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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2차대전 중에 찍힌 평범한 사진들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연재물입니다. 전쟁사와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은 필자 고어핀드 님이 사진을 접하며 발견한 풍성한 사연과 이야기들을 함께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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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한 미군 헌병이 어린 소년의 손을 잡은 채 사진에 담겼다. 전쟁터에 어린 소년이라니, 동생이나 조카가 대서양을 건너 면회라도 온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소년의 표정에서는 안심과 기쁨이 배어 나오는 반면 그를 내려다보는 미군 하사관의 표정은 안타깝고도 씁쓸해 보인다. 비밀은 저 소년의 옷차림에 있다. 잘 보라. 민간인의 옷차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른쪽에 있는 미군 하사관과 똑같은 옷을 입은 것도 아니다. 척 보기에도 앳되어 보이는 이 소년이 입은 옷은 독일군 군복이다. 그렇다. 이 사진은, 한 미군 병사가 독일군 포로의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이다.

‘내가 어렸을 때, 사실은…’

언젠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독일 소설가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일생 동안 나치를 비판해 왔지만, 정작 어렸을 때는 나치 친위대원으로 복무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는 친위대가 그저 정예부대인 줄 알았지 혐오스러운 대상이라는 생각도 못 했다고 털어놓았다. 일생 동안 과거를 감춰 온 그에게 대내외적으로 비난이 쏟아졌지만, 여기에는 뭔가 묘한 구석이 있다. 고백이 있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가 방공포병으로 근무했다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927년생이다. 그러니까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만 해도 그는 성인이 아니었다! 미성년자가 군 복무를 했다는 사실이 여태 왜 별 화제가 되지 않았을까? 간단하다. 당시 독일에서 그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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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간병으로부터 몸수색을 받고 있는 독일군 대공포병(Flakhelfer). 걸치고 있는 군용 외투가 너무 커 보인다. 1945년 3월, 베를린 근교.

당시 독일 제국은 말 그대로 전 세계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국토와 인구를 지닌 미국과 소련(러시아)에서부터 수많은 다른 적국들까지. 아무리 독일 제국이 지금의 독일보다도 훨씬 넓고, 인구도 많고, 각종 동맹국들이 도와주고 있다고 해도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전쟁을 벌이기에는 인력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징병 가능한 남자들은 전부 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방이라고 해서 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장 각종 군수공장을 돌릴 인력이 필요하고, 매일같이 쏟아지는 연합군의 폭격에 맞서 대공포를 조작할 인력이 필요했다. 소년병이 필요해지는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대공포 조작에는 신체적 조건이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미성숙한 소년들도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세대가 공유하는 공통적인 경험을 가지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산업화 세대” “386 세대” “IMF 세대” 등등. 같은 시기 독일의 소년들에게도 비슷한 별명이 붙었다: “대공포 세대(Luftwaffenhelfer Generation)” 한 세대를 가리키는 이름에 대공포라는 말이 붙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소년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는지는 더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어린 소년을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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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위생병 하나가 부상당한 독일군 소년병을 치료해주고 있다. 군복만 빼 놓는다면 놀다 다친 동생을 치료해주고 있는 큰형처럼 보인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희귀한 컬러 사진이다.

사실 보통의 “대공포 세대” 정도면 그나마 나은 축에 든다.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기 전의 그 소설가처럼 말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앞서 링크한 기사에도 살짝 언급되지만, 잠수함 승무원처럼 실제 전장에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6·25 사변 당시 학도병들이 있지 않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나치 독일의 소년병들은 학도병과 차원이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현역 다녀온 사람들이 쓰는 표현 중 ‘군대가 보이스카우트인 줄 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야 내무반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표현에는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그 많은 조직들 중에 하필 ‘보이스카우트’ 같은 소년단이 군대와 비교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기묘하지 않은가? 하지만 소년단의 역사를 살펴 보면 이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스카우트의 창시자는 영국군의 베이든 파웰 중장으로, 제 2차 보어 전쟁(1899~1902)의 마페킹 포위전에서 영감을 얻어서 보이스카우트을 창시했다. 인력과 보급품이 극도로 모자란 곳에서 일정하게 편성된 소년들이 비전투 임무를 수행해 낸 것이 보어 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유사성이나 연관성이 아예 없을 경우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군대와 소년단이 비교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둘 사이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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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돌격대(SA)의 제복을 갖춰입은 꼬마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 시기 및 장소 미상. 하지만 히틀러가 총리가 된 것은 33년, SA가 해체된 것은 34년이므로, 아직 그 전 – 히틀러가 아직 길바닥 정치인이던 시절 찍힌 것으로 보인다.

