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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에 있는 현금 100원이 10번 돌면 경제 규모는 1,000원이 된다. 이게 복지 국가가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기초 중 하나다.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다.

내가 사는 핀란드에서는 세금을 걷어 이를 기초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조금 형태로 지급한다. 예를 들면 보험 등의 안전장치 없이 예상치 못한 실업을 맞은 사람에게는 매달 약 650유로 정도의 생활비가 거의 2년간 지급된다. 대학생들은 매달 정부에서 주는 용돈을 받는다. 이들은 통장에 현금을 쌓아둘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 돈을 지출하고, 이렇게 시장에 현금이 돈다.

금수저 흙수저 구별 없는 교육과 의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계 어디보다 앞선 공공재, 즉 공원, 어린이집, 학교, 도서관, 병원 등을 누구에게나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는 공공지출을 늘려 경제 규모에도 기여하지만, 무엇보다 누구나 부모의 수입과 무관하게 좋은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핀란드의 대학은 모두 무료이고, 대학 도서관은 모두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개된다. 대학 도서관을 제외하고도 핀란드 전역에 총 842개의 공공도서관이 있고, 핀란드 인구의 약 70%가 공공도서관에서 2km 이내에 산다. 음악이나 영화에 특화한 도서관도 있고,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CD나 DVD를 대여할 수도 있다.

핀란드 교육문화부에서 발간한 '공공도서관' 관련 책자 표지 http://www.minedu.fi/export/sites/default/OPM/Julkaisut/2011/liitteet/OKM35.pdf
핀란드 교육문화부에서 발간한 ‘공공도서관’ 관련 책자 표지 (이미지: Ninni Korkalo, “Steel hard”, 2010)

공공 의료 역시 무료로 제공된다. 나에게는 만 두 살이 넘은 아이가 하나 있는데, 이제까지 들어간 의료비는 출산 직후 2박 3일간 사용한 병원 가족실에 지급한 약 200유로가 전부다. 임신 기간 동안의 정기 검진과 초음파 검사에도, 분만에도 별도의 비용은 없었다.

작년(2015년) 예술의 날 동네 도서관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기타와 요가의 협연 (사진: 이승호)
작년(2015년) 예술의 날 동네 도서관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기타와 요가의 협연 (사진: 이승호)
출산일이 다가올때 즈음 핀란드 복지국에서 보내주는 모성상자 - 출산 직후 필요한 모든 물건이 들어 있다 (사진: 이승호, 더 자세한 정보: designdb.com)
출산일이 다가올 때 즈음 핀란드 복지국에서 보내준 ‘모성 상자’ – 출산 직후 필요한 모든 물건이 담겨 있다.  (사진: 이승호, 더 자세한 정보: designdb.com)

연봉이 오르면 세금은 더 가파르게 오른다 

물론 이런 공공서비스가 가능하게 하려면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한다. 현재 대학에서 공부하며 일하고 있는 내 경우를 보면, 재작년(2014년) 연봉이 10% 올랐지만, 실제로 세후 집에 가지고 오는 돈이 늘었는지 느낄 수 없었다. 연봉이 오르면 세금은 더 가파르게 오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소비세는 24%. 쉽게 말해 1,240유로짜리 컴퓨터를 샀다면 240유로가 세금이다.

핀란드는 그해 수익에 따라 교통 벌금을 물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딱지를 끊고 교통경찰에게 벌금이 얼마냐고 물으면 연봉이 얼마인지 묻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유명한 육류 가공회사 상속자인 유씨 살로노야(Jussi Salonoja)는 단 한 번 과속으로 우리 돈 2억 6,000만 원을 벌금으로 냈다.

원래 잘사는 나라 핀란드? 아니다 

어느새 핀란드에 산 지 10년이 가까워져 온다. 이런 북유럽 복지 정책과 그 장점에 대해 지인들에게 설명하면 주로 되돌아오는 질문은 대개 이렇다.

“거긴 원래 잘살지 않았어?”

그렇지 않다. 잘살았으니 복지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복지하기 때문에 잘사는 거다. 아니다, 실은 잘사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와 핀란드의 평균 구매력을 비교하면 핀란드가 조금 앞서는 정도다.

