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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시 일본과 전후 일본은 연속적인가 단절적인가.’ 

이 무거운 질문을 두고 미일 학계에는 두 가지 전통이 존재한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2″]우선 전통주의[/dropcap]다. 전통주의는 ‘국화회’ 혹은 경멸적으로 ‘게이샤 학자’로 불리던 에드윈 라이샤워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일본학 1세대들이 만들어낸 학설을 일컫는다.

요약하면, 일본은 원래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인데 잠시 피에 굶주리고 광기에 휩싸인 군부가 천황의 뜻을 어겨서 침략 전쟁을 자행한 것이고, 이후 미국이 그것을 정상 상태로 교정해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본의 주류 학설도 ‘평화를 사랑했지만, 군부에 휘둘렸던 나약한 히로히토 천황과 민중들은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을 머리 속에서 지우고자 했기 때문에, 전통주의는 실질적으로 미일 양국에서 수십년 동안 정설로 군림해왔다.

에드윈 올드파더 라이샤워(Edwin Oldfather Reischauer, 1910년 10월 15일 ~ 1990년 9월 1일).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외교관. 선교사의 아들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고, 195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 소장, 1961년에서 1966년까지 주 일본 미국 대사를 지냈다.
에드윈 올드파더 라이샤워(Edwin Oldfather Reischauer, 1910년 10월 15일 ~ 1990년 9월 1일).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외교관. 선교사의 아들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고, 195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 소장, 1961년에서 1966년까지 주 일본 미국 대사를 지냈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2″]하지만 수정주의[/dropcap]의 도전이 거세졌다. 90년대 이후 존 다우어, 허버트 빅스와 같은 걸출한 사학자들이 전통주의를 비판했다.

미국이 실질적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면제해준 과정을 보여주어 전시 일본과 전후 일본의 연속성을 주장한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Embracing the Defeat, 1999; W.W. 노튼출판사, 번역 2009; 민음사)와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본격적으로 주장한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2000; 하퍼콜린스, 번역2010; 삼인)은 각각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미일 양국 학계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수정주의의 거두 존 다우어(John W. Dower, 1938년 출생, 위)와 허버트 빅스(Herbert P. Bix, 1938년 출생, 아래).
전통주의를 비판한 수정주의의 거두 존 다우어(John W. Dower, 1938년 출생, 위)와 허버트 빅스(Herbert P. Bix, 1938년 출생, 아래)와 두 학자가 각각 1999년, 2000년에 출판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패배를 껴안고]와 [히로히토 평전].
이후 수정주의 그룹은 비록 그들이 단일한 조류와 학파로 묶이기는 힘들다곤 하더라도 주로 일본과 미국의 보수파들의 주류 학설에 도전하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담론을 사실상 이끌어왔다. 그 결론은 대체로 ‘일본이 미쳐 있었다고 하는 시대는 이상 상태가 아니었고 군의 소수 광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시 일본은 전쟁 전과 전쟁 후와도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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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Planning for Empire:Reform Bureaucrats and the Japanese Wartime State, 2011; 코넬대학교출판부, 번역 2015; 소명)은 90년대 이후 미국 학계에서 제기된 전시 일본에 대한 수정주의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미무라는 2002년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역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미무라는 2002년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역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20년대: 총력전, 공황, 노동자

1920년대 일본은 다른 여타 근대 사회가 그러했듯이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해있었다.

그리고 대외적 도전과 대내적 도전은 모두 산업혁명, 그 중에서도 거대한 조직과 중화학 공업을 탄생시킨 제2차 산업혁명의 장기적 여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2차 산업혁명을 통해 조직능력과 동원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군사기술 역시 혁신적으로 발전하자 강대국 간의 전쟁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양상에 돌입했다. 즉, 총력전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단순히 소수의 군대만 잘 움직이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17세기 군사혁명 이래로 남들보다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거기에 투자해야 했던 것이 질적으로 엄청난 스케일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이런 형태의 전쟁이 일찍부터 예고되었고 제1차세계대전에서 이는 실현되고 만다.

