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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라 말로 나눈 사랑의 말 속에
잉태되고
자란 동네 아침 공기와 저녁
연기 밴 말
여러 감정과 운명이 밴 말 속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소리가 나오는 목구멍의
결정적 운명과 함께
저 말을 하는 입의
기운과 함께
소리와 뜻
숨 쉬는 온몸과 함께
살고, 살고 또 살았다.

– 정현종, ‘모국어: 미국에서’ 중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을 늘리겠다며 1분 남짓한 ‘출근길 문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도어스테핑(Door-stepping; 약식 회견)’이라며 굳이 낯선 영어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도어스테핑’이라는 표현은 영어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쉽게 알 수 있는 우리말, 우리글을 두고 굳이 낯선 영어 표현을 쓰고 있는 거죠. 소통은커녕 단절과 정보 소외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국어기본법’ 제15조(국어문화의 확산) 2항은 “신문·방송·잡지·인터넷 등의 대중매체는 국민의 올바른 국어사용에 이바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언론은 “출근길에 윤 대통령은”, “윤 대통령은 출근길에” 등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도어스테핑’을 쓰는 데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10개 신문 지면과 7개 방송사 저녁종합뉴스 중 신문에선 동아일보가 유일하게, 방송 중에선 KBS·MBC·SBS가 ‘도어스테핑’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주요 신문과 방송의 표기와 표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경향신문: ‘출근길 소통’(도어스테핑)
  • 국민일보: ‘도어스테핑’(door stepping·약식 회견)
  • 동아일보: 출근길 기자들과의 문답
  • 조선일보: 도어스테핑(약식 회견)
  • 중앙일보: 출근길 즉석 문답(도어스테핑)
  • 한겨레: 출근길 약식회견(도어스테핑)
  • 한국일보: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
  • 서울경제: 출근길 ‘도어스테핑’
  • 매일경제: 출근길마다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변하는 ‘도어스테핑’
  • 한국경제: 도어스테핑(약식 회견)
  • KBS: 기자들과의 즉석 질의 응답
  • MBC: 대통령의 출근길 발언, 출근길 소통
  • SBS: 출근길 질의응답
  • JTBC: 약식 회견, 출근길 도어스테핑
  • TV조선: 출근길에 기자들과 약식 회견, 도어스테핑
  • 채널A: 약식 기자회견 이른바 도어스테핑
  • MBN: 출근길에 기자들과 약식 회견 이른바 ‘도어스테핑(door stepping)’

언론의 이율배반? 

언론이 외래어나 잘못 쓰기 쉬운 우리말에 관한 이해를 돕는 보도와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은 우리말, 우리글의 가치를 존중하고 바르게 사용하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니터 대상 중 7개 신문과 3개 방송에서 우리말 순화와 이해를 위한 보도와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는데요.

MBN은 평일 아침뉴스 [굿모닝 MBN]에서 김주하 AI 앵커가 등장해 “생활 속에서 잘못 쓰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다듬어 보는” ‘쉬운 우리말’을 방송하고 있습니다.

△ ‘도어스테핑’을 거리낌 없이 쓰는 MBN 보도(6/9)와 김주하 앵커가 등장하는 ‘쉬운 우리말’(6/27)

국민일보도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 국어문화원연합회, 한글문화연대와 함께 ‘쉬운 우리말 쓰기’를 꾸준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쉬운 우리말 쓰기/그룹홈→자활 꿈터…바꿔 쓰면 긍정적 인식 전환 도움] (6월 18일 박민지 기자)은 “공적 정보를 다루는 공공언어는 특히 알아듣기 쉬워야 한다”며 “수많은 복지 정책 가운데 본인이 수혜자가 될 수 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정책이나 제도를 쉬운 언어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죠. 언론사별 ‘우리말’ 관련 연재보도 및 프로그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는 멋있고, ‘국립추모공원’은 멋없다는 한국 대통령 

‘도어스테핑’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6월 10일 국민의힘 지도부를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초청한 자리에서 집무실 주변 시민공원 조성 계획을 소개하며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 화제가 된 적 있죠. 이날 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산 시민공원 이름을)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어서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

– 윤석열 대통령, 2022년 6월 10일,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점심 모임 중에서.

하지만 대부분 언론은 이에 대해 비판 없이 인용하는 데 그쳤습니다. 국민일보 [윤 대통령 “용산공원,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동상도 건립”] (6월 10일 김성훈 기자)은 이날 국민의힘 지도부와 윤석열 대통령 오찬 회동에서 오간 발언이 나열될 뿐이었고, 동아일보, 조선비즈 등의 관련 보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채널A [단독/용산공원, ‘한국의 내셔널몰’로 조성 추진] (6월 15일 송찬욱 기자) 역시 윤 대통령이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며 용산공원은 “‘한국의 내셔널몰(National Mall)’로 만드는 방안이 추진”된다고만 했습니다.

영어 남용은 꾸준히 지적되어 온 문제로 우리말 비하, 영어 사대주의 논란으로도 이어지는데요. 언론도 공공언어 등에서 국민이 잘 모르는 영어가 아니라 ‘국민이 알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문해왔습니다.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거버넌스’ 가 뭐야?] (2021/7/12 배상복 기자)는 거버넌스 자체로도 이해하기 어렵고 복합어로 쓰이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며 “왜 이렇게 ‘거버넌스’란 말을 즐겨 쓰는 것일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어 “때로는 그것이 가장 적확한 용어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론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고 꼬집은 뒤 “공공언어의 생명은 정확성과 소통성”이지만 “‘거버넌스’는 추상적 용어”라며 정확한 용어 사용을 하면 소통은 따라온다고 설명했습니다.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 사용에 앞장서야 할 언론이 정작 보도에서 외래어를 남용하는 문제를 짚은 보도도 있습니다. 한겨레 [키오스크는 ‘무인 주문기’, 백 브리핑은 ‘비공식 보고’로 바꿔볼까] (2021/8/23 김지윤 기자)는 미디어에서 쏟아내고 있는 낯선 용어를 살폈습니다. “낯선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보는 데 들어간 시간 낭비 ‘언어 비용’이라고”하는데 “순화어를 사용하면 이러한 언어 비용이 줄어든다”며 대중매체의 순화어 사용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뉴스에서 사용하는 보도 용어는 시민들이 긴급 상황을 마주했을 때” 이해하기 쉽도록 개선해 “중요한 정보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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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대상: 2022년 6월 9일~6월 20일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매일경제, 서울경제, 한국경제 지면, 2022년 6월 9~10일 KBS [뉴스9], MBC [뉴스데스크], SBS [8뉴스], JTBC [뉴스룸], TV조선 [뉴스9] (평일)/[뉴스7] (주말), 채널A [뉴스A], MBN [뉴스7] (평일)/[뉴스센터] (주말), 2022년 6월 9일~6월 20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도어스테핑’·‘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 검색 후 관련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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