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정의한다.

‘추구할 권리’라는 건 알아서 추구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원재(랩 2050 이사장)는 “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행복할 권리’로 바꾸고 국가의 책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행복할 권리’를 이야기할 때가 됐다.

18일 출범한 ‘다시 만드는 세상’은 이원재와 봉한나 등이 주도하는 시민 참여 정책 제안 플랫폼이다.

봉한나(‘다시 만드는 세상’ 대표)는 “행복할 권리는 추상적이지 않다”면서 “직장 내성희롱을 신고해도 해고되지 않을 때, 이사할 때 보증금 떼일 걱정 없을 때, 늙고 병들었을 때 혼자 죽지 않을 때,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을 때, 이런 게 행복할 권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행복할 권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문제의 접근이 달라진다. 헌법에 주거의 권리가 있는데 집이 없어서 불행한 거다. 열심히 일해도 집을 사기 어려우니 불행한 거다. ‘행복할 권리’를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주거의 권리를 보장할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봉한나는 행복의 7가지 요소를 주거와 일자리, 교육/돌봄, 의료/보건, 노후/연금, 건강한 공동체, 문화생활 등으로 정리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넘어 행복할 권리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 첫째, 헌법이 바뀌어야 한다. 국가가 행복을 책임진다는 원칙을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 둘째, 법을 만들어야 한다. 헌법이 방향이면 법은 실행의 도구다. 누구에게 어떤 집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청년의 일자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돌봄과 교육과 의료를 어떻게 공공적으로 제공할 것인가 등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 셋째, 정책이 실행돼야 한다. 안 하니까 안 되는 거다. 정책을 실현할 의지, 사람과 정책이 있어야 비로소 행복할 권리가 작동된다.

국회 입법 청원 시스템을 플랫폼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청와대 국민 청원은 없어졌지만 국회 입법 청원 시스템은 남아있다. 이광재(전 민주당 의원)가 국회 사무총장 시절 만든 시스템이다.

30일 안에 100명이 찬성하면 공개되고 30일 안에 5만 명이 동의하면 청원이 접수되고 국회가 반드시 답을 해야 한다. 의원이 직접 청원을 골라 발의할 수도 있다.

‘다시 만드는 세상’은 정책 전문가와 현장 활동가, 연구자,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정책 네트워크를 만들어 현장의 문제 의식과 정책 기획, 국회 입법을 연결하는 정책 밸류체인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봉한나는 “시민단체에서 만들어도 정책이 끝까지 가지 않는다면, 밀고 가보자, 정책 밸류 체인을 만들어서 힘을 실어보자는 게 우리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비슷한 시도가 많았고 ‘다시 만드는 세상’도 아주 놀랍고 새로운 실험은 아니다. 다만 연결되지 않은 지점이 있었고 역량을 모아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래는 이날 발표회 주요 발언을 정리한 것이다.

진짜 필요한 연구를 해보자 / 윤형중(랩2050 대표).

  • 연구하는 방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그동안 입법 로비스트 같은 일을 많이 했다. 공공기관 발주를 받아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용역을 줄 수 있는 공공기관을 찾아 일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진짜 필요한 연구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시민들에게 연구 발주를 받아보면 어떨까, 그래서 만든 게 정책 연구 시민펠로우십이다. 연구자들을 모으고 이런 연구를 해볼 테니 참여해 달라, 시민들에게 후원을 받아 연구비를 지원한다. 노무현재단 공모 사업에 선정돼서 약간의 재정적 지원도 받게 됐다.
  • 돈을 받으면서 연구했지만 돈을 주면서 연구하는 건 처음이다. 세계 최초일 거라고 본다. 연구 결과가 특정 단체의 캐비넷에 머물지 않도록 실제 정책에 사용되는 민주적 연구를 진행하는 게 목표다.
  • 시민펠로우십의 첫 시작은 전세 사기 대책으로 간다.

외교안보 청년 싱크탱크를 만들어 보자 / 이진우(한반도청년미래포럼 대표).

  • 일단 국회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 보좌진의 업무 경계가 없다. 미국 의회와 비교하면 공보와 정책과 수행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있고 인턴십도 너무 부족하다. 청년 정치인들이 업무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다. 보좌진을 좀 더 전문화하고 세분화할 수 있는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 특히 우리가 관심 갖는 건 외교 측면에서는 청년들의 경험이 적다는 것이다. 외교와 통일 이슈에 관심 있는 청년 실무자들이 탈출한다. 일본은 초당적으로 위원회 활동도 많이 하고 외교관 지망생들을 전략적으로 키운다. 대사관저에 불러서 파티도 하고 네트워크도 만들어 준다.
  • 한국은 일단 국회 인턴십 프로그램부터 늘려야 한다. 자문위원회도 늘리고 상임위에서도 인턴을 뽑고, 실무형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늘려야 한다. 전략태세검토위(CCSP) 같은 초당적 외교안보기구가 필요하다. 의회 차원에서 외교 안보 어젠다를 강화해 보자.
  • 미국 의회에서 인턴십한 청년들이 한국 국회에서 일해야 한다. 지금부터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10년 뒤 자산이 된다.

