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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짓기: 살인자, 테러리스트 그리고 80년 광주

내가 이과 출신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런 습관이 붙어 버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관해 붙여진 이름에 관해서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물리학에서는 당연히 그렇다. 상대성이나 대칭성, 동시성 등, 추상적인 개념들에 붙여진 이름들 사이에는 가치의 우열은 전혀 없다.

‘살인자’라는 이름

예를 들어, ‘살인자’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그런 입장이다. 살인자는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그런 경우 매우 나쁘다는 감정, 즉 살인자는 매우 나쁜 사람이라는 암묵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겠지만, 내 경우는 일부러라도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죽이게 되는 상황은 매우 다양하게 발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때도 있고, 분노를 조절하는 데 실패해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또 정당방위로 자신의 목숨이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직접 살인을 하지 않아도 권력을 이용해서 살인을 교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도 다 살인자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도 역시나 살인자다. 테러범에 맞서 싸우다가 인질을 희생시킨 대통령도 살인자일 수 있으며, 수술 중에 실수를 저질러서 환자를 죽게 만든 외과의사도 살인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모든 경우를 총칭해서 살인자라는 명칭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밑도 끝도 없이 살인자라는 한 단어만을 듣고, 참 나쁜 사람이구나, 하는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일이 아닐까?

결국, 살인자라는 명칭, 그 한 단어는 매우 가치 중립적인 이름 짓기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당연히 그런 이름 짓기의 결과로 탄생한 단어들은 가치 중립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 내 입장이고 말이다.

‘테러리스트’라는 이름

이런 태도는 테러리스트라는 단어에도 적용된다. 김구 선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투쟁을 벌였다고 해서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미 ‘테러리스트’라는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그 부정적인 명칭이 김구 선생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점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는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고, 정규 군사작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요인 암살, 공공 시설물 폭파 등의 비정규 군사작전과 유사한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테러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무장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테러를 감행한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그 명칭의 가치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별문제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모국의 독립을 위해 벌인 테러는 테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도 살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만약 이런 식의 가치가 개입된 구분을 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말장난 같아도 화이트 테러, 블랙 테러 등으로 가치 개념을 부여해서 명칭을 달리 지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착한 테러, 나쁜 테러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IchStyle (CC BY)

IchStyle, “백범 김구” (CC BY)

그리고 ’80년 광주’

백분토론에서 있었던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와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토론에서 바로 이와 유사한 논쟁이 발생했다. 80년 광주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변희재 대표는 이 사건에 대해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붙이고 다시 한번 사건 전체에 대해 재고를 해 보고 싶다고 얘기를 한다. 광주사태라는 명칭이 가치 중립적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의 주장이 광주의 의미를 폄훼하고자 하는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것은 양측 모두가 암묵적으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최소한 공개적으로 변 대표가 원하는 것은 광주에 대한 재고, 재조사, 재정립이다. 이런 태도는 비난받을 만한 태도는 아니며, 우리는 언제든지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재고해 보는 태도를 권장할 필요도 있다.

이에 대해 이택광 교수는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업라이징(Uprising)”이라는 표현을 인용하기도 했다. ‘업라이징’이라면 봉기, 반란, 폭동의 의미가 있는 용어다. 이 용어를 두고서도 SNS 공간에서는 또 한참의 설왕설래가 이어지기도 했었다.

기본적으로 광주는 이미 꽤 오래전에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라고 결론이 나고, 이에 대해 공식적이고 사회적인 합의가 이룩된 사건이다. 전두환과 그 일당은 비록 나중에 사면되긴 했지만, 이 범죄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이며, 5.18은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정립되었고, 이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보상도 이루어지고, 역사적 기록물도 남겨진 상태이다. 이런 내용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사안이기도 하다.

자세하게 보자면, 전두환 일당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정권을 탈취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확대했고, 이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광주시민이 이 폭압적인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총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고, 시민군과 진압군 사이에 전투가 발생했으며, 결국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진압된 사건인 것이다.