인간의 기계문명이 최초로 자신에 대한 전 지구적 대량 살상을 가져온 첫 번째 체험, 제1차 세계대전.
인간의 기계문명이 최초로 자신에 대한 전 지구적 대량 살상을 가져온 첫 번째 체험, 제1차 세계대전.

총력전의 핵심은 결국 자원을 얼마만큼 동원해서 얼마만큼 조직해내느냐의 문제였다. 자원이 많아도 러시아처럼 조직 능력이 떨어지면 제대로 집중해내지 못하고 일거에 휩쓸릴 수도 있었다. 반면 독일은 러시아와 프랑스, 영국을 사실상 혼자서 4년 가까이 전율하게 만들어 — 적어도 육군에 한해서는 — 참전국 중 최강의 조직력과 군사력을 보여주었지만, 영국의 해상봉쇄가 독일의 식량 수입을 가로막았고, 이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투입된 미군이 고기를 먹는 동안 독일군은 계속 순무만 먹어야 했던 것이다. 이는 식량과 에너지라는 전략적 자원이 어떻게 총력전 상황에서 하나의 무기로써 쓰일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산업사회가 고도화되고 조직들이 커지면서 또 다른 종류의 도전이 제기되었다. 바로 경제의 주기적인 부침과 그에 따른 불황 혹은 공황의 도래, 그리고 노동자 세력의 성장이 그것이었다. 각각의 사회단체들이 성장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언론시민사회의 발전을 촉진해 정부의 행정을 감시하고 시민들의 영향력을 관철시키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20년대 이후 일본은 잡지와 대중지가 크게 유행한다. 사진은 20년대 후반 서점의 모습.
20년대 이후 일본은 잡지와 대중지가 크게 유행한다. 사진은 20년대 후반 서점의 모습.

물론 이러한 변화상들은 1870년대 이전부터도 꾸준히 있어왔으나, 총력전은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대전쟁은 이름에 걸맞게 대대적으로 국민을 동원하도록 사실상 강제했고, 전시 생산이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전쟁 이후 찾아온 공황은 이렇게 성장한 사회집단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으며 과거의 시스템은 이런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점점 명백해져 갔다.

떠오르는 테크노크라트

이런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여 새로이 떠오른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과학적 지식과 전문적 기술을 관료; 기술 관료) 집단이었다. 이들은 행정 혹은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조직가이자 관리자였는데, 이들 집단은 조직의 규모가 확대되고 그 네트워크의 복잡성이 엄청나게 증대되는 등 행정과 관리에 부과되는 도전에 맞춰 자연스레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사회공학의 관점에서 각 집단을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부품으로 보았고, 자신들이 갖춘 전문지식을 활용해 정치적 이해관계에 쉽게 움직이지 않는, 합리적 정책과 기획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산업 측면에서 이들은 생산과정을 표준화하고 수요 예측을 통한 최적화된 생산, 그로 인한 재고관리의 효율화를 추구했다. 한편 과학자들은 개인의 천재성에 의존하는 발명가의 시대에서 벗어나 국책 연구기관과 군산복합체의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 연구인력의 조직적 분업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일정 수준에 오른 산업사회들에서는 산업이 발전하고 조직이 확대되면서 이런 테크노크라트가 성장해왔고 특히 1차 세계대전은 전시 생산을 위한 국가적 기획의 경험을 제공하면서 각지에서 이들은 세력을 확대하게 된다. 1930년대에 이들 테크노크라트 집단과 이데올로기적 정치가들은 굳이 표현하자면 초근대적 기획을 국가적으로 실행했다.

소련에서 그것은 제1차 5개년계획과 스탈린주의였고, 미국에서는 테네시 개발공사뉴딜이었으며, 독일에서는 나치즘의 형태로 구현되었고, 테크노크라트적 근대성을 대대적으로 부과하고자 한 이들 기획가들은 구세력들과 다양한 갈등을 빚어왔다.