지역과 연결고리를 만들자 / 장홍석(뮤지엄P 운영자).

  • 지역 자치의 영역이 넓어지면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공공에서 주도하는 콘텐츠들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주당의 청년 비례 연석회의에 참여해서 이런 제안을 했다.
  • 첫째, 이중 주소를 허용하고 지역 자치 참여 권한을 주자.
  • 둘째, 폐가를 리모델링해서 장기 임대 또는 구매를 지원하자.
  • 셋째, 지역에 워케이션 센터를 설립해서 커뮤니티 운영과 창업 지원, 교통비 일부 지원 등의 유인을 주자.

인구 2% 서명, 해보니까 되더라 / 조은주(민주당 경기도당 청년위원장).

  • 10년 전에 경기도 시흥시에서 청년기본조례라는 걸 만들었다. 주민 발의를 하려면 투표권자 2%의 서명이 필요하다고 하길래 무작정 종이를 들고 사람들을 만났다. 별로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때만 해도 온라인 서명이 활성화되지 않아 직접 종이로 받고 주민등록번호와 주소에 서명까지 받아야 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해서 두 배 이상 많은 1만4373명의 서명을 받아 조례가 통과됐다.
  • 10명이 3개월 동안 일상을 버리고 뛰어다녔던 건 내가 행복하려면 주변도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지지와 동의를 받는 방식으로 조례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 우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희망없는 세상의 시작이라고 본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야기를 꺼낼 거고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본다. 과연 이게 될까 했는데 손 내밀어주는 시민들이 있더라.

국회의원들 일 시키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 이광재(전 국회 사무총장).

  • 교육에 관심이 많다. AI 시대에는 기회도 많다. 교육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본다.
  • 한때는 우리가 전문가 여론조사를 돌린 다음 그 결과를 기자들에게 뿌리면 누군가는 기사를 쓰고 또 누군가가 그걸 보고 정책을 만들고 국회의원이 픽업을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아니더라.
  • 내가 국회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국회 입법 청원을 만들었다. 시민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그걸 입법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싶었다. 그냥 연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같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 상임위마다 젊은 국회의원들을 하나씩 여기에 붙이고 좋은 제안이 오면 국회의원들 일을 하게 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정치 기사에 정책이 없는 이유 / 이정환(슬로우뉴스 대표).

  • 국회 기자실에 가면 출입기자가 2000명이 넘는다.
  • 날마다 국회 의원회관을 드나드는 기업 대관 담당자도 2000명이 넘는다.
  • 대관 담당자들과 보좌관·비서관들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정책과 제도, 규제다.
  • 해마다 국회에서 열리는 세미나와 토론회가 2000건 이상이다. 의원들을 만나면 기자들이 안 온다고 한다. 정치부 기자들은 정치를 드라마로 다룬다. 사람들 이야기가 있고 권력과 음모, 배신, 성공과 실패를 다루지만 여기에는 정책도 없고 경제도 없고 사회도 없다. 그건 정치 이야기가 아니니까.
  •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모두 2만5858건, 이 가운데 가결이나 수정 등 반영된 법안은 9063건, 35% 정도 된다.
  • ‘다시 만드는 세상’이 말하는 밸류체인의 비어있는 연결고리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해법과 정책의 마지막 단계가 입법이라면 입법의 모든 과정에 참여와 감시가 필요하다.

‘다시 만드는 세상’의 실험, 잘 될까.

  • 그동안 정책 제안 실험이 없었던 게 아니다. 와글이나 빠띠 같은 시민 참여 플랫폼도 많다. ‘다시 만드는 세상’은 현장과 정치를 연결하는 밸류체인을 만든다는 다른 접근으로 출발했다.
  • 제안은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제안을 받게 만들까. 이원재는 “정치를 멱살 잡고 간다”는 표현을 썼다. 일단 정책을 잘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시민사회의 역량을 끌어모아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인들이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밸류체인이 작동하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게 이원재의 생각이다.
  • 이광재는 “대선이 가장 정치적 에너지가 폭발하는 때”라면서 “지금이 참여 정치의 실험을 하기 가장 좋을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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