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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프린트비: 디지털 영화 시대의 새로운 횡포

대형 극장들이 가상 프린트 비용(Virtual Print Fee)을 받겠다고 나섰다. 항공사가 배로 가면 며칠 걸릴 곳을 몇 시간에 갈 수 있어 승객들이 숙식비를 아꼈으니, ‘가상 숙식비’를 받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Saire Elizabeth, CC BY NC SA

Saire Elizabeth, CC BY NC SA

독립 제작사의 단비 ‘디지털 상영’

이제 영화 극장 대부분이 디지털로 탈바꿈했다. 즉, 프로젝터에 피자판 정도 사이즈의 필름 통에서 뽑은 필름 줄을 걸 필요 없이 하드디스크만 연결하면 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촬영 자체를 대부분 디지털로 하니 상영도 디지털로 할 수밖에 없게 된 면도 있고, [아바타]로 시작된 3D 영화붐이 디지털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인 면도 있다.

덕분에 영화 배급사들은 얼추 개봉관 숫자만큼 필름통 세트를 1벌씩 만들어서 보내주는 비용을 덜게 되었다. 1벌에 약 1백50만 원으로 치면, 200개 관에서 개봉한다고 했을 때 영화 1편에 약 3억 원을 절약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디지털 상영은 영화계에는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극장들만이 꾸준히 흑자를 올려 왔을 뿐 투자-제작-배급-상영 복합체에 속하지 않은 독립 배급사는 물론 독립 제작사들은 업계 전체적으로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해왔었기 때문이다.

가상 프린트비 요구한 ‘CJ’와 ‘롯데’의 탐욕

"가상 프린트비 내놔!"

“가상 프린트비 내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디지털상영을 하는 독립 배급사들이 하지도 않은 필름 프린팅 비용의 약 40% 정도를 ‘가상 프린트비’라는 이름으로 계속 지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스크린의 70%를 점하고 있는 두 극장 체인 CJ와 롯데가 아날로그 시절에는 받지 않던 돈을 디지털 시대의 배급사들에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극장 측은 배급사들이 디지털화로 누리는 비용 절감이 엄청나니 여기서 영사기 구입비를 일부 지원받고자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CJ와 롯데는 영화 배급 시장도 상영관 기준 40%이상 점유하고 있다. 여기서 절감하는 프린트 비용이면 자신들이 운영하는 극장 전체를 디지털화하고도 남는다.

혹자는 극장 측에서도 디지털 영사기 사느라 거액을 추가로 들였다고 말한다. 영화업계의 디지털화 비용은 극장만 부담하는 게 아니다. 제작사도 디지털로 영화를 찍으려면 고가의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거나 임대해야 한다. 제작사가 디지털 카메라 구입비나 촬영비를 극장 측에 청구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 ‘가상 프린트비’는 기술 발전으로 생기는 이익을 한 푼이라도 더 챙기겠다는 탐욕일 뿐이다. 항공사가 “배로 가면 며칠 걸려 갈 곳을 날아서 몇 시간에 갈 수 있어 숙식비가 덜 드니, ‘가상 숙식비용’을 받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곤궁한 독립 제작사, 독립 배급사들이 모처럼 갈증을 푸는 단물에 재를 뿌리는 격이다.

울며 겨자 먹기… 프린트 비용 내는 독립 배급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배급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만들지도 않은 프린트의 비용을 극장에 내야 한다. 한국 극장의 70% 이상을 CJ(CGV)와 롯데(롯데시네마) 두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 두 회사에게 밉보이면 정상적으로 영화를 배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상 프린트 비용’ 도입 이유 미국과는 정반대

미국, 5대 메이저 영화사는 극장운영 금지 (1948년

‘가상 프린트비’라는 말은 미국에서 나온 것인데 그 연혁과 실체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미국은 1930년대부터 7, 8개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기획, 제작, 배급의 95%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5대 메이저는 주요 극장들까지 사들이면서 마이너 영화들은 아예 상영 기회를 잡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 불공정성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공정거래위원회와 법무부가 수년간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했고, 결국 1948년에 5대 메이저들의 극장 운영을 금지하는 반독점법 판결이 나왔다. 결국, 현재는 투자배급 및 제작은 메이저들이 과점하고 있지만, 극장 산업에는 진출하지 못한다.

