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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타입, type)의 시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남녀차이에서 시작해서 혈액형, 성격검사, 애니어그램, MBTI 등등 다양한 유형 테스트가 존재한다. 최근에는 “일 잘하는 사람들의 OO가지 특징”, “성공한 사람들의 OO가지 습관” “내향적인 사람들의 OO가지 특징” 등 특정 유형의 사람들의 특징을 ‘깔끔한’ 목록으로 제시하는 포스트가 넘쳐난다. “넌 유명인 중에 누구를 닮았니?” 같은 퀴즈도 엄청나게 잘 팔리는 컨텐츠다.

타입
유형(type)은 과연 나를 반영하는가? (사진: delete08, CC BY NC)

유형의 시대, 단순한 재미?

대부분 ‘재미로 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 나오는 이런 컨텐츠들이 정말 재미에 그칠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련의 유형화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 사고의 경향을 고착시킨다는 말이다. 남녀차이를 그저 재미로 읽는다는 말은 얼마만큼 진실일까? “성공한 사람들의 OO가지 습관”이라는 포스트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가? 그렇게 ‘재미’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인식이 사람들을 대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한 가지는 이런 유형화가 사람들을 재단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가두는 의식의 족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유형화를 피할 수 없다면, 그것에 ‘감염’되지 않도록 스스로 늘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한 가지는 될 수 있으면 유형화를 하지 않고 재미를 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즉, 컨텐츠의 내용이 사회문화적, 인지적 틀(frame)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프레임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인지적 틀'(프레임, frame)은 세상을 바라보는 불가피한 형식이고, 때로는 유용한 인식의 도구이지만, 우리 자신을 가두는 인식의 감옥이기도 하다. (사진: rishibando, CC BY NC)

나라는 존재, “아직 되어보지 않은 그 무엇”

시간과 존재라는 관점에서도 섣부른 유형화의 위험은 분명하다. 유형은 순수히 과거의 나로 지금의 나를 판단한다. 그러나 나의 지금은 시간의 퇴적물일 뿐 아니라 미래와 과거가 싸우는, 새로운 의지와 체화된 습관(habitus)이 충돌하는 지층 변화의 장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를 몇 개의 라벨(label)로 깔끔히 정리하려는 시도는 인식의 폭력, 나아가 미래와 가능성의 부정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마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

–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역, 민음사: 2000.) ‘서론’ 중에서

그렇다. 정체성[正體]性]은 정체[停滯]와 전혀 다른 말이다. 나는 맥신 그린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몇 가지 변수가 아니라, “아직 되어보지 않은 그 무엇”(I am what I am not yet.)이다. 유형은 섞이고 새롭게 정의되며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기존의 인식 틀을 공고하게 하는 것보다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만들어 가는 일이 더 멋지고 재미나지 않을까?

내가 유형을 거슬러 살아가는 이들, 우상(idol)이 아니라 우상파괴자(iconoclast)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큰 감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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