다만 경제가 더 안정적이고, 공공에 의해 꾸준히 유지되는 자본 회전으로 경제 침체 후 회복도 빠르다. 무엇보다 중산층이 두텁고, 다른 나라들보다 든든한 안전망에 힘입은 경제 취약층이 중산층 진입을 꿈꾸기가 쉽다. 그리고 이들 중산층은 든든한 세금원이 된다.

핀란드와 다른 유럽 나라들을 여행한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핀란드의 소박함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좋게 말해 소박한 거지, 볼 게 없다고들 한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근사한 오래된 건물도, 금속과 유리로 지은 화려한 마천루도 찾기 어렵다.

소박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핀란드는 북유럽에서 현금 보유고가 가장 낮은 나라다. 다른 말로 부채율이 높다. 그리고 핀란드는 역사적으로도 단 한 번도 부국이었던 적이 없다.

빵 배급하던 시절에도 박사까지 무상교육

스웨덴은 러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북유럽을 호령하던 강국이다. 여전히 왕국이고,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귀족도 존재한다.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북유럽과 서유럽 사이에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노르웨이는 석유가 나기 시작하면서 북유럽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이름난 부국이 됐다.

하지만 핀란드는 늘 북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막말로 나무 말고는 가진 게 없었다. 1866년부터 3년간의 기근으로 인구의 15%를 잃었을 정도다. 90년대에도 구소련이 붕괴하고 입은 경제적 타격이 너무 커 국민에게 빵을 나누어 줄 정도였다.

나무 말고는 가진 게 없었던 나라, 핀란드.
나무 말고는 가진 게 없었던 나라, 핀란드.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교육은 박사과정까지 모두 무상으로 제공했고, 산-학-연의 긴밀한 협력으로 노키아(Nokia)를 키워냈다. 노키아의 휴대폰 사업부문이 마이크로 소프트에 넘어간 지금도 휴대폰 관련 기술과 특허를 사업화하는 부문은 매각하지 않았고, 이 사업부문은 꾸준히 흑자를 내고 있다.

강소국 핀란드의 강한 기업들 

노키아가 망하면 핀란드가 무너지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핀란드에는 강한 기업이 많다. 영역별로 분류해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소비재

  • 세계적인 텍스타일·패션 브랜드 마리메꼬(Marimekko)
  • 세계 1위의 정원제품 기업 피스카스(Fiskars)
  • 피스카스 그룹 산하의 세계적인 도자기 회사 아라비아(Arabia)와 이딸라(iittala)

전문가 제품

  • 개인용 다이빙 네비게이션·컴퓨터를 선도하는 순또(Suunto)
  • 음향 스튜디오 사운드 모니터를 생산하는 제넬렉(Genelec)

산업재

  •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엘리베이터를 판매한다는 꼬네(Kone)
  • 대형선박/에너지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 바르칠라(Wartsila)

IT 

그리고 앵그리버드(Angry Bird)를 만든 로비오(Rovio)도, 소프트뱅크에 1조 6천억 원, 곧이어 텐센트에 9조 원 넘는 총액에 인수되어 화제를 불렀던 클래시 오브 클랜(Clash of Clans)의 슈퍼셀(Super Cell)도 핀란드 회사다. 거슬러 올라가면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역사상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리눅스(Linux)도 핀란드인이 헬싱키 대학교 재학 중에 만들었다.

앵글리 버드와 클래쉬 오브 클랜, 그리고 위대한 리눅스를 탄생시킨 나라 핀란드.
앵그리버드와 클래시 오브 클랜, 그리고 위대한 리눅스를 탄생시킨 나라 핀란드.

이 모든 크고 작은 기업들과 혁신들은 모두에게 공정한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노력하는 핀란드의 가치 위에 쓰였다. 실제로 슈퍼셀 등 성공한 스타트업들이 핀란드의 강점으로 ‘값싸고 실력 있는 인력’을 가장 많이 꼽는다. 인건비가 비싼 핀란드지만, 엄청난 빈부 격차로 인해 고급 인력의 인건비가 기형적으로 올라간 미국의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에 비하면 정말 준수한 인재를 합리적인 비용에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노키아의 모바일 사업부가 없어진 핀란드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본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수준 높은 교육과 의료를 바탕으로 아직 세계가 보지 못한 혁신들을 소개할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난 복지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복지는 좋은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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