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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은 자유롭게, 사실은 신성하게’(찰스 프레스트위치 스콧) 이 글은 필자의 체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쓴 칼럼입니다. 이 글이 주장하는 의견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이견을 환영합니다. (편집자)

‘TV 수신료’ 논의에 관해선 아래 의견을 함께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KBS를 망가뜨리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 (김경래, 2023. 7. 20)
TV 수신료, 부당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시청자의 무기 (박경신, 2014. 6. 24)
합법적으로 TV 수신료 안 내는 8가지 방법 (이정환, 2013.12.13)

며칠 전 텔레비전 방송 수신료 분리 고지를 신청했다.

분리 고지 신청은 간단하다


아파트 관리비와 통합 고지되고 있던 것이었다. 방송법 시행령이 바뀜에 따라 단독 주택은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분리 고지가 되지만, 아파트는 신청하지 않으면 계속 통합 고지가 된다고 한다.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관리사무소에 가서 말했더니 준비된 양식을 꺼내주었다. 거기에 이름·동호수·전화번호와 텔레비전 수상기 대수만 적고 서명하면 끝이었다. 느낌으로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수신료 안 내도 불이익은 없다


수신료가 분리 고지되면 어떻게 될까? 첫째 KBS 입장에서 보면 한전을 통해 수신료를 거두어들이는 데 따르는 업무와 비용이 늘어난다. 둘째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아파트 관리비 때문에 수신료를 억지로 내야 하는 부담이 사라진다. 내거나 말거나 모두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있다.

만약 수신료를 내지 않으면 처음에는 3%에 해당하는 가산금을 물리고 그래도 안 내면 강제로 징수할 수 있다고 한다. ‘강제’라 하니 처음에는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윤석열 방송통신위원회가 2023년 7월 5일 이런 걱정을 지워주었다.

법률상 가산금이 붙을 수 있으나 납부하지 않은 국민들에 대해 강제집행에 나설지는 전적으로 KBS가 자체 판단해 결정할 문제이고, KBS가 국세체납에 준해 수신료 미납부자에게 강제집행을 하려면 방송법에 따라 방통위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 방통위는 (강제집행을) 국민의 편익과 권리 신장 관점에서 판단할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 전체 회의, 2023. 7. 5.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때는 윤석열 정권이 꼭두각시 박민(KBS사장)을 KBS 사장으로 앉히기 전이었다.

KBS 사옥. KBS 홈페이지 갈무리.

수신료는 어지간하면 내야 한다…하지만!


수신료는 공영방송 KBS의 공적 책무 수행에 필요한 특별부담금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명박·박근혜 시절에도 꼬박꼬박 냈고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이 박민을 사장에 앉혔어도 내야 한다고 여겼다. 이어서 여러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정권에 미운털이 박힌 인물이 쫓겨났을 때조차 ‘그래도 납부 거부는 아니지’ 생각했다.

하지만 박민이 1월 26일 통합뉴스룸·시사제작국·시사교양1국·2국·라디오제작국의 국장 5명을 단체협약에 명시된 임명동의제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임명한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박민은 그러면서 임명동의제가 인사 규정 위반·인사권 침해라 했지만 틀린 말이다.

단체협약은 근로기준법과 맞먹는 효력을 갖기 때문에 회사 내부 지침인 인사 규정보다 상위에 있다. 아울러 인사권보다 중요한 것이 공정 보도이고 이를 보장하는 장치가 임명동의제라는 것은 대법원도 인정했다.

박민(제26대 KBS 사장). 취임식 모습. 2023년 11월 13일. KBS 제공.

임명동의제는 범국민적 투쟁의 성과다


임명동의제라는 것이 전두환·박정희 시절에는 있었을까? 당연히 없었다. 군사독재는 물리력으로 탄압하거나 보도 지침 등으로 통제하고 광고 등으로 구슬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언론사 내부 구성원들의 의견을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나 장치는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30년 가까운 폭압은 필연적으로 저항을 불렀다. 그래서 87년 6월 투쟁이 터져 나왔으며 6월 투쟁은 6·29선언을 낳았다.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자 언론노동자들은 공정 보도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언론민주화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임명동의제는 1988년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 덕분에 2024년 현재 한국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한겨레, KBS·SBS·MBC·YTN, 연합뉴스 등 언론 대다수가 임명동의제를 하고 있다. 내가 몸담았던 경남도민일보를 비롯해 많은 지역신문에서도 임명동의제가 대세다.

이 밖에 서울신문은 사장이 지명한 후보 2명 가운데 1명을 선출하는 지명선출제를 한다. 조선(불신임투표제)과 중앙(불신임건의제)조차, 한 번도 실행된 적은 없지만, 국민일보(중간평가제)와 더불어 임명 이후에라도 피드백하는 장치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이른바 10대 전국지 가운데 편집국장 임명과 관련해 아무 장치도 없는 곳은 세계·문화일보 둘뿐일 정도다.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


이렇듯 임명동의제는 40년 전 군사독재에 맞선 범국민적 투쟁의 성과로 많은 언론 현장에 뿌리내리고 있다. 정권·자본·족벌의 일방통행을 막고 공정 보도를 지키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다. 그렇지만 이번에 KBS에서 무너지면 다른 방송·신문에서도 잇달아 없어질 개연성이 높아진다.

고작 2,500원밖에 안 되지만 내가 내는 수신료가 공정 보도의 숨통을 끊는 용도로 쓰이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지난해까지 동종업계에 몸담았던 종사자로서 공정 보도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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