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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15. ‘헬조선’에서 꿈꾼다는 것

두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나면 주섬주섬 뒷정리한다. 칠판을 지우고, 컴퓨터를 끄고, 출석부와 펜을 가방에 집어넣고, 마지막 시간이라면 에어컨이나 형광등도 끈다. 그러다 보면 종종 돌아가지 않고, ‘저 할 말 있어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이 몇 있다. 그들은 대개 글쓰기 첨삭이나 진로 상담을 부탁해온다. 그렇게 일주일에 적으면 1건, 많으면 5건에 가까운 면담을 진행한다.

면담은 필수 옵션

나는 학기 초마다 면담을 희망하는 학생은 언제든 찾아오라고 공지하고 있다. 나뿐 아니라 시간강사 대부분이 그렇게 한다. 면담이 강제된 것은 아니고 그런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커피 한 잔 사줄 만한 급여가 더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개인 연구실이 없기에 빈 강의실을 찾아 학생과 함께 강의동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일도 다반사다.

하지만 강의를 시작한 이상 면담은 ‘필수 옵션’이 된다. 학생들이 학기 말에 이르러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강의평가에는 다음 항목이 있다.

“면담 시간과 공간이 공지되었고, 원할 때 면담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여기에서 일정 점수 이하를 받으면 해당 학교에서 강사 자격이 박탈된다. 물론 그러한 압박이 아니더라도 학생들과의 면담을 거절할 교수자는 없겠으나, 이 역시 시간강사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자소서’ 첨삭지도 

담당하고 있는 강의의 학생들뿐 아니라, 지난 학기의 학생들이 연락해 오는 일도 많다. 주로 취업과 진학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들고 찾아온다. 취업 시즌에는 자기소개서 첨삭만 몇 건씩 한다. 가끔은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자기소개서를 들고 주말에 집 앞까지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면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사주며 첨삭에 반나절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그런 요청이 번거롭거나 무례하다기보다는 그저 감사하다. 종강하는 날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 번호를 공개해왔다.

“인생에서 글쓰기가 간절히 필요한 어느 날이 생기면 제가 돕겠습니다.”

한 학기 강의로 만난 인연일 뿐이지만,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들이 조금 더 나은 자기소개서를 완성해 자신의 꿈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면담 고민상담

전공 선택 앞둔 L과의 면담 

어느 가을에는 전공 선택을 앞둔 학생 L과 면담을 했다. 그는 문과대 학생이었는데 늘 생긋생긋 웃으며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다. 의미 있는 질문도 자주 했고, 어려운 주제를 선택해 좋은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나의 후배가 되면 좋겠다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만나 뜻밖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요컨대, 인문학을 전공하기가 두렵다는 것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실업자가 되기에 알맞은 선택이니 아예 다른 학부로 전과하기를 권유했다는데, 자기 생각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가 나의 의견을 물었다.

“그나마 교직 과정이 있는 학과로 진학하면 좀 낫지 않을까요?”

그가 원하는 전공에는 교직 과정이 개설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네가 관심이 있는 학문을 선택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 될까 싶어 그만뒀다. L은 문학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 문학을 전공하면 어떻겠냐고 말하려다가 그것 역시 무책임한 말이 될 것이 분명해 역시 그만두었다.

“교수님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L과의 면담은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당연하지만, 어떤 결론이 나올 수 없었다. 인문학, 실업자, 전과, 교직과정, 이러한 단어들이 의미 없이 계속 흩뿌려졌다.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교원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에 온 건 아니잖니?” 고작 이런 말을 열없이 하곤 했다. 그러던 중 L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교수님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후회하지 않으시나요?”

스무 살 학생의 질문이지만, 나는 여기에 어떠한 가식이나 자기검열 없이 성실하게 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질문에는 그만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마음 깊은 어딘가를 쿡, 하고 찌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후회라면 어제도 했고, 그제도 했다. 면담을 진행하는 중에도 했는지 모른다.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후회한단다.”