미국, 디지털 영화 배급로 확보 위해 가난한 극장 지원한 것 

이런 상황에서 어떤 극장들은 디지털 영사기 구입을 하기 위한 자금력이 부족한 경우도 있다. 메이저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디지털 영화들을 원활하게 배급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디지털 극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중소극장들에 복잡한 구조를 통해 영사기 구입비를 융자해주면서 원리금 상환의무를 감면해주는 것을 “가상 프린트비”라고 부른 것이다. 결국, 미국의 가상 프린트비는 대형 배급사들이 스스로 극장을 직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디지털 영화의 배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가난한 극장들을 지원해주는 돈이었다. 우리처럼 독과점 극장이 독립 배급사들로부터 강제로 받는 돈이 아닌 것이다.

신문에 칼럼 나가자 바로 메일 보낸 CGV

내 글이 오늘 신문에 나가자 CGV측에서 곧바로 메일로 연락이 왔다. 내가 가장 이 사회에 잘 기여하는 부분은 학습(learning)이 아니라 학습 해체(unlearning)가 아닌가 싶다. 외국법과 관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표피만 ‘배워’와서 한국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의 ‘배우지 못했음’을 깨우치는 일 말이다.

내가 1930년대 상영-배급 겸영금지 원리를 세우고 실제로 당시 5대 메이저들을 강제분할시킨 파라마운트 판결을 인용하자, CGV측에서는 그 판결이 미국에서 “사문화”되었다며 반박하려는 메일이었다. 그런데 살펴보니 인용하는 글들이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의 탈규제정책의 파고가 높았을 때 나온 논문들이다. 그 글은 그 시대상황에 대해 쓴 것이었고 그 판결은 아직도 건재하다. 지금 상황이 중요하다면 왜 지금 나오는 이런 쉬운 글들은 찾아보지 않는가.

아니 어느 시대 글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논문을 잘 읽어보면 레이건 시대의 탈규제정책 때문에 미국 법무부가 파라마운트 판결의 집행을 거부하고 있다는 정도이지 판결 자체는 건재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당대의 흐름에만 온정신을 빼앗기니 이런 판단이 나온다.

이런 경우는 많이 있다. 미국 징벌적 손해배상의 폐해를 지적한 최신 논문 몇개를 보고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도 징벌적 손해배상 폐지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식이다. 일본 기업들 몇개가 불황 때문에 감원하는 것을 보고 “일본 평생고용제는 망했다”는 식이다. 호수에 가서 수면에 이는 파문만 보고 와서 물이 바람에 쓸려 다 날아갈거라고 보고하는 식이다. 엄청난 물이 아래 버티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가 빠른 변화에 익숙해서일까

가상 프린트비 받겠다면 ‘가상’으로 준 걸로 치자

기술발전으로 생기는 모두에게 돌아갈 이익을 한 푼이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대기업의 탐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통사들이 그렇게 ‘콸콸 터진다’고 선전하는 스마트폰 데이터망도 그걸로 음성통화(mVoIP)라도 해보려고 하면 차단하고 제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생각대로’ 쓰지 못하는 데이터는 받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요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있지도 않은 프린트를 있는 걸로 치고 돈을 받겠다면, 돈도 실제 주지는 않았지만, 그냥 준 걸로 치자. 그게 안 되면 미국처럼 대형 극장배급겸영을 금지해야 제대로 된 ‘가상프린트비’가 정상화되려나?

영화사에서 디지털로 영화 찍을 때 극장에 촬영비를 분담하라고 하면 극장은 뭐라고 할까? (사진: 레드원)

이 글은 필자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보충하고, 퇴고한 것입니다. 슬로우뉴스는 블로그나 타 매체에서 발행했다 하더라도 좋은 취지와 내용을 담은 글이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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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박경신
초대필자, 오픈넷 이사

오픈넷 이사. 고려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진실유포죄], [호모 레지스탕스] 등 저자.

작성 기사 수 : 3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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