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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미국 대선에 관해서 내가 제일 처음 썼던 글이 ‘미국 대선의 조연: 후마 아베딘’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바디 우먼(“body woman”). 이런 역할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비서로, 주로 20대의 심부름꾼이다. 너무나 개인적인 일을 하기 때문에 배우자보다 가깝고, 모든 비밀을 다 간직한, 눈치 빠르고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다. 드라마 [웨스트 윙]의 찰리(Dule Hill), 오바마의 레지 러브(Reggie Love)가 그런 인물들로, 가까운 거리 때문에 스캔들을 고려해 아무래도 동성이 안전하다.

19살 때부터 힐러리 클린턴을 보좌하기 시작해서 20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후마 아베딘(Huma Mahmood Abedin)은 사우디아라비아계 미국인. 화제를 몰고 다니던 뉴욕주 국회의원인 앤서니 위너[footnote]바짝 마른 유대계 미국인으로, 말로는 절대 지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유시민을 연상시킨다[/footnote]와 결혼했다. 하지만 위너가 지지자들과 트위터로 주고받은 황당한 사진들이 발각되고, 거짓말을 하면서 의원직에서 물러나면서 아베딘 역시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힐러리의 변함없는 지지로 다시 캠페인 트레일에 함께 올랐다. 남편 문제로 괴로웠던 힐러리에게는 둘도 없는 동반자, 친구, 비서. 그래서 언론에서도 관심이 많다. (2015년 7월 2일)

구글 이미지 검색 화면 - "Huma Mahmood Abedin"
구글 이미지 검색 화면 – “Huma Mahmood Abedin”

후마 아베딘, 언론의 시야에서 사라진 이유  

경선 주자들이 속속 등장할 때쯤 쓴 글이었다. 당시만 해도 힐러리 클린턴은 쉽게 민주당 후보직을 따낼 것으로 생각했고, 젭 부시는 약간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충분히 공화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으며, 샌더스는 흥행용 들러리였고, 트럼프는… 트럼프는 왜 선거에 나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화당이 힘을 다해 방어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백악관에 입성할 사람은 힐러리라는 예측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마지막 예측은 다음 주를 기다려 봐야겠지만, 당시에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의 일부만이 현실화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다들 알다시피 그 과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데 첫 주제를 후마 아베딘으로 잡은 내가 머쓱할 만큼 아베딘은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다. 왜 하필 아베딘 이야기로 시작했느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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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는 전례 없이 막강한 화력을 지닌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무혈입성을 막으려는 공화당의 캠페인이 핵심인 지루한 선거가 될 것이다. 따라서 힐러리와 빌 클린턴의 개인적인 문제가 자주 거론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힐러리의 바디 우먼인 후마 아베딘과 그녀의 남편도 원치 않게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일이 잦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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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거의 화력은 조직이 아니라 미디어와 소통 능력에서 결정 났고, 진짜 주인공은 트럼프였다. 트럼프는 언론의 모든 관심을 독점했다. ‘방에 있는 모든 산소를 빨아들이는'(“Sucking all the oxygen out of the room”)이라는 표현처럼, 지난 경선 내내 트럼프는 공화당 내의 산소를 모두 빨아들이면서 타 후보들을 질식사시켰다. 당연히 후마 아베딘이나 그녀의 남편 앤서니 위너에게 쏠릴 관심은 남아있지 않았다. (덕분에 그 둘은 비교적 조용하게 이혼을 준비 중이다).

Gage Skidmore, Donald Trump, CC BY SA https://flic.kr/p/9hHrit
경선 과정 내내 이슈를 독식한 트럼프 (출처: Gage Skidmore, “Donald Trump”, CC BY SA)

아베딘의 노트북에서 발견된 힐러리의 이메일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후마 아베딘의 이름은 다시 머리기사에 등장하고 있다. 이유는 이메일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불법으로 운영하던 개인용 이메일 서버에 대한 FBI의 수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이메일들이 아베딘의 남편인 앤서니 위너의 노트북 컴퓨터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메일 편지

당시 아베딘은 위너와 노트북 컴퓨터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둘의 문서가 함께 들어있었고, FBI는 위너가 미성년자와 음란문자를 나눴다는 혐의를 수사하기 위해 압수한 노트북 컴퓨터를 뒤지던 중, 거기에서 우연히 클린턴의 이메일을 발견한 것이다.

첫 여성 미국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국가의 중요한 문서[footnote]클린턴이 국무장관이던 시절의 모든 이메일은 잠정적으로 국가 기밀이다[/footnote]를 함부로 취급해 엉뚱한 사람의 컴퓨터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지금 한국을 뒤흔드는 최순실 사태와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자라 등과 솥뚜껑처럼 서로 비슷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대선 11일 앞둔 시점, FBI의 ‘성급한’ 발표 

힐러리 클린턴의 개인비서인 아베딘은 최순실이 아니다. 조사의 핵심은 힐러리의 새로운 이메일이며, FBI가 아베딘에게 혐의를 둘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선거를 11일 앞두고 느닷없이 수사 중에 우연히 발견한 이메일들을 두고 “새로운 이메일이 나왔다”며 발표를 해버린 FBI 국장 제임스 코미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민감한 이슈를 큰 선거를 코앞에 두고 터뜨리는 것은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수사당국의 정치개입일 수 있다는 비판이다.

FBI

게다가 ‘새로 발견된’ 이메일이 무슨 내용인지는 물론, 이전에 FBI가 조사를 마친 이메일과 다른 것인지도 아직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도 트럼프 진영에서는 당연히 발표해야 할 내용이라며 환영했다.