스탈린 뉴딜 루스벨트 히틀러 나치즘

세 그룹의 테크노크라트 

미무라는 [제국의 기획]에서는 일본이 이런 도전에 직면해 어떤 선택을 했으며 누가 그것을 주도했고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가를 살펴본다. 일본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새로운 테크노크라트 그룹은 세 그룹이었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5″]1.[/dropcap] 하나는 육군의 ‘통제파(統制派)’ 장교들로서 이들은 세계대전을 보면서 자신들의 전략관을 키워나갔다. 이들은 총력전 체제에서 필요한 것은 모든 자원이 총력전을 위해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으며 전시에 무역이 끊겼을 때도 식량과 에너지와 희귀금속 등 전략자원의 공급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경제권을 갖춘, ‘고도국방국가’라고 여겼다.

나카타 데쓰잔(永田鉄山)은 통제파의 초기 중심인물이다. 육군성 군무 국장과 보병 제1여단장 등을 지냈다. 나가타 이후 통제파의 중심 인물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나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등이 부상한다.
나카타 데쓰잔(永田鉄山)은 통제파의 초기 중심인물이다. 육군성 군무 국장과 보병 제1여단장 등을 지냈다. 나가타 이후 통제파의 중심 인물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나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등이 부상한다. 천황과 국민, 국가, 국토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는 황도파에 비해 통제파는 군에 대한 법률통제(문민통제)를 강조했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5″]2.[/dropcap] 민간에서는 새로운 재벌집단이 부상했다. 이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재벌인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과 대별됐다. 아유카와 요시스케의 닛산, 오코치 마사토시의 리켄 등 5개 대기업으로, 이들은 종래의 재벌들이 은행, 보험, 탄광, 조선 등 상호 무관한 분야의 수많은 자회사를 가문의 자존심 차원에서 무분별하게 확장한 것과 달리 과학기술에 기반한 전략적 확장을 추구했다.

제1차 대전 이후 '과학적 전략'으로 성장한 새로운 재벌그룹 닛산과 리켄
제1차 대전 이후 닛산과 리켄 등 5개 대기업은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전략적 확장을 추구했다.

요컨대 이들은 2차산업혁명의 자식으로 주로 유기적으로 자회사들이 움직이는, 많은 전기를 필요로 하는 신흥 중화학 공업을 주력으로 삼았다. 신생재벌들은 포드주의, 테일러주의, 그리고 미국 전력제국의 황제였던 새뮤얼 인설의 기업조직론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들의 사업을 관리하고자 했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5″]3.[/dropcap]끝으로 혁신관료가 있었다. 이들은 메이지 시대 법대를 졸업하여 법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관료 자리에 오른 전통적인 관료 그룹과는 달랐다. 역시 많은 이들이 동경제국대 법대를 나왔어도 혁신관료들은 기본적으로 실제 행정기술과 관리기술이 어떻게 경제, 산업, 행정 등 다양한 조직에 적용될 수 있는지 관심을 가진 기술관료였고, 또 본인이 실제 농업, 산업 등 현장에서 관리직으로 경력을 쌓은 실무가이기도 했다.

혁신관료 중 많은 수는 대학 때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소련의 계획경제론을 적극적으로 공부하였고 이 또한 야경국가를 지향했던 메이지 시대의 관료들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기도 했다. 좌우익에 걸쳐 다양한 사상과 지향점을 가진 혁신관료들은 하나의 전망만큼은 적극 동의했고, 결국 이것이 이들을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는데, 바로 장차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일본이라는 나라가 과학적 합리성에 의해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처럼 움직여야 하고, 그것은 자신들의 관리기술로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혁신관료 중 상당수는 맑시즘의 세례를 받은 이들도 많았다. 이렇게 좌우에 걸쳐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혁신관료를 묶어주는 연결고리는 '하나의 단일 유기체로서 일본'이었다.
혁신관료 중 상당수는 맑시즘의 세례를 받은 이들도 많았다. 이렇게 좌우에 걸쳐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혁신관료를 묶어주는 연결고리는 일본이 과학적 합리성에 의해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총력전과 관리사회에 대한 이 세 그룹의 구상과 이익은 때로 충돌할 때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잘 굴러갔다. 기술적으로 고도화된 총력전 군대를 지향한 육군 통제파 장교들은 중화학 공업의 발전을 요구했고 이는 특히 만주국에 진출한 신생재벌들의 성장을 필요로하는 것이었다.

