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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남긴 숙제: "미안해 선생님이 거꾸로였어"

면접관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1. 아무도 없는 거리에 짧은 횡단보도. 신호등은 빨간색인데, 면접에 늦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면접장으로 향하는 길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지만, 도와주다가는 면접에 늦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1. 어떤 질문

위 질문들은 오래전에 중학생들을 면접하며 던진 것들이다. 실제 면접 점수와는 상관없는 질문이었고, 정답도 없는 질문이다. 단지 학생들이 어떤 대답을 하고, 어떤 이유를 말하는지, 그 답변 과정 자체가 궁금했다.

나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첫 번째 질문에 “당연히 건넙니다.” 라고 대답했을 거다. 두 번째 질문엔 “사무실에 전화로 위급 상황을 알리고 공익요원에게 상황을 인계한 후에 최대한 빨리 면접장으로 가거나, 수습할 사람이 저 혼자라면 면접을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을 거 같다.

아이들은 뭐라고 답했을까?

놀랍게도 모든 아이가 똑같이 답했다.

1번 질문에 “건너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규칙을 지켜야 하니까요.”
2번 질문에는 “아픈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 그럼 안 되니까요.”

착한 건 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같은 답변을 했다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다. 나로 말하자면, 아이들의 한결같은 답변은 씁쓸했다. 아이들의 답변이 진정성이 없었거나 재미없어서가 아니다. 구체적인 질문과 상황에 관해 답하기보다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정답’을 말한다고 생각해서다. 달리 말하면, 아이들은 연역적 추리를 통해 답했다.

‘정답’을 말하기 위한 몸부림

그래서 아이들이 ‘준법정신이 훌륭하다’라든가 ‘희생정신이 강하다’ 등으로 결론을 내리는 게 나로서는 힘들었다. 오히려 아이들의 답변은 면접이라는 압박 상황에서 정답을 말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였다.

질문을 받자마자 무엇이 정답일지 눈치를 본다. 질문하는 권위자는 정답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는 의혹 속에 과녁의 정중앙을 겨냥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말을 뱉는다.

“빨간불에서 건너면 선생님에게 혼나고, 교과서에서 아픈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써 있어요. 저는 입학하면 교칙 잘 지키는 착한 학생이 되겠습니다. 제발 뽑아주세요.”

“학교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착한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쩜 이리도 도덕적이고, 이렇게도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일까? 누가 그렇게 만드는 걸까? 이건 좋기만 한 일일까?

학교에는 예의 바른 학생과 망나니 두 종류의 학생이 있을 뿐이다. 완벽한 체제 순응과 정신분열이라는 두 가지 현상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 상상의 빈곤과 청개구리 금지 사회가 혹시 오늘 세월호가 가라앉은 것 뒤에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학교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어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며 주저앉았다. 그 아버지의 말은 둔탁한 몽둥이가 되어 나를 때렸다.

2. 선장은 어디에나

며칠 전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어떤 글을 읽었다.

“너 같은 놈 사람대접 안 하기로 했다”

글쓴이는 운전 중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함께 탄 사람이 “선장이 왜 그랬는지 이해는 된다”는 말을 하자 꼭지가 돌아버렸다. 그래서 길 위에서 동행자를 내팽개치고 집으로 가버렸다. 글쓴이는 “그따위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대접 안 하기로 했다”고 분노했다. 물론 그 분노를 십분 이해한다.

선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 조금만 더 열심히 생각하면 선장을 이해할 수 있다.

주위에 아는 사람 통해서 회사에 자리 하나 찔러넣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동문 선배가 거나하게 사먹이고는 힘든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어깨를 다독여주면 괜히 마음이 든든했던 적은?

뉴타운 개발 정보를 은혜 입은 사람에게만 살짝 흘려줬던 적은? 우리 아이 잘 봐달라고 담임 선생님에게 책을 선물하며 상품권 몇 장 찔러주고 그 정도는 세상 사는 지혜라고 이름 붙인 적은?

인맥이 재산이니 공부 못하는 애들이랑 어울리지 말라고 훈계한 적은? 너무 진지하게 수업 열심히 하면서 학점 짜게 던져주는 교수에게 ‘제기랄’ 섞인 강의평가서를 되돌려준 적은?