OSC office-of-special-counsel당장 연방조사기관인 OSC(The Office of Special Counsel, 로고)는 정부기관이 선거에 영향을 주는 행동을 금지한 해치법(Hatch Act)을 어긴 혐의로 코미 국장을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쯤 되면, 그런 결정을 내린 FBI 국장 제임스 코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진다. 게다가 과거에 공화당 지지자였던 전력이 있다면 더더욱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의심되는 게 사실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트럼프 대통령 밑에서 한자리 하기 위해 줄 서는 행동 아니냐’는 말이 나올 법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야당은 검찰이 여당의 시녀라고 욕하고, 여당은 검찰을 시녀처럼 다룬다. 그런데 정말 제임스 코미는 트럼프 정권에서 한 자리를 원했을까?

진퇴양난에 빠진 FBI

여기서부터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 나온다.

코미 국장의 행동을 비판하는 미국 언론들도 그의 행동이 무모했다고 비판하는 데 그칠 뿐, 코미가 공화당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FBI가 그렇게 행동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선 FBI는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이미 조사했고, 그 결과 기소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 내린 바 있다. 공화당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중립적으로 판단했을 때 힐러리의 이메일 서버 운영은 기소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소위 고위 공직자나 유력 정치인에 관한 사건일수록 정치적인 편향성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권력의 정점에 가까울수록 법적인 판단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는 이분법으로는 결정 내리기 힘든 영역이다. 따라서 클린턴의 무혐의 결정도 FBI로서는 어느 정도 정치적인 부담을 안고 내린 것이다.

제임스 코미 FBI 국장. FBI는 앞서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린바 있다.
제임스 코미 FBI 국장. FBI는 앞서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하필 앤서니 위너의 ‘섹스팅’ 스캔들을 조사하다가 후마 아베딘이 저장한 클린턴의 이메일이 나온 것이다. 그 사실을 발견했을 때 FBI 국장의 표정은 상상하고도 남는다.[footnote]’이런 제기랄!’ 하면서 책상을 발로 차지 않았을까?[/footnote]

FBI는 진퇴양난에 빠진 거다.

새로운 이메일이 나왔다고 발표를 하면 당연히 해치법에 저촉이 된다. 그 정도를 모르고 미국의 FBI 국장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가만히 덮어두고 선거를 치렀는데, 그 이메일들에서 클린턴의 중대한 위법이 발견되면? 그때는 청문회에 끌려 나와야 할 만큼 문제가 커진다.

불붙은 빌딩 창문에 매달린 꼴이다. 타 죽느냐, 떨어져 죽느냐의 선택만 남은 것이고, 잠재적인 폭탄이 될 수 있는 클린턴의 이메일을 끌어안고 있다가 청문회에 끌려나가서 자신의 정치적인 의도를 의심받느니, 차라리 해치법을 어기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코미의 흥미로운 선택 – 차라리 해치법을 어기자  

코미의 선택은 생각할수록 흥미롭다. 클린턴의 승리 가능성이 90%가 넘은 시점에서 해치법을 어기고 클린턴 당선에 방해가 될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코미가 풀어야 하는 방정식에는 두 가지 변수가 있었다:

  • 누가 당선되느냐: 트럼프(T), 힐러리냐(H)
  • 새로 발견된 이메일이 폭탄급이냐: 그렇다(Yes), 아니다(No)

1. 트럼프 당선 + 이메일 폭탄급 (TY)

비록 확률은 가장 낮지만, 트럼프가 당선되고, 발견된 이메일이 폭탄급이라면, 당연히 발표하지 않는 건 가장 위험하다.

2. 트럼프 당선 + 이메일 별것 아님 (TN) 

이 경우라면 발표하는 것이 아무래도 안전하다.

Ted Eytan, Presidential Campaign New Hampshire USA 2016.02.09, CC BY SA https://flic.kr/p/DRwsQz
Ted Eytan, “Presidential Campaign New Hampshire USA 2016.02.09”, CC BY SA

3. 힐러리 당선 + 이메일 폭탄급 (HY) 

이때엔 자신은 클린턴 정권의 발목을 잡으려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청문회에 끌려 나와 시달리며 정치적인 의도를 의심받아야 한다.

4. 힐러리 당선 + 이메일 별것 아님 (HN)

결국, 본인과 FBI가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지 않는 경우의 수는 힐러리가 당선되고, 이메일은 별것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다. 그 경우의 수만을 바라고 가만히 있기에는 사안이 너무 크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피해가 작을 것으로 판단한 해치법을 어기는 쪽을 택했다고 본다. 다치되 적게 다치는 쪽으로 결정한 것. 그가 순전히 정치적인 계산으로 행동했을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FBI 중립성 확보 위한 고민의 소산  

하지만 코미는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FBI 국장이고, 다음 대통령도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안에서 그 후보에게 해가 되는 발표를 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치적 중립성을 분명하게 강조하려고 했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이미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 조사 결과, 기소하지 않음으로써 힐러리에게 유리한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므로 더더욱 자신의 중립성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떨구고 가고 싶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

Rich Girard, CC BY SA https://flic.kr/p/JJwghB
‘해치법’ 위반을 불사한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의 선택 (출처: Rich Girard, CC BY SA)

힐러리 기소 포기로 공화당원들과 트럼프로부터 FBI가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는 비난을 받은 코미는 또다시 힐러리에게 유리한 결정으로 비칠 행동을 함으로써 FBI의 정치적 중립성이 의심을 받느니 이번에는 힐러리에게 불이익으로 보이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FBI의 정치적 위치를 중화(neutralize)하겠다는 의도다.

고위 공직자나 유력 정치인에 관한 사건을 다루는 수사기관의 고민이다. 물론 그런 고민이라도 하는 나라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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