전두환 측이 진행했던 군사 쿠데타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시도였고, 이에 저항한 광주시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민주화 운동,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신군부에 저항했던 민주화 항쟁,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의 무장봉기인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이러한 실질이 서로 간에 이해되기만 한다면 나는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광주를 무슨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이는 ‘반란’이라고 이름을 붙인다거나, 사회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난동을 부린 ‘폭동’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것은 가치 이전에 틀린 이름 짓기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 민주화 항쟁, 업라이징 등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어느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광주 항쟁, 혹은 민주화 항쟁이라는 이름을 선호하는 편이다. 총 들고 ‘운동’한 것은 아니잖은가.

이름 짓기의 빛과 그늘

명칭의 가치 중립성을 얘기하면서 하필 김구 선생이나 광주를 예로 든 것에 대해 나 또한 솔직히 부담이 있기는 하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이름을 붙이는 것이 구구절절한 설명을 붙이는 것보다도 훨씬 더 명쾌하게 본질을 ‘느끼게 한다’는 효과도 잘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은 디테일한 설명을 듣기 전에 이미 한 단어가 주는 느낌을 기반으로 판단해 버리는 버릇이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느낌’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광고 마케팅 업계에서 활약하는 카피라이터이며, 그런 이름 붙이기가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닥치고 정치”라거나 “쫄지 마”라는 카피는 지난 총선 대전 이전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의 가슴에 날아가 꽂힌 성공한 카피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보수의 꼬깔콘”이라거나 “꼼꼼하신 가카” 등의 자잘하게 성공한 이름 짓기의 결과도 무수히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이름 짓기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성적인 이름 짓기가 가져오는 선입견, 이런 선입견을 이용해서 대중을 설득 (어떤 쪽에서는 이런 것을 선동이라고 부르고 있다)하는 기법에는 별로 동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가슴을 콕 찌르는 이름 짓기가 유발하는 대중적 공감은 매우 취약하거나 오히려 위험한 역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편이다.

그런 명칭 하나, 이름 하나에 흥분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 반대의 명칭 하나, 이름 하나에 치를 떨면서 분노하기 마련이다.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고 해서 화부터 내고 욕설부터 한다거나, 광주를 “업라이징”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때려죽일 듯이 달려드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반응이라면, 과연 저 사람은 저 명칭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명칭의 이면에 실제로 그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어떤 세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찬찬히 들어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동의할 수 있는 부분과 반대할 부분을 나누어,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은 합의하고 반대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논쟁에 임하는 것이 옳다.

그럴 시간이 없다고?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의가 부족하고, 그저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프지만 더 정확한 표현 아닐까? 아니면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 자체를 머리 아파하고, 매사에 대충대충 느껴지는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심성이 더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이름 짓기 뒤에 숨어서 자라는 편견과 게으름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는 주장도 있고, 이 주장에 연계된 논쟁의 흐름도 있다. 이름 짓기는 사물이나 사건을 분석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름 짓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오히려 그렇게 한 마디 이름만 붙여 놓고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돌아서 버리는 게으름을 힐난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름 뒤에 숨어있는 본질에 대해 성의를 다해 따져보고,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꼼꼼함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한 논쟁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최소한 이름 짓기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그저 제목만 보고 판단해 버리거나, 이름만 보고 분노하거나 동조를 하는 그런 성급함에 대해서 경계를 하고 싶다는 나 자신에 관한 단속일 수도 있겠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수사한 검찰 수사결과 보고서에 의하면, 심지어 온갖 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찬반 표시를 하던 국정원 직원들마저도, 제목만 보고 실수해서 반대로 찬반을 표기한 예도 꽤 발견되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러지 말자는 거다.

전혀 공감되지 않더라도 상대의 주장은 끝까지 좀 들어보고, 그가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도 해보려고 노력하고, 최소한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노력. 이런 노력이 모여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내고, 서로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그 합의를 지켜나가는 그런 사회. 그게 바로 우리가 꿈꾸는 소박한 민주주의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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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물뚝심송
초대필자, 딴지일보 정치부장

월간 더딴지. 딴지 라디오 "그것은 알기싫다", "딴지 이너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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