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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 법률 에세이10년도 더 된 예전 이야기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로펌에서는 부서별로 1년에 한 번씩 1박 2일 워크숍을 갔다. 내가 속한 부서는 민사송무팀이었는데 변호사와 스태프 포함 스무 명이 움직이는 행사였다. 그동안 주로 용인이나 춘천 쪽을 갔는데 이번에는 좀 멀리 다녀오자는 의견이 많아 목적지를 속초로 잡았다. 버스 한 대를 빌려서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버스

유명한 속초 막국숫집 

첫날에는 오후쯤 속초 호텔에 도착해서 간단히 세미나를 진행하고 저녁에는 바닷가에서 싱싱한 회에 술을 곁들이며 서로 친목을 다졌다. 둘째 날에는 대부분 어제 밤늦게까지 과음을 해서 제대로 아침밥을 챙겨 먹지 못했다. 총무를 담당한 김 변호사는 A 막국숫집에서 점심을 먹는 계획을 잡았다.

“속초에 오면 무조건 이 집에 가야 합니다. 엄청 유명한 곳이에요.”

예전에 속초를 방문했던 몇 명도 이에 동의했다. 대체 얼마나 유명한 곳이기에 그럴까, 궁금해졌다. 버스는 속초 시내를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12시가 넘었으니 다들 배가 고팠다. 그때 허기진 누군가가 창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 저기다!”

김 변호사가 가이드처럼 말했다.

“아닙니다. 저긴 짝퉁입니다. 워낙 유명하다 보니 비슷한 이름을 걸고 장사하는 곳입니다.”

짝퉁

좀 있다 또 다른 누군가가 허기를 못 참고 다시 소리쳤다.

“오~ 저기다!”

그러자 김 변호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쉽게도 아닙니다. 짝퉁 2호입니다. 하하하.”

짝퉁

‘짝퉁’ 가게를 지나 드디어 도착한 원조 집 

사람들은 짝퉁이 아닌 원조 A 막국숫집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시골길을 한참 들어가다 보니 큰 주차장에 차량 수십 대가 들어선 A 막국수집에 도착했다. 성지(聖地)에 도착한 순례자의 기분이 이랬을까.

우리는 약간의 감격과 설렘을 안고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아, 그러나 또 다른 고난의 관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고 식당 관계자가 대기표를 나눠줬다. 우리 번호는 80번대였다.

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이 정도일까, 사람들은 불만과 기대가 뒤섞인 반응을 쏟아냈다. 입맛을 다시며 20분 남짓 기다린 후에 우리는 식당 내 별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메뉴는 막국수와 메밀전, 녹두전이 전부였다. 벽에는 유명 연예인들의 친필 사인들이 여럿 붙어 있었는데, 이 식당은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었다.

막국수

최 변호사와 막국숫집 직원의 짧은 대화 

좌장격인 선배 최 변호사가 서빙하는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 정말 장사가 잘되네요. 밖에서 기다리느라 배고파 죽겠습니다.”

그러자 직원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원래 이렇게까지 밀리진 않는데 두 달 전에 주방장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주방이 좀 정신이 없어서……”

최 변호사는 20년 차 고참 변호사이다. 얼핏 봐서는 약간 나사가 빠진 것처럼 헐렁해 보이는데 준비서면 논리 구성이 탁월하고, 법정에서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예리한 반대신문 기법이 뛰어나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우리 로펌의 3대 천재 중 한 분으로 통한다.

대화 말풍선

최 변호사는 다시 직원에게 물었다.

“서울에 지점은 없나요? 지점 내도 아주 잘 될 거 같은데.”

“사장님이 예전에 전국 여러 곳에 지점을 낼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 후로 진행이 안 된 모양이에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최 변호사가 내준 숙제 

정말 그 집 음식이 맛있는지 아니면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정확히 분간은 안 되지만, 하여튼 정말 맛있게 막국수 한 그릇을 비웠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피곤한지 다들 곯아떨어졌다. 나도 잠을 청하고 있는데 최 변호사가 불렀다.

“조 변호사. 속초까지 왔다가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 안 그래? 내가 뭐 하나 얘기해줄 테니 메모했다가 오늘 밤이나 내일 좀 처리해줄래? 조 변호사가 그나마 믿음직해서 시키는 거야.”

아, 워크숍까지 와서 일을 시키십니까 싶어 조금 우울했지만, 선배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시 사항을 적었다. 메모하던 나는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선배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이 정도면 정말 셜록 홈스다.’