한편 신생재벌들은 새로운 원료 산지와 시장을 필요로 했으며, 뿌리가 취약했기에 자금 측면에서 정부의 손에 달려 있는 일본은행의 자금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혁신관료들은 이들의 입장을 조정, 통합하여 기존의 구 세력에 맞서 싸우는 자원으로 활용하였고 거기에는 자신들 관료조직의 확대와 권한 증대, 그리고 본인들의 출세라는 현실적 동기 또한 내재해 있었다.

통제파 + 신흥재벌 + 혁신관료 = 만주국 

육군 통제파 장교, 신흥재벌, 혁신관료들은 독자적으로 성장하면서 1930년대에 서로 뭉칠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곳은 바로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자 개척지로 여겨진 만주국이었다.

육군 통제파는 만주국을 고도국방국가 건설을 위해 필수적인 곳으로 보았다. 만주에서 나오는 전략자원을 확보해야해고 식량을 생산해 일본이 독일과 같은 식량부족 사태를 겪는 일을 방지해야만 했다. 또 육군 통제파의 이상주의자들은 일본의 산업계가 이윤 논리에 매몰되어 있기에 고도국방건설과 국민적 발전을 위한 공익을 오히려 침해한다고 생각해, 소련식 계획경제로 넘어가야한다고 주장했다.

통제파 장교들의 이런 기획을 실현시키는 역할은 혁신관료들이 맡았는데, 혁신관료들에게 만주는 비록 생활환경이 거칠고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시킬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이들은 만주에서 사업을 확장하고 자신들 산업의 기술적 고도화를 원했던 신흥재벌과 협력하여 만주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자 했고, 그를 통해 본토의 관료집단에서도 자신들의 명성을 키워나가길 원했다.

그를 위해서는 육군 통제파의 이상주의를 어느정도 순화시켜 본토의 구세력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육군의 만철은 소외되고,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대대적 투자가 만주에 시작되자 닛산의 아유카와가 주축이 된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만업)와 일본 통제경제를 사실상 설계했다고 봐도 무방한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의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만주국의 철도 건설 현황과 곡물별 수확지를 보여주는 지도.
만주국의 철도 건설 현황과 곡물별 수확지와 삼림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테크노-파시즘의 성장과 몰락 

만주국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테크노크라트 집단은 일본으로 돌아와 중앙관청의 고위직을 맡게 되었고, 이들 중에는 파시즘 사상가라고 불릴 관료들인 오쿠무라 기와오모리 히데오토도 있었다. 이 둘의 구상은 유럽 파시즘의 영향을 강력히 받아, 국민생활권과 유기체적, 전체주의적 인간론, 그리고 민족에 기반한 경제와 그 총체로서 과학기술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일본의 지휘부는 이를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상으로 이어나가게 되었다. 또한 노동문제에 있어서도 이들은 포디즘적 발상을 적용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여주는 대신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타협안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국민경제의 맥락에서 계급적 차이는 없고, 다만 직능적 차이에 따라 자신에 맡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라는 파시즘적 경제관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렇게 이들은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 파시즘의 제3의길을 걷고자 하였던 것이다.

새로운 관료집단과 완성된 사상적 기반이 결합하자 이는 ‘신체제 운동’이라는 정치적 기획으로 이어졌다.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이 주도하여 테크노-파시즘적 기획을 가진 일군의 그룹과 메이지 세계관을 가진 구세력 간의 갈등이 이어졌다. 테크노-파시즘 기획가들은 ‘산업통제회’를 통한 개별 산업의 지도로 기업 간의 출혈경쟁을 막고 산업 내에서, 그리고 산업 간의 협력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자 한 당시 뉴딜주의 기획가들의 발상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1940년 7월 22일~1941년 10월 16일) 제34·38·3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특히 2차 내각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모토로 신체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의회민주주의를 폐지하였다. 10월 12일 일당국가를 모토로 하는 독재정당인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창당되어 고노에가 당수에 취임하였다.
고노에 후미마로( 1940년 7월 22일~1941년 10월 16일) 제34·38·3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특히 2차 내각(38대, 1940년 7월~1941년 7월) 시기에는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모토로 신체제 운동을 전개해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의회민주주의를 폐지했으며, ’40년 10월 12일 일당국가를 모토로 창당된  독재정당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당수에 취임하였다.

