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냐의 북라이딩] 회사였다면 당연히 ‘기획’이라고 이름 붙였을 ‘누군가 꼭 해야 할 일들’. 아무도 값을 쳐 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 대개 여성이 독박 쓰는 그 귀한 노동에 관하여… (⏳3분)

멀티태스킹을 너무 많이 하고 있었다. 머릿 속은 늘 분주했다.
- 냉장고의 감자와 호박이 시들거리니 찌개를 끓여야겠구나,
- 얼려둔 목살이 다 떨어졌으니 고기를 주문해야하나,
- 동네 정육점과 온라인 쇼핑몰 가격비교 해봐야지,
- 아이 작년에 입던 패딩은 올해도 괜찮겠지,
- 새 코트를 사줘야 하나,
- 침대 시트 빨아야 하는데 주말 날씨가 화창한가,
- 섬유유연제도 새로 주문해야 하네,
- 샴푸도 바꿔야 하나,
- 어머님 생신에 어떤 선물? 음식은?
- 아빠 간병인을 또 바꿔야 한다고?
- 아이들 어릴 적엔 학원 알아보고 고르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기획 노동
이런 게 노동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기획 노동이라고 했다. ‘살림과 돌봄의 전반을 계획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고 의사결정을 하며 일을 배분하고 관리하는 정신적 노동’. 실제로 빨래하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것처럼 실체가 없어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당사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김희경 작가는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고 ‘기획 노동’을 새롭게 호명했다.
<이상한 정상가족> (2017)과 <에이징솔로> (2023)를 통해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치거나 편견에 사로잡혔던 일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진단해온 작가는 이번에 ‘기획 노동’을 발굴했다. 국내에서도 2018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처음 언급했고, 해외에서도 코로나를 계기로 인지노동(cognitive labor), 정신적 부담(mental load) 연구가 본격화됐다. 예측하고, 알아보고, 결정하고, 점검하는 인지노동은 기업에서는 ‘기획’이라는 고급 업무인 반면 가정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가 연간 500조원이라지만 기획 노동의 가치는 추산도 어렵다.

살림과 돌봄의 기획은 대체로 여자들 몫이다. 일을 하든 말든 육아를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치에 따라 잘못되면 다 엄마 탓으로 느끼거나 누가 뭐라 안해도 혼자 힘든 경우가 적지 않다. “밀려오는 온갖 걱정과 감정적 책임감이 함께 작동하기 때문에 살림과 돌봄의 기획 노동은 단순한 생각이나 논리적 사고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겪어본 이들은 공감할 게다.
워킹맘으로서 집안일과 업무를 저글링할 때 ”도와줄게“라는 남편의 말은 마뜩찮았다. 뭐든 지시만 하면 다 해준다는 호의에 되려 짜증났다. 그 ’지시‘란게 꼭 있어야 하나? 왜 내 눈엔 보이는 일들이 당신 눈엔 그게 보이지 않지? ’아내 일‘을 남편이 돕는 다는 정의는 타당한가? 2일 북살롱 오티움에서 열린 김 작가의 북토크에서 청중들은 “나한테 시키지 그랬어”라는 말이 분노 유발 버튼이라는데 공감의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는 공격적? 여성은 돌봄?
오래전 사냥을 하던 남자와 수렵, 채집에 나선 여자들이 각각 공격적 성향, 돌봄 성향이 있다는 가설도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과거 유적을 분석한 결과, 사냥 도구의 30~50%는 여성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실제로는 남녀가 함께 사냥에 참여했으며 드물게 성공하는 사냥 대신 대부분 채집으로 먹고 살았다는 연구도 나왔다.
맞벌이 부부, 싱글맘, 전업주부 등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의 기획 노동을 취재하던 저자는 가사와 양육 뿐 아니라 나이든 부모 돌봄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장애 아동을 키우는 부모, 당사자 장애인, 간병이 필요한 부모의 자녀를 만나보면 혹시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 못할까 두려워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었다.
가사 분담에 적극적이어도 기획 노동까지는 신경 못쓰는 이가 있는 반면 기획 노동에 적극 나서는 남편, 아들도 분명 있었다. 중요한 것은 환경과 시간. 살림과 돌봄을 여성의 일로 한정하지 않고 함께 하는 환경을 만들어 충분히 시간을 쓰면 기획 노동도 적절하게 분배된다.

공공의 역할… 그리고 해법은 ‘소통’
어떤 종류의 기획 노동은 공공에서 인프라를 갖추면 부담이 줄어든다. 장애 아동을 국가가 책임지고 돌보는 경우, 부모가 헤매지 않도록 양육 교육까지 해준다. 일본에서는 ‘케어 매니저’가 의사, 간호사와 함께 노인의 존엄한 일상과 마무리를 위해 머리를 맞댄다. 장애 당사자가 공백 없이 활동 지원 시간을 받으려면 모든 유형의 장애를 다 갖고 있어야 하고, 주거지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야 하고, 돌봄이 가능한 가족도 없이 벼랑 끝에 있어야만 하는 우리 현재 방식은 과연 괜찮을까?

김 작가는 북토크에서 당장 부부 사이에 기획 노동을 나누는 해법의 첫발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소개했다. 소통이다. 소소한 사안부터 막중한 일까지 현안 정보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면 된다. 예컨대 애들 학원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맡기는게 아니라 함께 정보를 찾아보고 함께 결정하는 방식이다. 혼자 알아보고 혼자 결정하고 최선의 선택인지 자신 없어 절절매는 일은 최소한 피할 수 있다.
사랑과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생색낼 수도 없고, 대가를 바랄 수도 없는 돌봄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스스로 별것 아니라고 깍아내리면서도 꽤나 힘들었던 기획 노동이 전혀 하찮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일을 호명하는 것은 이렇게 응원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