아이디어

막국숫집 홈페이지에 메일을 보내다 

나는 집에 돌아와 잠시 쉰 다음 선배가 내준 숙제를 처리했다. 인터넷에서 A 막국수 홈페이지를 찾아 ‘관리자에게 메일 보내기’를 클릭했다. 그러고는 선배가 가르쳐준 내용을 중심으로 메일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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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사장님께 꼭 전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법무법인 000에 근무하는 조우성 변호사라고 합니다. 이번에 회사 워크숍에 참석해 속초에 갔다가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음식이 정말 맛있더군요. 감동이었습니다. 오늘 식당을 방문하면서 몇 가지 느낀 바 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비슷한 상호 문제입니다.

주위에 비슷한 이름의 국숫집이 많던데, 처음 오는 손님들은 헷갈리겠더군요. 이처럼 유명한 상호를 비슷하게 따라 하는 행위를 ‘부정 경쟁 행위’라고 한답니다. 이런 부정 경쟁 행위는 소비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법에서 금지하고 있어요. 해당 법이 바로 ‘부정 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입니다. 비슷한 상호를 사용하는 업체들에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변호사 명의의 내용증명을 보내서 사용을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이메일 편지

둘째, 직원 퇴사로 인한 제조 방법 등의 유출 위험 문제입니다.

귀 음식점의 독특한 요리법, 양념은 다른 집에서 따라 하기 힘든 독특함이 있을 듯합니다. 이런 것은 ‘영업비밀’로 보호할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를 만드는 방법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는 코카콜라 사가 그 비법을 ‘영업비밀’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업비밀로 제대로 보호해놓으면 주방에 있던 직원이 퇴사하고 나가 비슷한 조리법을 사용할 경우 이를 법적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법률도 위에서 본 ‘부정 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입니다. 대신 영업비밀로 보호받으려면 절차가 좀 까다롭고 직원들의 서약서 등도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셋째, 프랜차이즈 사업화 문제입니다.

귀 음식점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지점 형태로 진출하면 손님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있을 것 같더군요. 그런데 프랜차이즈 형태로 사업화하려면 아주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답니다. 근거 법률이 바로 ‘가맹사업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입니다.

저희 사무소는 00치킨, 00피자 등의 프랜차이즈 컨설팅을 담당했습니다. 혹시 프랜차이즈 사업화에 관심이 있다면 연락해주시면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 연락처는 000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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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귀신같이 제 고민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최 선배의 말을 뼈대로 삼은 뒤 내용을 조금 덧붙였다. 메일을 받은 막국숫집 사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심 궁금했는데 바로 다음 날 A 막국숫집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

첫 마디가 이랬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귀신같이 제 고민을 알고 계십니까?”

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주방장의 이탈에 따른 영업비밀 유출의 위험성이었다. 아울러 또 다른 직원의 유출도 걱정스럽다는 얘기였다. 유사 상호 문제는, 자기네가 상표권을 갖고 있지 않아 아무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상표의 문제가 아닌 부정 경쟁의 문제로 대처할 방안이 있다니 놀랍다고 했다. 프랜차이즈 부문은 주위에서 자주 문의가 들어오고 있어 고민 중이었는데 내 메일을 받고 제대로 시작해보려 한다고 했다.

최 변호사와 나는 A 막국수 사장의 의뢰를 받아 몇 가지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처리하다 보니 계속 요청이 들어와 법무 자문 비용을 꽤 받을 수 있었다. 최 변호사는 이 수입금은 속초 워크숍으로 인해 발생했으니 다시 팀 워크숍에 쓰자고 했고, 덕분에 그해 겨울 우리는 용평으로 워크숍을 갈 수 있었다. 이처럼 고수의 한 수는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찌른다.

핵심 목표 과녁 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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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見), 관(觀), 진(診) 

한 분야에서 20년 정도 내공을 쌓으면 고수가 된다고 한다. 고수는 중수나 하수가 못 보는 무언가를 보고 느낀다. 하기야 1층 높이에서 바라보는 세상 풍경과 20층에서 바라보는 세상 풍경은 분명 다를 터다.

단순히 외피를 보는 경지(견; 見)가 있다면 이를 꿰뚫어 보는 경지(관; 觀)가 있고 나아가 문제점과 해결책까지 찾는 경지(진; 診)도 있을 것이다. 고수가 되기 위한 길은 멀고 또 지난(至難)하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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