또한, 주식을 통한 시장원리에 민감한 자금조달 방안은 공익에 맞춰 전략적, 장기적 투자를 이끌어내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일본은행과 주거래은행을 통해 정부가 보증하는 자금조달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노동에서는 나치의 ‘기쁨을 통한 힘’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노동자들에게 여가와 복지를 충분히 제공하고 문화활동을 장려하는 대신 생산에 있어서 최대의 협력을 끌어내고자 하는 인센티브 전략이 도입되었다.

재계와 기존 정당정치인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테크노-파시즘 기획가들은 일본을 하나의 완결적 생활권과 국민경제를 갖춘 고도국방국가, 즉 대륙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사적재산권은 어느 정도 국가의 공익을 위해 침해될 수도 있었고 관료들의 기획에 맞춰 사회의 다양한 이익집단들은 사적 이익을 조금 접어두고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내야만 했다.

반면 메이지 세계관을 기본으로 한 구세력들은 일본을 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무역을 통해 성장하는 해양국가로 여겼다. 이들이 격렬히 저항하자 테크노-파시즘 기획가들은 일정 부분 양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을 위해 재벌의 협조를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재계는 통제회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고, 신체제 운동은 어느 정도 한 풀 꺾인채 일본은 자기파괴적 전쟁에 메달리게 된다.

태평양전쟁(1941년 12월 7일 ~ 1945년 9월 2일)
태평양전쟁(1941년 12월 7일 ~ 1945년 9월 2일)

물론 태평양 전쟁은 혁신관료에게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바로 총력전을 진짜로 일으켜서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시킬 도구로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내부에 자신들의 원하는 ‘혁신’을 강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했고, 염원해마지 않던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해선 꼭 필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혁신관료들은 총력전은 조직 능력과 동원 능력의 전쟁이라고 보았고(이건 맞았다), 단순히 자원의 유무보다는 과학기술을 활용해 자원의 제약도 극복하고 더 많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해낼 수 있는 이들이 유리하다고 보았다(이건 반만 맞았다. 자원의 절대량은 정말 중요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이 실수한 것은 야마토 정신(大和魂; 야마토 타마시; 정신력이 우월한 동양 문명이 서구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믿는)이 우월한 정신이기에 그 총체적 발현인 과학기술 또한 일본이 앞설 수 있다는 상상 초월의 망상이었다. 동원 능력과 조직 능력 양자의 측면에서 미국은 압도적 우위를 자랑했고,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혁신관료들의 구상은 그렇게 일본을 파국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가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가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전후 관리주의: 테크노 파시즘의 부활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쟁의 패배테크노-파시즘 기획가의 목표를 더 쉽게 실현시켜준 계기가 되어주었다. 기시 노부스케가 구 세력들과 줄다리기를 통해 교묘히 확대해놓은 제도들 속에서 새로운 전후 일본의 관리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구 재벌들과 군부의 고위 간부들에게 물렸고, 이들을 때로는 제거하거나 때로는 약화시켰다. 한편 냉전에서 일본의 역할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역코스 정책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기술관료들은 다시 정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테크노크라트들은 무대에 복귀하자 미국 덕분에 자신들의 구상에 계속 반대를 걸던 강력한 재벌들이 해체된 것을 볼 수 있었고, 계속 정책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걸 방해하던 귀찮은 군부도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구세력을 대표하던 정치인 요시다 시게루가 물러가자 1957년에 전범 교도소에서 출소한 기시 노부스케가 화려하게 총리로 복귀할 수 있었다.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어 총리로 화려하게 복귀한 '전범' 기시 노부스케(1961년 모습)와 그의 손자 아베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어 총리로 화려하게 복귀한 ‘전범’ 기시 노부스케(1961년 모습)와 그의 손자 아베

