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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말라리아의 날 (4월 25일)4월 25일 세계 말라리아의 날을 기념해 무언가 적어볼까 하다가 지금까지 한국의 말라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집중적으로 다루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흔히 말라리아라고 하면 열대성 질환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열대열 말라리아를 제외한 삼일열/사일열 말라리아는 19~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이나 러시아, 한반도 등 북부 지역까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한때는 사라졌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휴전선 인근에서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꾸고 있는 질병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말라리아는 ‘학질’, ‘제구실’, ‘하루걸이’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을 만큼 토착화되어 광범위하게 유행하는 질병이었다. 지금도 흔히 쓰는 ‘학을 떼다’는 표현은 이 ‘학질을 떼어 내다’는 표현에서 유래했다.

‘학을 떼다’는 말라리아에서 온 표현

학질이라는 표현이 다른 고열을 동반하는 질환과 섞여 쓰이고 있어 기록을 통해서는 정확히 언제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고려 시대 이전부터 토착화되어 유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인종(1123년)의 기록(고려사절요 9권)을 보면 “이자겸이 술사(術士)를 보내어 길가에 묻었더니, 소와 말조차도 감히 그곳을 밟지 아니하고, 학질을 앓는 사람이 와서 빌면 병이 나았다. 이자겸이 패한 뒤에 그 아들이 이장을 청하여 무덤을 팠더니, 시체가 변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학질에 대한 기록이 크게 늘어 조선왕조실록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대신들이 학질로 인해 정무에 참여하지 못했다거나 왕족 중 누군가가 학질에 걸려 요양을 갔다는 기록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정약용이 지은 다산시문집에는 “학질 쫓는 노래를 지어 이 의원에게 보이다: 이때 아내가 임신 중 학질에 걸려 3월부터 7월까지 백여 일 동안이나 앓았다”며 다산이 직접 지은 시조까지 실려 있다.

한반도에서 유행하던 말라리아는 주로 예후가 좋고 치사율이 낮은 삼일열 말라리아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백여 일이나 앓았던 것은 임신 중 태반에 말라리아 원충들이 자리 잡고 면역체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틈을 타 지속해서 잔류할 수 있어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으스스 한기 돌 땐 살갗이 싸늘하고 / 寒蔌簌洒肌肉
열이 펄펄 끓을 땐 간장을 조리는 듯 / 熱熇熇煎肺腸
귀신은 약속한 듯 네 어찌 찾아오며 / 鬼耶胡能來有信
복성은 온 성안을 어찌 두루 못 비추나 / 星耶何不徧一城
이제 장차 한 뿌리 동삼을 가지고서 / 逝將一條孩兒蔘
문 밖으로 귀신 몰아 평안을 얻고지고 / 長驅出門得安平

다산시문집 1권 학질 쫓는 노래를 지어 이 의원에게 보이다: 이때 아내가 임신 중 학질에 걸려 3월부터 7월까지 백여 일 동안이나 앓았다

조선 시대 내내 사회 내에 만연한 질병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개항 이후 들어온 외국인 의사들은 조선에서 가장 흔한 질병으로 학질을 꼽을 정도가 되었다. 오죽하면 서정주 시인마저도 “내가 여름 학질에 여러 직 앓아 영 못쓰게 되면”이라는 시까지 남겼을까.

내가 여름 학질에 여러 직 앓아 영 못쓰게 되면 아버지는 나를 업어다 산과 바다와 들녘과 마을로 통하는 외진 네 갈림길에 놓인 널찍한 바위 위에다 얹어 버려두었습니다. 빨가벗은 내 등때기에다간 복숭아 푸른 잎을 밥풀로 짓이겨 붙여놓고, “꼼짝 말고 가만히 엎드렸어. 움직이다가 복사잎이 떨어지는 때는 너는 영 낫지 못하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그 눈을 깜짝깜짝 몇 천 번쯤 깜빡거릴 동안쯤 나는 그 뜨겁고도 오슬오슬 추운 바위와 하늘 사이에 다붙어 엎드려서 위아랫니를 이어 맞부딪치며 들들들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게 뜸할 때쯤 되어 아버지는 다시 나타나서 홑이불에 나를 둘둘 말아 업어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고스란히 성하게 산 아이가 되었습니다.

말라리아의 특효약, 키니네

하지만 근대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개입과 식민지 의학 및 열대 의학의 유입은 말라리아에 대한 관리와 연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말라리아에 대한 정량적인 자료가 등장하는 것은 1886년 선교의사 알렌이 제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며 펴낸 진료 성과 보고서에서다. 이 보고서를 보면 당시 외래 환자 중 삼일열/사일열 등 말라리아의 특징인 간헐적인 열성 질환으로 방문한 사람이 884명으로 외래환자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말라리아 유행의 심각성을 깨달은 알렌은 당시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널리 쓰이던 키니네(quinine, 퀴닌)를 들여오게 된다. 당시 한반도에서 키니네는 금계랍(金鷄蠟)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알렌이 특히 두터운 신망을 얻었던 것은 키니네를 이용하여 말라리아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했던 이유도 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키니네의 분자식
키니네의 분자식. 출처: 위키백과, CC BY-SA 3.0