‘나만 X될 수는 없지’

‘나만 X될 수는 없지!’라고 외치는 모든 현장에 선장이 있다.

매뉴얼을 비껴가며 살기를 즐기고 운 좋게 매뉴얼이 요구하는 과정을 성큼 뛰어넘어 한 번에 돈을 많이 벌거나, 학점을 A로 쉽사리 수놓거나, 로또에 맞은 아무개, 나보다 공부 못 했는데 재수 좋아서 대학에 추가 합격 얻어걸린 재수 없는 녀석을 부러워하는 삶의 방식 모두……

그 모두가 세월호 선장과 함께 인생을 쉽게 운전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그들’을 패배시킨 적 있던가?

주위를 둘러보자. 한국 사회는 늘 초간단 요약 매뉴얼로 높은 단계로 진입하는 소수가 있다. 우리는 언제 제대로 한 번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을 패배시킨 경험이 있던가?

우리는 늘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자책하는 쪽이었다. 그들이 불법으로 과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어리석고, 비효율적이라고 자책했다.

“다들 잘 나가는데 나만 바보다.”

키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선장이 키(운전대)를 다른 이에게 쥐여준 장면부터 다시 시작해 볼까?

내 직장, 학교, 가정을 잘 들여다보자. 과연 그놈의 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장롱 속에 있나? 부엌에 있나? 아니면 책장에 있나? 아니면 공중분해가 된 건가? 아니 아니 과연 그 키는 있기나 했던 건가?

우리가 있는 거의 모든 곳을 돌아보라. 심지어 종업원 서너 명이 있는 가게에서조차 밤새워 키를 잡고 운전다운 운전을 하는 선장을 발견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괜히 일 만들지 마. 피곤해’라는 말을 우리는 몇 번이나 했느냐 말이다.

괜히 건드렸다가 인생 골로가는 그 키. 누구나 그 키를 잡길 원하지만, 그 키에 달라붙은 책임은 적당히 회피하며 살고 있지 않으냔 말이다. 세월호라는 비극 이면에 더 많은 세월호들을 잉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미 우리는 꽤 많은 세월호 선장과 함께 살고 있고, 또 그런 선장이 우리였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동행 중인 차 안에서 쫓겨나야 하는 걸까?

3. 테두리보다 한 뼘 더 상상하기

그래서 정말 슬픈 것은 ‘세월호’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 인식과 구조가 꼭 물 위의 배가 아니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계속 작동할 것이라는 점이다.

상상하고 선언하기

우리 사회의 모습이 지금 이대로라면 세월호는 예외에 속한 비극이 아니다. 여전히 비극의 기운은 멎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상상하는 것, 그리고 상상을 현실에 뿌리 박기 위한 첫걸음으로 그 상상을 선언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엄마라면 지금 당장 자녀들에게 ‘공부 못해도 돼’라고 선언해보자. ‘내 마누라와 내 새끼는 내가 책임진다’는 사고방식의 가부장이라면 ‘우리 가족은 각자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동등한 친구다’라고 선언해보자.

동향과 동문의 의리에 죽고 못사는 당신이라면, 그 지긋지긋한 연정을 벗기 위해 선후배가 결국 그냥 남이며 내가 침몰할 때 밥먹여 주는 건 아니라는 상상과 선언을 제안한다.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기

관계적 상상력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비극은 언제나 어떤 특정한 물리적인 관계 바깥에서 발생한다.

엄마가 ‘자식’이라는 테두리에 갇힐 때 그 바깥에는 타자화한 ‘기러기 아빠’가 생겨난다. 가부장이 ‘내 새끼, 내 마누라’에만 갇힐 때, 가족 바깥에 있는 수많은 개인과 집단에 대한 자연스러운 소외가 발생한다. 동문에게 한 자리 마련해 달라고 찔러넣는 순간 열심히 시험공부한 누구의 시간과 인생이 무너진다.

