 토론회는 루비오에 대한 크루즈의 공세 강화를 비롯한 후보들 간 역학 구도의 변화를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리였다.
그리고 외교와 안보문제를 주제로 했던 만큼 앞으로 4년, 혹은 8년 동안의 미국의 대외정책의 방향을 가늠해볼 기회이기도 했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는 앞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이 내부적으로 어떤 공격을 받고, 어떻게 여론에 휘둘릴지를 알아볼 기회였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토론회 사회자 울프 블리처는 후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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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독재자들을 가만 두는 것과 제거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미국에 이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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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질문처럼 들리지만, 그 질문의 함의는 전혀 간단하지 않다. 그 질문은 미국의 오랜 외교 철학에 관한 질문이고, 조지 워싱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의 존재 목적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 각각의 후보가 밝힌 의견은 현재 공화당의 위치와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박정희와 카다피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박정희 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군사쿠데타로 민주정치를 종결시키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사진)를 두고 미국은 고민에 빠졌다. 반공을 내세워 김일성과의 대결의지를 밝힌 박정희 정권과 협력하여 소련의 아시아 확장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외교전략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정치를 무너뜨린 박정희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독재자 취급을 할 것인가.
미국이 일반국가라면 특별히 고민할 내용이 아니다. 카다피(1942년~2011년, 사진)가 독재자로 군림하던 시절, 한국 정부는 건설사를 리비아에 파견해서 경제협력을 하고 돈을 버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리비아의 정치는 전적으로 내정이므로 한국은 돈을 벌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독재자로 낙인찍힌 정부라면 미국 정부는 함부로 협력할 수 없다. 유권자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건 물론이고, 그에 앞서 미국의 전통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아이디어로서의 미국
미국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나라다. 하나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인 일반국가로서의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적) 아이디어로서의 미국’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로서의 미국’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다.
미국은 그 기초부터 민주정치를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지구 상의 첫 근대국가이다. 따라서 미국인은 미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민주주의에 대한 사명 의식을 가졌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주는 메시지도 그런 사명감에 근거해 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는 이 땅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유럽 각국이 왕정으로 회귀하면서 외롭게 민주주의의 보루로 남아있던 미국과 미국민의 절규이자 사명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비록 자신의 국익을 해치는 한이 있어도 민주주의를 해치는 독재세력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원칙이 있다. 미국은 국익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exceptional)는 것이다.
남의 나라에 폭탄 투하해도 ‘민주주의’라고 쓸 미국
물론 미국 예외주의가 반드시 ‘세계 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조지 워싱턴부터 시작해서 미국 역사 대부분은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인 투쟁과 전쟁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고립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footnote]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막내아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 러들로우 대령의 반응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footnote]
하지만 잘 알다시피, 많은 경우 (특히 그것이 미국의 이익과 부합할 때) 미국은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퍼뜨린다는 핑계로 다른 나라의 정치나 분쟁에 개입해왔다. 미국은 월남전에서도, 이라크를 침공할 때도, 남미의 정치에 개입할 때도 그 나라들이 독재정권 하에 있기 때문에 무너뜨린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시니컬하게 말하면, 미국은 자국이 필요하면 다른 나라에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다만 그 폭탄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식적이라고 해도 그러한 명분은 내세워야 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문제는 민주주의나 민족자결권 등의 명분과 미국의 국익이 서로 배치될 때다. 아래 두 역사적인 사례가 대표적이다.
- 1979년 이란의 샤 왕조를 무너뜨린 호메이니의 이슬람 종교세력
- 2011 이집트 혁명으로 무너진 무바라크 정권과 그 뒤 등장한 모슬렘 브라더후드
미국에는 우방인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집권한 박정희나 광주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에 대해 미국이 즉각적인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고 미적거린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깔려있다. 가령, 박정희에 대해서 공화당 대통령인 닉슨과 포드는 공산주의의 극동지역 확산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한 묵인하는 정책을 폈다면, 민주당 출신의 지미 카터는 대통령 취임 후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대립하여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했다.
시리아의 친러시아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
다신 미국 대선 후보 토론회로 돌아와 보자. 이번 미 대선 토론회의 특징은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공화당은 내용은 없지만 재미있고, 민주당은 내용은 충실하지만 별로 재미가 없다.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이번 선거가 그렇다. 그런 내용 없는 리얼리티쇼 같은 지난 공화당 토론회에서 유일하게 빛이 나는 대목이 바로 시리아의 친러시아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1965년~현재, 사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의견개진이었다.