금계랍의 학질에 특효라는 사실이 널리 퍼져나가면서 대량으로 수입, 판매되기 시작했다. 당시 금계랍의 인기는 대단해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그러나 금계랍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후로, 학질을 앓는 사람이 1전의 양만 먹으면 즉시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우두법이 나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이 나와 노인들이 수를 누린다’는 유행가가 나왔다.”며 금계랍에 대한 노래까지 세간에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금계랍을 통해 민간에서 개인적으로 약을 사 먹고 말라리아의 피해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게 되자, 정부나 총독부에서 말라리아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했다. 일본 주둔군에서도 말라리아는 꾸준히 유행하고 있었지만, 치사율이 낮고 예후가 좋은 삼일열 말라리아였기 떄문에 일본이 대만에나 오키나와에서 마주한 열대열 말라리아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둔군의 감염 예방 이외에 다른 식민지 의학의 전개 과정처럼 민간으로 빠르게 관리 사업이 확대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0년대, 미신적 치료법도 성행

민간에서의 말라리아 피해는 약품 보급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격 등의 문제로 약품 공급이 균등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2년 경무국 조사로는 말라리아 감염자는 조선인 127,580명, 일본인 6,437명, 외국인 177명으로 합계 134,194명으로 1910~20년대 추정인구가 1,600만 명 안팎임을 고려하면 전체 인구의 100명 중 한 명은 계속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있었다는 의미다.

비교적 사망률이 낮은 삼일열 말라리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양결핍이나 만성적 감염에 의한 피해로 사망자 수도 한해 조선인 1,786, 일본인 21명, 외국인 1명 등 이천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히 1923년 연간 62,500명 수준이던 감염자는 1929년 166,000명까지 상승하는데, 이는 전체 경작 면적에 대비해 논농사 비율이 크게 늘고 관개 시설이 빠르게 확충되었으며,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지속해서 하락한 이유로 보인다.

말라리아에 의한 피해가 극심하다 보니 당시 민간에는 키니네 같은 약품 말고도 미신적 치료법들이 성행했는데, 신문들을 살펴보면 웃지 못할 사건 사고들도 실려있다. 1935년 7월 29일 자 조선중앙일보를 보면 학질을 앓던 노파가 아들에게 소를 끌고 나와 누워있는 자신을 넘어가게 하라 했으나 소가 배를 밟는 바람에 노파가 사망하는 사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사람 몸 위로 소가 넘어가게 하거나, 소에게 입을 맞추는 등 소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1935년 7월 29일 자 조선중앙일보 중에서
미신이 낳은 참사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지만, 이는 소가 모기의 공격을 일부 분산시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말라리아 감염 확률이 낮아질 수 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모기의 종에 따라 선호하는 흡혈 대상이 다르지만, 소 같은 대형 포유류가 있을 경우 사람 대신 가축을 물어 피해를 어느 정도 분산시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동남아시아의 논농사가 기계화되던 시기의 예가 있는데, 기존에 소를 이용한 농사법이 트랙터로 대체되면서, 주변의 모기들이 소 대신 사람들을 울기 시작해 기계화 농업 지역 근방에 말라리아 감염률이 크게 상승한 사례도 보고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열대 지방에 서식하고 치사율 높은 열대열 말라리아도 발견

한 가지 더 재미난 사실은 주로 한반도에서 유행하던 말라리아는 삼일열 말라리아였지만, 사일열 말라리아와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 열대열 말라리아까지 일부 토착화되어 유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알렌의 제중원 시절부터 간헐적 열을 앓는 환자들이 어떤 사람들은 삼일열, 어떤 사람들은 사일열을 앓고 있다는 점을 기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1929년 이전까지는 현미경을 통해 사일열 말라리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수수께끼는 커져만 갔다.

이후 1930년 충남 서산 인근에서 혈액검사를 통해 사일열 말라리아도 함께 활동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1936년 전염병 전문병원인 경성부립 순화병원에서는 입원환자 3명에게서 열대열 말라리아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특히 이들은 외국에 나간 적이 없어 그 기원에 대한 수수께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약 전파가 빠르고 사망률이 높은 열대열 말라리아가 토착화되어 있었다면 왜 광범위하게 퍼지지 못했던 것일까.

키니네를 통해 어느 정도 증상이 관리되고 있었으며, 주둔군에 큰 피해를 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민간에 대한 적극적인 말라리아 관리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 이후까지 말라리아는 한반도의 주요 전염병으로 남아있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대부분의 전란이 그렇듯 전염병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와 말라리아의 유행이 거세졌다.

1960년대 이후 근절 사업을 기반으로 수그러든 기세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잠복기가 긴 삼일열 말라리아는 전후 귀국한 미군 병사에게서 급작스레 발병하기도 해 ‘Korean malaria’라는 이름이 붙기까지 했었다. 1960년대 WHO의 말라리아 박멸팀이 한국에서 보건부와 공동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혈액 내 말라리아 양성률은 1.1%였으며, 발열 환자 중 말라리아 양성은 30.6%에 달했다.

