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각 종교의 가르침은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일부 개신교 단체가 아시안 게임에서 아랍 선수들에게 선교활동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좀 까야겠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적인 기독교의 역사를 몇 개만 살펴보자. 심하다 싶은 구석도 있을 수 있다. 상식적인 대다수 기독교 신자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라바룸, 전쟁을 위한 상징물로 이용된 ‘그리스도’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평화를 주러 오신 주님’의 이름으로 참 많은 피를 흘렸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다수설은 그의 군사가 방패에 ‘라바룸’(labarum)을 그리고서 밀비우스 다리 전투(312년)에서 승리한 까닭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고도의 상징물로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이용’한 셈이다. 그때는 이미 예수가 이 땅을 떠난지 3백년이 지난 때였으나, 예수가 살아 있었으면 땅을 치고 통탄했을 일이다. ‘내가 언제 내 이름을 팔아 전쟁을 치르라고 했단 말인가!’
[box type=”info” head=”‘라바룸’이란? “]
라바룸(라틴어: labarum)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 문자(그리스어: ΧΡΙΣΤΟΣ 또는 그리스어: Χριστός)의 처음 두 글자 카이(Χ)와 로(Ρ)를 겹쳐놓은 것이다.
라바룸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사진)가 처음 사용했다. 그의 꿈에 이 문양이 나타났고 “이 표시로 이기리라(In hoc signo vinces)”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잠에서 깬 콘스탄티누스는 즉시 병사들에게 모든 방패에 이 문양을 새길 것을 명령했고, 그날 밀비우스 다리 전투(312년)에서 막센티우스를 이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가 있은 지 3년 뒤에 세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는 이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다. 대신 ‘영혼의 위대함과 신의 영감으로(INSTINCTU DIVINITATIS MENTIS MAGNITUDINE)’ 나라를 구했다고 적혀 있는데, 당시 동전에는 태양의 신이 새겨져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이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장려했음에도 로마 다신교의 수장(Pontifex Maximus)이라는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믿었던 것이 아니라 정략적으로 기독교를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인다.
이후로 중세에는 이 기호가 잘 쓰이지 않다가 르네상스 때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 위키백과, ‘라바룸’ 중에서 발췌 [/box]
십자군의 광기와 학살 축복한 서방 교회
중세가 끝나가던 시절 동로마제국은 오스만에게 함락되기 이전에 이미 같은 기독교도인 서방으로부터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동서교회 대분열 이후 로마 주교는 자신을 ‘주교 중의 주교’, 교황이라 칭하고, 동방교회를 마치 이교도인양 취급했다. 동방교회 입장에서 보면 딴집살림 차린 작은 집이 큰 집 괄시하는 꼴이나 다름 없었다. 그 동방교회라고 딱히 더 나을 것도 없었지만, 십자군 원정(11세기~13세기) 같은 미치광이 짓은 하지 않았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이라 불리는 서방 교회는 제1차 십자군 원정(1096년~1099년)에서 인간성 상실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지를 그야말로 피로 물들였다. 물론 십자군 원정을 전적으로 종교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교회가 십자가를 앞세운 학살자들을 축복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광기의 역사로부터 약 900년이 지난 뒤에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잘못’을 공식 인정했다.
2000년 3월 5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에 명해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문건을 발표하게 했다. 더불어 같은 해 3월 12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교회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에 대한 이단 심문, 십자군 원정, 유대인 차별, 타 종교와의 갈등, 여성에 대한 억압 등에 관해 말이다. (참고: 위키백과)
끝없이 대물림하는 소수자 탄압
여기까지가 가톨릭의 흑역사라고 뒷짐 지며 우린 다르다고 생각하는 개신교도들이 있다면 ‘깨몽’하시라. 칼뱅주의자는 아직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1572년)을 언급하며 가톨릭의 잔혹함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이 퀘이커 교도에게 한 짓은 짐짓 모르쇠로 일관한다. 개신교의 손에 묻힌 피는 더 진하면 진했지 덜하지 않다.
같은 주님을 믿는데 서로 좀 다르게 믿는다는 게 서로에게 총질과 칼질을 하게 한 주된 이유였던 ’30년 전쟁’ , ‘최후의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국제전쟁’이라고 불리는 30년 전쟁은 역시 최초의 국제조약이라 평가받는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의 체결을 낳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조약이 가톨릭, 루터교, 개혁교회(칼뱅주의)만을 보호할 뿐이란 점이었다.
그래서 1650년대 영국의 조지 폭스가 제창한 명상운동으로 시작한 ‘퀘이커’ 같은 신흥 소수 종교는 결국 새로운 종교적 탄압 대상이 됐다.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한 것처럼 가톨릭과 신교, 개혁교회는 퀘이커를 탄압했다. 결국, 다수의 퀘이커 교도들은 유럽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학살과 탄압의 공포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 후로 몇백 년이 흘러 퀘이커 교도였던 미국 대통령 닉슨이 베트남에서 한 짓은, 마치 유대인이 나치에게 그렇게 당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일만큼이나,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 회의하게 한다.