전시에 테크노크라트의 보루가 되어주었던 상공성, 내각기획원, 군수성, 통제회와 같은 기획 기구들은 전설적인 통상산업성, 경제안정본부, 경제기획청,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와 같은 형태로 이어졌다. 시이나 에쓰사부로와 같은 기시의 동료 테크노크라트들은 이와 같은 조직들로 다시 돌아와 막강한 권한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들의 전후 관리주의 정책은 후에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 [통상산업성과 일본의 기적] (MITI and the Japanese Miracle, 1982)이라는, 발전국가론의 효시를 알린 논문에서 상세히 분석되었고, 대단히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나게 된다.

찰머스 존슨(1931~2010)과 그의 책 [통산성과 일본의 기적] (1982)
찰머스 존슨(1931~2010)과 그의 책 [통산성과 일본의 기적] (1982)
기시 노부스케가 추구했던 여러 구상은 이후 일본 정치에도 상당히 많이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만주국 시절부터 뒤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한 뒤 정당정치를 무력화시키고, 의회를 관료들의 결정을 사후추인하는 곳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 다양한 이해관계의 조정에는 정계, 재계, 관료의 사적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자민당관료경단련이 만들어낸 일본판 ‘철의 삼각형’의 시작이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전시에 쌓은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55년 체제’(’55년 이후 형성된 자유민주당과 사회당의 양대 정당 체제)[footnote]55년 체제는 93년 자민당 내각이 붕괴하고, 이후 사회당이 쇠퇴하면서 끝났다고 평가받는다. – 위키백과 ’55년 체제’ 참조[/footnote]를 실질적으로 완성시켰다. 퇴직 관료는 자유민주당으로 가 주류 파벌을 형성했고, 관료는 자신들에 협조하는 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기업들은 자민당에 돈을 주었다. 또한, 자민당은 기존에 테크노-파시즘 기획가들이 갖지 못한 정치적 정당성과 대중과의 연결고리도 제공해주었다.

1958년에는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 총재로 총리에 올랐고, 2012년 이후에는 그 손자인 아베 신조가 공명당과 연립정권을 형성해 현재까지 총리를 역임하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1958 집권)에서 아베 신조(’12년 이후 현재까지 총리)까지. 자민당은 1993년(~94년)과 2009년(~12년)의 실각을 제외하고는 전후 일본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일찍이 테크노-파시즘 기획가들은 나치당과 같은 일국일당 체제를 통해 대중을 동원하고 구체제에 도전하고자 한 아이디어들도 실험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천황의 존재와 같은 일본적 맥락 때문에, 그리고 그들 집단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부재했기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자 관료들은 거리낄 것 없이 자신의 정책들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야쿠자와 같은 어둠의 세계와의 은밀한 커넥션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전전 쇼와시대의 정치적 갈등은 자유주의자와 비이성적 전체주의자라는 수평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는 급속한 산업화와 총력전이 초래한 대내외적 도전에 대처하기 위한 일본의 신흥 엘리트그룹이 자신들만의 관리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 즉 일본을 ‘혁신’해내기 위해서 구세력에 도전한 갈등이었고, 그 갈등축은 수직축이었다. 전후 쇼와 시대는 이들 기술관료들의 기획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무대였고, 미국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막대하게 협조한 셈이다.

동아시아, 결국 테크노-파시즘이 승리하다  

[제국의 기획]은 동아시아인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려주는 책이다. 모두가 부정하고 싶어하는, 추악하고 잔인했던 일본 제국의 유산전후에도 면면히 살아남았고, 심지어 동아시아 국가들의 발전 양상을 규정지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은 일부 광기에 가득찬 군부 인사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일본 사회에서 진행되는 다차원적 변화의 최전선에 노출되어 있는 최고 엘리트들의 ‘합리적 사고’의 일환이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전후에도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로서 전시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었다.