한반도에서 말라리아는 1960년대까지 기승을 부리다 1959~1969년 사이 WHO와 종부 합동으로 벌인 말라리아 근절 사업을 기반으로 점차 기세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클로로퀸 등 효과적인 항말라리아제에 대한 접근이 쉬워져 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가 가능해졌으며, 무엇보다 논농사에서 살충제와 농약이 대량으로 사용되며 모기의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든 이유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질병관리본부의 말라리아 예방 홍보 동영상 중에서
질병관리본부의 말라리아 예방 홍보 동영상 중에서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말라리아 감염례를 극히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1979년에는 WHO에서 남한을 말라리아 완전 퇴치 지역으로 선포, 그리고 1984년 마지막 2건의 감염례가 보고된 것을 마지막으로 말라리아 보고가 완전히 중단돼 남한에서 말라리아는 사라져 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말라리아의 재유행 보다는 해외여행의 증가로 외국에서 감염되어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관리로 관점이 옮겨갔다.

1993년 이후 재토착화한 말라리아의 습격

하지만 1993년, 국군수도병원에 고열과 오한이 반복되는 23세 군인이 찾아왔다. 7월 중순부터 18일간 격일로 매회 4~8시간 동안 지속하는 발열과 오한이 주 증상이었는데, 파주의 야전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외국에 나간 일은 없으며, 수혈이나 정맥주사를 맞은 적도 없다고 했다. 해외 유입이나 혈액 오염을 통한 감염이 배제되고 나니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남한 말라리아의 재토착화.

1993년 당시 말라리아가 재토착화되어 다시금 유행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93년 휴전선 인접 지역에 재출현한 말라리아는 휴전선 근방에 복무 중인 군인들을 대상으로 유행하다 1998~2000년 사이에는 민간인 사이로까지 퍼져나가 연간 약 4,000여 건의 환자를 발생시킬 정도로 휴전선 인근의 위협적인 감염성 질환으로 급부상했다.

2000년 이후에는 휴전선 인근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말라리아 예방 사업이 확대 전개되어, 오히려 제대군인을 제외한 민간인 감염자 비율이 점차 늘어나 2005년에는 전체 감염자의 80%가량이 민간인에서 발생했다. 초기에는 파주, 연천 지역에서 발생하던 삼일열 말라리아는 동서로 빠르게 확산하어 2000년경에는 휴전선 인접 전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말라리아가 적혈구 내에 잠재하다 오염된 혈액을 통해 감염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휴전선 인접 지역의 헌혈이 제한되고 있으나, 헌혈 자체가 제한되는 것은 아니고 전혈 헌혈 및 혈소판성분헌혈을 제외한 혈장성분헌혈은 가능하다. 또한, 현재 시군구 단위로 나누는 것이 생활권 단위로 재편하고, 환자 발생률에 따라 제한 지역을 계속 재편하고 있으므로 헌혈을 원하나 제한지역에 거주 중이신 분들은 가까운 헌혈의 집을 찾아가 문의하는 것도 좋겠다.

재토착화의 이유? 북한 유래설

1993년 이후 휴전선 인근의 말라리아의 재토착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현재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북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남한의 보건체계에서 10년 이상 감염례가 확인되지 않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휴전선에 가까울수록 감염자 수도 많고 항체 농도도 높다는 점, 그리고 환자 발생이 휴전선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는 점 등을 통해 이렇게 추측하고 있다.

한반도 군사 분계선 지도
출처: 위키백과 (Ras67, Korean dmz map, CC BY-SA 3.0)

하지만 WHO의 보고를 보면 1970년대에 이미 북한에서는 말라리아가 근절되었다, 1997~1998년에 이르러서야 재발생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어 남한 측의 주장과는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북한이 말라리아의 유행을 숨기고 있었다는 추측도 있지만,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더욱 정확한 유래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잠시 현재 북한의 말라리아 감염 상황을 살펴보면, 98년에 1,100건이 확진되었으며, 추정 감염 규모는 25,000가량이었다. 이후 여러 자연재해와 극심한 식량난, 생태계 파괴 등의 영향으로 급속히 환자가 늘어나 2001년에는 115,615명이 확진되고, 300,000명 이상이 감염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 WHO의 지원으로 방역사업이 이루어져 감염자 규모는 꾸준히 줄고 있지만, 여전히 꽤 많은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지속적인 관리로 2013년 감염 보고가 445건으로 크게 줄었고, 해외 유입을 제외한 국내 감염자는 그중에서도 385명이었다. 이에 따라 2017년에는 다시금 말라리아 퇴치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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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여인석. “학질에서 말라리아로.” 의사학 20.1 (2011): 53-82.
  2. 채인호, et al. “외국여행경력이없는남자환자에서발병한삼일열말라리아 1 예.”기생충학잡지 32 (1994): 195-200.
  3. 이순형. “우리나라 기생충 질환의 변천사.” J Korean Med Assoc 50.11 (2007): 937-945
  4. 고원규. “국내말라리아의재유행.” 대한의사협회지 50.11 (2007): 959-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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