나치 독일에도 소년단 조직이 있었다. “히틀러 유켄트”. 그런데, 이 조직은 보이스카우트와는 차원 자체가 달랐다. 우선 창설자가 나치 당의 초기 공신 중 한 명인 발두어 폰 시라흐였다. 일반적인 소년단 활동과는 달리 체력 훈련에 매우 큰 비중이 주어졌다. 독일 제국 문화체육부 역시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가며 이들을 지원했다. 왜 그랬을까? ‘나치 이념에 충성하며 독일 민족의 정복 전쟁에 선봉을 서야 할’ 나치 친위대 입대를 위한 신체적 조건이 굉장히 높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요컨대, 히틀러 유켄트는 단순한 유소년 조직이 아니었다. 나치 친위대의 주니어 버전이었던 것이다. 사실 둘의 관계를 알고 싶으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제복 옷깃만 비교해봐도 된다. 나치 친위대의 엠블렘을 반쪽내면 히틀러 유켄트의 엠블렘이 되니까. 1932년 독일 총리에 의해 나치 친위대가 일시적으로 금지되었을 때, 히틀러 유켄트 역시 함께 금지당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조직은 처음부터 한 세트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나치 지도부라는 작자들이 미성년자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그들 눈에는 어린 소년이 나중에 전쟁터로 끌고 갈 예비 전투력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흡사 닭 농장 주인이 병아리를 예비 계육으로 보듯 말이다. 하기야 인종적으로 우월한 미래의 지배 계급을 만들겠다고 사람을 교배시키거나 독일 민족의 유전적 순수성을 손상시키는 부적격자들을 말살하는 계획을 실제로 실행하는 인간들이니 이 정도는 오히려 정상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미성년자들을 대놓고 전투병으로 투입하는 미친 짓을 실제로 벌인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모자랍니다’

영·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독일 치하의 유럽 대륙에 상륙한 것은 1944년 6월이고, 전 국토가 점령당한 독일 제국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은 이듬해 5월이다. 2차대전 팬들은 이따금 이 사이의 어느 기간까지는 독일에게 최후의 희망 – 혹은, 잘하면 이길 수도 있었던 시기가 있었을까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별 의미가 없다고 보는데, 당시 투입된 독일군의 부대 목록(Battle Orders)만 봐도 답이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44년 6월 연합군과의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 중에 특이한 이름의 부대가 둘 있다: 제 130 기갑사단 ‘전차 교도 사단’ 그리고 제 12 무장친위대 사단 ‘히틀러 유켄트’. 전자는 전차병 훈련소의 교관들을 차출해서 편성한 전차부대고, 후자는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히틀러 유켄트의 소년들을 동원해서 편성한 부대다. 신병들의 훈련을 맡아야 할 훈련소 교관들이 달려나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미성년자로 편성된 부대가 출격하고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겠는가? “이미 40세 미만 징병 가능한 남자들은 바닥이 난 지 오래고, 산업 시설 역시 연합군의 폭격을 맞아 완전히 거덜이 났다. 우리는 더 이상 보충할 신병도, 새로운 무기를 생산할 여력조차 없다. 이렇게 된 거, 있는 병력이라도 싸그리 긁어모아 죽기 살기로 싸워 보자.” 이런 마당에 이길 수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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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공방전에서 전공을 세운 한 독일군 소년병이 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이미 정상적인 징병 가능 남성은 씨가 마른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군에 맞서 베를린을 지킨 독일군 전력의 상당 부분은 이런 소년병들이었다. 1945년 4월.

2차대전의 막바지를 찍은 사진들을 보다 보면,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약 1년 동안, 뒤로 갈수록 소년병을 찍은 사진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자기 덩치보다 더 큰 무기를 힘겹게 들고 있는 소년들, 지나치게 큰 군복을 갖춰 입은 꼬마들, 포로 집결지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사내아이들, 며칠을 굶은 듯 미군이 준 빵을 허겁지겁 뜯어 먹고 있는 모습… 이런 ‘포로’를 잡은 연합군의 방침은 성인 포로들과는 달리 깨끗한 옷을 입힌 다음 부모에게로 돌려보내는 것이었지만, 온 나라가 난장판이 다 된 상태에서 이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앳된 독일군 포로의 손을 잡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미군 병사들 또한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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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요놈”: 은신처에 숨어있던 독일군 소년병이 소련군 병사의 손에 끌려나온다. 1945년 5월, 베를린.

세월은 참으로 무정하게 흘러간다.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벌써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대공포 세대의 어두운 기억 또한 이제 곧 경험의 영역을 넘어 역사가 될 것이다. ‘친절한 적군 아저씨’의 손을 잡고 미소 짓던 소년은 그 후 어떤 삶을 살고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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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재본에는 각주에 해당하는 내용을 생략하였습니다. 각주 내용은 저자 블로그 “gorekun.log”의 해당 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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