더 큰, 더 더 더 큰 테두리

더 큰 테두리를 그려야 한다. 저 아이가 내 자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저 할머니도 우리의 가족과 같다면, 저 타향 사람도 내 인생 선배라고 할 수 있다면……우리는 더욱 자유롭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으므로 더욱 가볍고 편안하게 매뉴얼대로 살 수 있다. 매뉴얼은 평상시에는 비효율이지만 위기 앞에서는 생명이다.

어떤 사람의 삶의 가치는 그 사람이 그릴 수 있는 테두리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리고 그런 최선의 테두리, 최대의 테두리를 상상하면서 사는 삶은 값지다. 재난이 가져온 비극의 시간들을 통과해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재난을 기억하며 삶의 테두리를 조금 더 넓게 그려보는 작업을 모두가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그린 테두리 바깥에서 타자화하고, 거절당한 사람들, 그 가치들에 대해 다시 문 여는 작업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4. 상상의 정치

‘참 옳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렇게 살다가는 너만 이용당하고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주위의 어른이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많이 들어봤을 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사실 맞는 말이다. 다만 혼자 하는 상상이야말로 망상이며, 인생 파탄 나는 지름길이다.

상상, 혼자 하면 망상 함께하면 정치적 이상

따라서 중요한 건 함께 상상하는 것이다.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혼자 하는 것은 망상이라면 함께하는 것은 정치적 이상이다.

3등 선실에 있는 우리 삶에서 그 한 칸을 책임지는 눈앞의 과장님과 부장님만 봐선 안 된다. 배 전체를 지배하고, 지휘하는 상무님, 사장님에 대한 감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배 전체가 투명해야 한다. 투명한 벽과 통로가 필요하다.

위기 상황에서 상무님, 사장님에게 키를 맡겼다고 해서 그들에게 편리한 탈주로를 허락해선 안 된다. 그들이 비밀 탈주로를 통해 빠져나가는지 제대로 감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제대로 된 감시원인지 더 믿을만한 감시원들(언론)을 고용해야 한다.

혼자 할 수 없는 일, 정치

우리 모두의 침몰에 모두가 신호를 받을 수 있는 신경 체계를 건설하자. 혼자 할 수 없는 이 일을 우리는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는 재미없지만, 공동체의 생명에 관계한다.

이제부터 원래 그렇다고 알고있던 것들을 의심하자. 단지 오늘 야근이기 때문에, 당장 취업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무관심했던 우리의 시선을 고쳐잡아 내 두 팔이 닿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한 뼘만 더 크게 상상하며 살아보자.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사실은 세상이 뒤집혀 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적응하려고 했던 이 세상이 사실은 되려 뒤집혀 있던 게 아닐까? 지금 나는 선장처럼 빠른 통로로 가는 열쇠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남보다 빨라짐으로써 누구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가?

나는 두렵기 때문에 다수와 함께 앉아있기를 선택하여 묻어가는 삶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말 잘 듣는 직원이라는 평가는 정말 나에게 만족스러운가? 착한 학생은 정말 좋은 말인가?

뒤집혀가는 배에서 똑바로 서 있으면 나올 수 없다. 함께 우리의 몸을 뒤집어 통로를 찾자.

5. 미안해, 실은 선생님이 거꾸로였어

하여 학생들에게 미안해서 많이 울었던 그대에게, 오늘 물구나무서보기를 추천한다.

오염되지 않은 작은 생각들이 세상을 뒤집으며 실험하고 질문을 던질 자유를 허락해주기를, 우리가 좀 더 넓게 원을 그려 손잡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함께 손잡자.

저 바닷속에 있는 아이들이 어서 나오기를 바라고, 또한 그저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기록과 재난과 안타까움 대신에 모두가 더 고민하고 사색하며 반성해서 좀 더 좋은 엄마, 아빠, 사장, 직원, 더 좋은 ‘자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우리’ 교실에서 “넌 왜 쓸데없는 상상을 하니?”라는 말이 적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저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태도와 오늘의 비극이 무관하지 않은 거 같아 매일 불안하기 때문이다. 애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선생님이 거꾸로였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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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된 건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들인 것 같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글/그림: 최남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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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필자, 영어교사

잡학무식취미블로거. 밥벌이는 영어 선생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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