책에서 한국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만주국과 전시, 전후 일본의 유산이 다양한 경로로 한국으로 들어와 이후의 발전경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고려한다면, 한국도 ‘제국의 경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에 있도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인은 스스로 자신을 해방자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야만적이고 전제적인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전파한 문명화의 기수였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본질에서 민주주의보다 반공주의에 훨씬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전쟁 책임자들이 국가요직으로 복귀해 반공전선 수립에 기여했다.

심지어, 그들이 해방시켜준 일본인들은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을 보고 영감을 얻은 경제 모델을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다시 들고 나왔다. 그 모델은 미국 비호 하의 동아시아 전역에서 통용되었고, 이후 거대한 중화인민공화국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런 면에서, 동아시아에서 승리한 것은 미국 자본가의 이상라기보다는 전시 일본 혁신관료, 테크노-파시스트의 이상이었다.

파시즘을 일본에 이식하려는 테크노크라트의 시도는 현실적으로 실패했지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혁신관료'는 일본의 패망 후에도 살아남아 결국은 승리했다.
파시즘을 일본에 이식하려는 테크노-파시즘의 역사적 기획은 실패했지만, 패망 후에도 미군정에 의해 테크노-파시즘의 ‘혁신관료’는 살아 남아 결국 동아시아에서 승리했다.

두 개의 교훈

이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가 현대 한국인, 나아가 동아시아인에게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떤 역사를 단순히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별할 수 없고, 그 역사는 우리에게 해석하기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남겨준다는 사실이 첫 번째일 것이다. 일본 제국은 극도로 잔인했고, 때로 섬뜩한 광기와 우둔함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제국 체제의 전부는 아니었다. 일본 제국은 다른 제국들과의 경쟁을 위해 몸부림쳤으며, 경쟁 제국들로부터 다양한 방법론을 배워와 자신들의 방식으로 적용했다.

그것은 서구를 추월해야한다는 생각에 가장 강박적으로 메달린 동아시아인들이 나름대로 근대를 수용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 결과, 미국과 소련 모두에서 관찰할 수 없는 독특한 발전과 근대화를 위한 동원 체제가 탄생했고, 어찌되었건 현대 동아시아인들의 물질적 풍요에 상당한 기여를 하며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놓았다.

일본 고용률 피처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거대한 기술적 변화와 지정학적 지각 변동이 동시에 찾아올 때 벌어지는 일들이다. 19세기에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 중심의 자유주의 질서는 완전히 내파되어 가고 있었다. 덤으로 그들은 2차산업혁명이 만든 거대 기획의 시대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술을 맞이하여 새로운 사회조직을 창안한 국가는 미국, 소련, 독일, 일본이었고, 결국 제2차세계대전과 이후 냉전의 주역도 이 4개국의 몫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 각국은 자신만의 방법론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타국의 방법론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돌파구로 삼아보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적인 혁신 추구가 기존의 국가 간 역학 관계를 뒤흔들고 갈등의 소지를 높였다. 미국과 독일에서 탄생한 2차 산업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을 낳았고, 전간기 소련, 독일, 일본의 발전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이어졌다. 각국은 자신들이 진행한 혁신의 결과를 타국과의 경쟁을 통해 시험해보고자 했고, 폭력,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인공지능과 1930년대의 메아리

그런 의미에서 2020년대는 1930년대의 메아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인공지능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주도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미 기술 경주에서 탈락한 러시아의 대통령이 말하기에는 민망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의 함의만큼은 맞을 것이다.

2차산업혁명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관료 체계로 움직이는 거대 제조업, 거대 정당, 거대 노동조합의 시대는 인터넷과 세계화로 인해 위기에 처했다.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이 2차산업혁명 당시 전기와 화학이 했던 것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시대, 1930년대의 메아리는 2020년이
인공지능의 시대, 2020년대는 1930년대의 메아리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힘겨운 재구조화 과정에서 과거처럼 다시 경쟁이 출현할 것이고, 국가 간 역학 관계가 변하여 전쟁 내지는 그에 준하는 갈등이 벌어질 수도 있을까? 당분간은 지켜봐야만 할 일일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 확실한 것은, 중국이 인공지능과 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실험하고 있으며, 장차 실험을 성공시켜 지정학적 질서를 크게 변화시키길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80년 전의 일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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