사과 절망 좌절 슬픔 미안

버틸 수 있는 선택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L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는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돌이켜 스무 살의 나에게 어느 길을 걷겠니, 하고 다시 묻는다면, 역시 죽을 만큼 고민할 거야. 지금 행복하냐고 물으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어… 그런데 적어도 나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는 않았단다. 그래서…”

나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남은 한마디를 하려 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 않으면…”

말을 이으려는데, L이 말했다.

“그러면 버틸 수 있다는 거군요.”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가 답을 내주었다. 나는 어제 후회했고, 오늘 후회하고, 내일도 후회할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건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했기 때문, 인가 보다. L은 그 말을 끝으로 “고맙습니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하고 함께 일어섰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가 너의 결정을 존중할 거야. 스스로 많이 고민하고 선택하렴.”

‘행복’보다는 ‘후회’에 어울리는 학문 

인문학은 ‘행복’보다는 ‘후회’와 어울리는 학문일 것이다. 내가 전공을 선택하던 스무 살 무렵에도 인문학은 배고픈 학문이었고, ‘인문학 위기론’이 있었다. 그때도 경영대학으로 전과하는 문과대학 동기들이 많았고, 그나마 취업이 잘 되는 전공으로 모두가 몰렸다.

그들이라고 해서 문학을, 역사를, 철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L도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인문학과 결별하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너희의 ‘꿈’이 있잖니, 하고 싶은 것을 하렴, 하고 말하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나 가혹하다.

이번 학기에는 학생들에게 ‘유언장 쓰기’라는 A4 용지 한 쪽 분량의 글쓰기 과제를 내주었다. 황당하다는 무언의 반응들이 있었지만, 나는 이것이 자기 성찰을 위한 좋은 글쓰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내가 대학 시절 가장 즐겁게 했던 글쓰기 과제이기도 한데, 그때 쓴 글은 삶의 작은 지침이 되어 주었다. 실제로 과제를 제출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거나 가족이나 연인 등 주변을 소중히 하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데 글을 첨삭하다가, 어떤 문장과 맞닥뜨렸다.

“인간이 환생할 수 있다면 다음 생에는 공부가 아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할 수 있는 인생을 한 번 살아 보고 싶다.”

나는 잠시 ‘좋아하는 게 있으면 젊으니까 한번 해보면 되잖아’ 하고 생각하다가, 몹시 부끄러워졌다.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뭐가 다른가 싶었다.

고민 청년

유언장에서조차 접어둔 꿈 

그러고 보면 꿈꾸기조차 쉽게 용납되지 않는 시대다. 나는 힐링을 내세운 많은 ‘꿈 전도사’들이 사실은 젊은 세대에게 끊임없이 실체 없는 ‘노오력’을 강조해왔음을 잘 안다. 그 과정에서 기성세대는 스스로 ‘노오력한 자’로 규정짓는 동시에 청년들을 ‘노오력하지 않는 자’로 격하시켰다. 이것은 오로지 기성세대를 위한 힐링이며 청년을 향한 채찍질이었다.

청년들에게 ‘좋아하는 일’은 다시 태어나면 한 번쯤 선택해 볼 만한 일이 되었다. 젊은 세대들은 미리 쓰는 유언장에서조차 자신의 꿈을 고이 접어두고 만다. 인생을 두 번 선택할 수 없는 이상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꿈꾸는 것이 꿈이 되어 버린 시대, 그래서 지금은 ‘헬조선’이 된다.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신조어다.

그래도 여전히 꿈꾸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할 것이고, 스스로 답을 내릴 것이다. 누군가는 현실을 선택한 그들을 비난할지 모르지만, 괜찮다. 꿈은 버리거나 짓밟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손을 내밀어 잡을 수 있도록, 이전보다 조금 멀게 곁에 두는 것이다.

‘헬조선’에서도 누구나 그렇게 꿈을 꾼다. L은 고민 끝에 교직 과정이 있는 인문학 전공을 선택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덜’ 후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스무 살 그의 미래에 건투를 빈다. 면담을 통해 계속 대면하게 될 또 다른 L에게도, 모든 청춘에도, 부디 건투를 빈다. 그리고 나에게도 부디 건투를, 빈다.

희망 꿈 소망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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