제국주의 시대: 한몸이 된 군대와 선교사
하나이신 주님을 믿는다며 서로 칼질하고 죽이던 이 모든 시절을 지나 제국주의가 횡횡하던 근대로 넘어오면 기독교는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다.
선교사와 군대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녔다. 미국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개혁교회 신도였다. 그는 어느 날 백악관 복도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느님이 “필리핀을 해방시키라”라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맥킨리는 간증했다. 그 결과는 100만 명의 필리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이었다. (참고: 미국-스페인 전쟁) 그 이후로도 기독교는 여전히 서구 보수세력의 가장 큰 무기이다.
우리 역사 이야기도 좀 하면,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의 명분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이지만 조금만 역사를 안다면 순진하게 프랑스의 의도가 그것뿐이었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 네덜란드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 식민지 경쟁을 하고 있었다. 1882년 베트남이 어쩌다 프랑스에 의해 망하게 되었는지는 구한말에 우리에게도 전해진 [월남망국사]에 소상히 적혀 있다.
개신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 개항 이후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선교만 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권 확보에도 매우 열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익도 챙겼으니, 이들 선교사의 감언이설에 속아 하와이 파인애플 농장, 사탕수수 농장으로 간 한국 이민자들은 채찍을 맞아가며 노예처럼 일해야 하였다. 호러스 뉴턴 알렌(사진)과 같은 선교사는 그저 선교사가 아니라 외교관이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외교 목적은 당연히 미국의 이익이었다. 다수 선교사들이 조선과 같은 ‘아둔한 야만국’을 문명화하는 일본의 노력을 적극 지지했다.
사정이 이러니 ‘예수님은 좋지만,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좋아하기 힘들다’거나 ‘선교사가 기도 하자길래 눈 감았다가 떴더니 우리 손엔 성경이 들려있고, 선교사 손엔 땅이 들려 있더라’ 같은 소리가 나오는 거다.
“그 말이 아니라 그 행동을 보시옵소서”
역사는 수많은 폭력이 ‘주님의 이름’으로 벌여진 사실을 기록해왔다. 이 폭력의 역사, 야만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먼저다. 이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선교는 또 다른 일방적인 폭력과 그럴듯한 포장을 한 야만에 이끌리기 쉽다.
오스만의 전성기를 이끈 10대 술탄 쉴레이만(우리 식으로 읽으면 ‘솔로몬’)이 유대교 랍비, 기독교 신부, 이슬람 이맘을 불러 놓고 물었다.
“그대들은 모두 하나이신 하느님,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다윗의 하느님인 바로 그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자신이 옳고 다른 이들은 틀렸다고 하니 내가 어떤 것을 믿어야 하겠나?”
다들 이러니저러니 하는데 이슬람 이맘이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말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시옵소서”
저는 기독교인인데요.
저희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세상 뭐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거든요.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영혼구원”이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명령인데요,
그래서 전도를 안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기도 하구요.
왜냐면, 전도를 안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옥가도 나랑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전도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죠.
뭐 그 사람이 안 듣는다면 어쩔수 없는 것이겠거니와 듣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좋은것이죠.
전도를 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화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듣기 싫으면 까짓것 안들으면 되는 것이니까 말이에요 ㅎ.
글쓴이 입니다. 개신교 신자이신 것 같으니 개역개정 성경을 인용하여 답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만방에 나가 나를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도 스스로 예수의 가르침을 먼저 따를 때 다른 사람에게도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구원을 믿으라 하며 다른 사람의 종교와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고 우리만이 선한 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도 나무랐거니와(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보세요) 이슬람교도가 믿는 그 신(알라는 영어로 직역하면 the god 입니다.)은 본문 마지막에 썼듯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믿는 바로 그 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믿으세요”라고 하면 이슬람교도가 할 답변은 너무나 뻔합니다. “이미 믿고 있습니다”라는 거죠. 하지만, 일부 개신교 교회들은 그들이 믿는 것은 거짓 신이라고 단정하고 자신들만이 올바른 믿음이라 강변합니다. 저는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에게도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그 교회 말고 우리 교회 나오세요라고 하는 분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누구의 믿음이 진실된 것인가? 제가 본문 마지막에 쓴 것과 같이 행동이 어떠한 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봅시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
선교라 내세우지 말고 그냥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시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삶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하찮은 인간들이 굳이 높이 올려 찬양하지 않더라도 이미 더 없이 높으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를 높이려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선교라는 이름으로 강변하는 것도 포함해서요.
정말로 현명하신 답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