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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정치인인 울산 택시기사 김창현 님은 하루하루 겪은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연재합니다. 이 택시 일기를 필자와의 협의를 거쳐 슬로우뉴스에도 연재합니다. 택시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만난 우리 이웃의 이야기들은 때론 유쾌하게, 때론 담담하게, 또 때론 깊은 감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 이야기들을 거울삼아 우리는 삶을 돌아봅니다. 그 삶의 풍경을 매주 조금씩 공들여 담아볼까 싶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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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의 택시일기

시간대에 따라 승객이 다르다. 새벽 5시대는 주로 먼 길가는 승객, 그러니까 시외버스 터미널 혹은 고속버스 터미널 손님이 많다. 6시대부터 8시까지 출근전쟁. 전날 소주 한잔한 노동자들이 통근버스 놓치고 허겁지겁 택시에 오르는 경우이다. 8시가 가까워지면 지각한 학생들이 탄다. 9시대 소강상태. 이때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10시대부터 12시까지 가장 많은 승객은 역시 아기 엄마들이다. 주로 예방접종 혹은 감기로 병원에 가거나 어린이집 차를 놓쳐 데려다 주러 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엄마들의 공통점은 아이 외엔 아무런 관심사가 없다는 데 있다. 대화를 시키면 주로 양육에 대한 고민이 줄줄 쏟아진다.

대선을 앞두고 이 30대 초, 중반의 아기 엄마들이야말로 완벽한 중간층임을 알 것 같았다. 정치적 무관심층. 대부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대이다. 즉 총선 때는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린아이와 24시간 전투를 치르면서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여성의 일생을 돌아보면 가장 자기를 잊고 사는 때가 아닐까 여겨진다. 캥거루 마냥 아이를 앞에 안고 두 명의 젊은 엄마들이 차에 오른다.

애 키우느라 고생이 많죠?

“애 키우느라 고생이 많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어려움을 호소한다.

“밤에 아무리 애가 울어도 남편은 일어나지 않아요.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데 잠 깨면 안 된다고 하면서요. 젖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애가 잠들 때까지 안아주고 업어주고 서성이다가 잠이 들면 온종일 멍하지요.”

“남편이 애 보는 문제는 오로지 여자 일로 생각하는 것 같을 땐 참 밉지요?”

“맞아요. 남편이 제일 미워요. 나름 애를 자기도 봐준다고 생각은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잠깐 도와준다고 생각해요. 자기 일은 아니죠. 쉬는 날만 되면 자주 싸워요. 애 봐주고 같이 놀아주는 것을 무슨 엄청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해요. 애 좀 봐달라고 맡겨두면 조금 놀아주는 것 같더니 금세 텔레비전 보고 있거든요. 저는 쉬는 날 뒹굴대는 남편만 보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요.”

“피곤하니까 쉬고 싶은데 그걸 이해 못 해주느냐고 하지 않던가요?”

“어머. 아주 정확하네요. 정말 그래요. 도대체 왜 제가 화내는지 이해를 하지 못해요.”

남편들은 정말 여자 마음 몰라요

그러자 한 아기 엄마가 말을 받았다.

“그래서 난 차라리 낚시하러 나가라 나가. 소리를 질러 버려요. 얼굴을 안 보면 괜찮거든요. 남편들은 정말 여자 마음을 몰라요.”

“요즘 젊은 아빠들은 옛날과 달리 적극적이라고 하던데요? 전통적인 엄부자친, 그러니까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엄마의 모습을 기대할 순 없지만 서로 역할을 나눠 아이 양육을 하지 않나요?”

“왜 안 하겠어요? 문제는 애 아빠가 나서 뭘 하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거지요. 제가 이것저것 끄집어내면 못 이기는 척 듣고 있어요. 한번은 아이에게 엄하게 해라, 내가 달래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가 얼마 못 가고 말았어요.”

“왜요?”

“작은 애가 태어나고 큰 애가 두 돌을 넘기면서 큰 애는 소리 지르고 떼쓰는 일이 많아졌거든요. 아빠는 직장 나가고 없는데 어떡해요. 제가 야단을 치고 엉덩이를 때리지요. 그런데 저녁때 들어온 아빠가 이번에는 또 야단을 치는 거예요. 엄부가 되겠다고.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래서 왜 애한테 소리를 치느냐고 제가 막 뭐라 했어요.”

“애 아빠는 황당했겠네요. 역할을 나누기로 해놓고 엄마가 화를 내니까.”

“그러게요. 그래서 다시 아빠는 자부가 되고 난 엄친이 되는 걸로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렸어요. 호호.”

“야단치면 막 때리고 그래요?”

“책을 보면 전문가 선생님들이 애를 때리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데요. 그런데 어떡해요? 화가 나 죽겠는데.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똑같은 짓을 하고 또 하니까요. 팡 팡 엉덩이를 소리 나게 때려준 적도 있어요.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마음이 아픈지, 다시 껴안고 풀어주지요.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껴안고 내가 운 적도 있어요.”

아이와 그야말로 ‘떡을 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음이 짠하다.

“오전 택시 손님은 거의 아기 엄마들이에요. 웬 접종이 그리 많은지… 또 왜 그렇게 자주 아픈지… 많이 힘들지요?”

“맞아요. 애 안고 갈 일이 너무 많아요. 오늘은 병원이 아니라 홈플러스에서 하는 아이들 프로그램에 참여하러 가요.”