- 연합뉴스 –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IS보다 국민 7배 더 많이 살해” (2015년 9월 6일, 홍성완)
박정희가 미국에 필요한 이유는 하나였다. ‘북한-중국-소련의 공산주의 세력의 동진을 저지하는 방어선.’ 물론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친공이 될 나라는 아니었지만, 미국이 가장 두려웠던 것이 ‘약한 정부’로 인한 혼란이었다.
투자와 외교에 공통점이 있다면 “좋은 전망은 좋고, 나쁜 전망도 감당할 수 있지만, 불투명한 전망만은 해롭다”는 것이다. 나쁜 정부면 나쁜 정부대로 꾸준해야 협상할 수 있지만, 앞으로 공이 어떻게 튈지 모르는 상황, 정보가 부족한 상황은 위험하다.
미국은 알사아드를 제거해야 하는가
바샤르 알 아사드는 친러시아다. 따라서 미국에는 해로운 존재로 규정된다. 하지만 해로운 존재라도 그 지역의 안정(stability)을 유지할 수 있으면 가치가 있다. 하지만 지역 안정에는 도움이 되었던 사담 후세인을 미국은 끝내 제거했다. 강력한 독재자로, 반미의 선봉에선 후세인을 미국은 없앨 수 있었고, 그래서 없앴다.
그 결과는? 항생제를 많이 복용한 결과 대장 내 균형이 깨지고, 그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생긴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걸 시리아에서 다시 반복하겠느냐는 질문이 나온다. 이것이 미국이 IS 문제로 고민하게 된 근본 원인 중 하나다. 게다가 이라크와 달리 시리아는 푸틴이 직접 챙기는 친러세력이라서 러시아와의 대결을 가정하지 않고는 생각하기 힘든 카드다.
따라서 알 아사드를 없애는 것이 좋으냐, 아니냐는 문제는 사실 순전히 이론적인 질문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후보들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원래 전통적인 공화당은 그런 경우 폭격을 선호한다. 군산복합체의 전형적인 결론이다. 아버지 부시가 그랬고, 아들 부시가 그랬다.
미 대선 후보들의 입장
힐러리 – 아사드 제거에 동의
민주당도 반드시 반대하는 건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캐리커처)이 대표적이다. 힐러리는 민주당 내의 매파(hawks)에 속한다. 세상에서 독재자를 없애는 것이 민주적인 가치를 세계에 확대한다는 가정에서 폭격에 동의한다. 이라크 침공을 결정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물론 오바마는 다르다).
트럼프, 크루즈 등 – 미국이 개입할 문제 아니다
하지만 공화당 내의 티파티를 비롯한 리버태리언(Libertarian)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이 전쟁에 사용하는 돈은 세금에서 나가는 돈이고, 세금은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당장 미국의 국세청인 IRS도 없애라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돈을 쏟아붓는 걸 좋아할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도널드 트럼프(캐리커처), 테드 크루즈, 그리고 랜드 폴은 알 아사드가 나쁘다고 해도 우리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며, 개입한다고 해도 나아질 상황도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부시, 루비오 – 아사드 제거에 찬동
반면, 자기 아버지와 형의 유산을 이어야 하는 젭 부시는 전통적인 공화당의 입장, 즉 “독재자는 무력으로라도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부시와 마찬가지로 공화당의 주축세력을 기반으로 승리하려는 루비오(초상)도 “아사드가 제거되어도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같은 편에 섰다.
이제 점점 더 미국은 예외적이지 않다
주목할 점은 그런 자유방임주의(lassez-faire) 세력이 미국에서 빠르게 자라고 있고, 그들의 외교적 지향점은 대개 불간섭원칙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이번 선거에서 그런 세력이 집권하지 않는다고 해도 앞으로 워싱턴의 중요한 정책변화를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키우는 데 열심인 중국을 상대로 외교전을 벌여야 하는 미국정부가 안방에서 그런 반대에 부딪힐 경우, 미국은 외교 엘리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향력 강화에 집중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
게다가 군사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미국은 과연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지지하고 도와줄 명분이 있는 나라인가’하는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국민의 혈세를 외국에 퍼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전 세계에 전파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는 아이젠하워 때는 먹혔고, 케네디나, 약간 무리하면 카터 때까지도 믿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인들도 공허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특별하고, 예외적인(exceptional) 국가이기 때문에 일반 국가들이 사용하지 않는 예산을 쓰겠다고 하기는 힘들다.
이데올로기의 세상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올려주시는 글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외국의 상황을 보고 그것을 거울로 대한민국의 상황을 비춰보게 되네요.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어떤 방향이 최선인지 생각을 해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신 미국 대선 후보 토론회로 돌아와 보자 -> ‘다신’은 ‘다시’의 오타가 아닌가 싶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