“그래요? 몇 개월 되었는데요?”

“15개월 되었어요. 조금 크니까 이것저것 찾아다니게 되더라고요. 애 안고 갈 일이 많아요. 힘들다고 하면 시어머니는 ‘우리 때는 농사일 해가며 대여섯씩 낳아 길렀다. 뭐 하나 둘 갖고 그렇게 힘들어하나’ 하세요.”

대가족 제도가 살아 있던 과거와는 달라

그렇다. 시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쩔쩔매는 며느리의 모습을 과거 고생하던 당신과 비교하여 엄살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대가족 제도가 살아 있었다. 주변에 애를 함께 돌봐주는 이웃이 있었고 아이들은 조금 크면 동네 또래 속으로 편입되었다. 큰딸은 동생을 업고 다녔다. 요즘처럼 완벽하게 엄마 혼자 길러야 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사실 애를 기르면서 저는 자주 화가 나요. 저도 대학교육 받았고 남자들과 똑같이 경쟁해서 입사했는데 점점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회의가 들거든요. 저는 업무능력이 자꾸 도태되고 새로운 후배들은 펄펄 날고 있을 테니까요.”

“처녀 시절이 까마득한 옛날 일 같지요?”

“예. 꿈도 많았는데… 저도 한땐 까도녀(까칠한 도시 여자)였어요. 지금 이렇게 퍼졌지만.”

두 사람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웬 택시기사가 자신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말을 받아주니 말이다. 힘든 이에게 “많이 힘들지요?” 처럼 좋은 말은 없기 마련이다.

“애가 탄생하면 그야말로 엄마만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 이런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한 출산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진심을 담았다. 그러자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젊은 아기엄마가 중요한 말을 한다.

“맞아요. 아이는 많이 갖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요. 도무지 함께 아이를 길러주지 않으니까요. 급여 인상도 중요하지만, 육아휴직의 확실한 보장이 법제화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적 시선도 아주 중요하거든요. 육아휴직 했다가 복직해도 도저히 애 키우기 어려우니까 퇴사하는 사례가 많아요.”

이 여성은 임신출산문제로 자기의 직장을 잃게 될까 봐 걱정이 많았다.

“가슴 아프네요. 저도 딸을 키웠는데 참 똑똑해요. 어릴 때부터 반장도 하고 공부도 잘했어요. 리더쉽도 있고요. 적극적이고 명랑하거든요. 이 아이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임신과 출산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도태된다고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고 가슴이 아프거든요. 당사자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데, 사회에서 인정받고 살고 싶잖아요.”

“결혼하고 애를 낳기 전까지 회사에 계속 다녔거든요. 여자들은 회사에서 아주 힘들어요. 억울할 때가 많아요. 내가 저 사람과 일하면 훨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 아이 때문에 퇴근이 보장되는 다른 직군으로 빠져나가는 사람 보면 안타깝지요. 그런데 회사 쪽이나 남자들은 ‘여자는 저래서 안 돼’라고 말하거든요.”

“사회문화에 관련된 것이지요. 사회적 시선이라…”

“얼마 전 들은 얘기인데요. 여성들이 많이 일하는 직장인데요. 임신한 직원을 다른 여성 직원들이 미워한다고 해요. 임신하면 몸을 사리면서 힘든 일을 다른 근무자에게 맡기니까 그렇대요. 기막히지요? 이런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파요. 육아휴직이 단순히 출산 이후에 잠시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게 아니라, 더 확대되고 확실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강제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당당하게 또 누구나 당연하게 말이지요.”

아이를 기르기, 사회가 마땅히 함께 해야하는 일 

자기 이야기를 들은 이야기로 하는 것 같다. 아이를 낳는 것은 부부가 선택할 일이지만 태어난 아이를 기르는 것은 사회가 함께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사회구성원을 사회가 책임 있게 양육한다는 관점이 빠져 있다. 옆의 조금 키가 큰 엄마가 말한다.

“저는 둘인데요. 큰 애가 네 살이거든요. 아이 한 명이 아파도 정신이 없는데 둘이 한꺼번에 아프면 그냥 울고 싶어져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큰 애는 어린이집에 맡기면 되잖아요? 지원비도 나오는데…”

“솔직히 믿을 수가 없어요.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맡겨두면 무슨 프로그램으로 아이를 교육하겠으며 또 얼마나 애정을 갖고 돌봐줄지 알 수가 없잖아요?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아이를 잘 키우는 게 중요하니까요. 친정엄마가 수시로 와서 애를 돌봐주기도 해요.”

이 엄마는 보육시설에 대해 신뢰를 하고 있지 않았다. 보육시설에 대한 더욱 많은 투자와 지원을 통해 믿을만한 시설로 키워갈 생각을 해야지 집에 아이를 끼고 있으면 무슨 답이 나오겠는가? 또 친정엄마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떠맡기면 되겠는가?

다양한 사회적 관심사에서 격리된 채 오로지 아이 양육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는 이 여성들에게 무한한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적으로 보육시스템이 완비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이들의 헌신과 눈물이 없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올바르게 길러 내겠는가? 아이를 낳고 기르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더라도 큰일을 하고 온 선배로서 대접받는 사회분위기는 과연 불가능한 꿈일까?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나는 점점 여성의 아픔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2013년 2월 14일 수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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