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억하는 이의 것이다. 역사란 기억의 집적이고, 기억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그러나 기억이란 유한하고 허망한 도구다. 기억은 때로 우리를 배반하거나 희롱하여, 우리 생애 중에 벌어졌던 일조차 제대로 복원하지 못한다. 1천4백 년 전의 김유신이, 6백 년 전의 이성계가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은 기억 덕분이 아니다. 오로지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무언가가 문자로 기록되고 나서야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는 기록하는 이의 것이고, 기록을 추스르는 이의 것이다.
한국전쟁은 유사 이래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전개된 일 중에 단기간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참사다. 남북한과 참전국을 통틀어 군인 사상자가 240만 명, 민간인 사상자가 250만 명으로 추산된다. 많게는 모두 합쳐 600만 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되었다고 집계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라는 말이 있다. 한국전쟁에서 60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말하면 이는 통계다. 하지만 그 통계 안에는 600만 개의 독립된 비극이 들어 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나의 아버지가, 또 그의 형제들이 그 600만 개 비극의 생생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사상자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통계의 몫이라면, 이 우악스러운 추상성을 개개인의 비극으로 되돌려 복원하며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은 역사의 몫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4월에 출간된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는 역사적으로 소중한 기록이다. 이 책에는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을 전후로 하여 북한에서 쓰인 개인들의 편지 113편이 발굴되어 실려 있다. 전쟁통의 극심한 파괴 속에 이렇다 할 기록이 남지 않았고, 몸소 체험한 이들조차 세월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당시의 생활상을 소상하게 담은 기록이 발견되어 책으로 묶였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에 실린 편지는 1950년 여름~가을 경에 북한 지역에서 오간 편지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가려던 편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편지를 쓴 사람은 부쳤으나, 전쟁통에 받을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서 차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편지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서 60여 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을까.
이 편지 묶음이 발견된 곳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다. 한국전쟁 때 미군이 북한으로부터 노획하여 보관하고 있던 문서 상자들 속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오래된 공문서 더미에 눌려 숨죽이고 갇혀 있던 셈이었다. 이 편지들을 살펴서 정리하고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워싱턴 소재 한반도정보서비스센터(KISON)의 이흥환 선임 편집위원이다. 그가 책의 서문에 붙인 제목은 ‘편지 더미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다.
이 편지들을 처음 만난 건 2008년 11월이다. 미 메릴랜드 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의 열람실에서 한국전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노획 북한 문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은 2006년 1월부터 시작해 만 2년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아직 전체 문서 군의 반밖에 들여다보지 못한 상태였다. 문서 상자 1100여 개 정도를 이미 들여다 본 후였다. 편지들은 문서 상자 1138번과 1139번의 두 곳에 들어 있었다. 누렇게, 퍼렇게 혹은 거무튀튀하게 색 바랜 편지들이 그득했다. …
편지 뭉치 속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저마다 사연이 달랐다. 편지의 주인공들이 자기들끼리도 서로 얘기하는 것 같았다. 어느 엄마는 처음 보는 젊은이의 손을 잡고 자기 아들인 것처럼 못다 한 정담을 나눴고, 어느 남편은 처음 보는 아낙과 자기 아내인 양 두런거렸다. 이렇게 편지들과 첫 인연을 맺었다.
개인의 고뇌 드러난 ‘시대의 증언대’
발견된 편지들은 대부분 1950년에 쓰인 것이고, 그중에서도 9월과 10월에 쓰인 것이 가장 많다. 9~10월이라면 북한이 남한의 거의 전부를 점령했다가 미군 개입으로 압록강변까지 쫓겨난, 전쟁의 가장 극적인 전세 변환이 벌어진 시기다. 한반도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전역에서 참혹한 비극이 생산되던 때라는 뜻이 된다.
편지 대부분에는 평양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 이 위원은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10월19일) 평양중앙우체국에서 이 편지들을 대량 노획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쟁통에 북한 안에서 부친 편지, 또 북에서 남이나 남에서 북으로 가려던 편지, 심지어 흑룡강성, 산동성,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톡에서 날아온 편지가 이렇게 미군의 노획 문서 행낭에 들어가게 되었고, 미군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와서 미국 문서보관소에 잠들게 된 것이다.
이 위원은 이렇게 발견된 편지 728통과 엽서 344통 중에서 113통을 골라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에 수록했다. 각각의 편지는 디지털 복사본을 첨부하여, 편지를 쓴 사람의 필체와 심정을 독자가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 편지들을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수록된 편지의 스캔 상태는 비교적 좋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 등장하고 맞춤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민중의 체취를 그대로 맡을 수 있기도 하다. 이 위원은 이런 편지 내용을 일일이 현대어로 고쳐 싣고, 각각의 편지에 짤막한 해설을 덧붙였다. 웬만큼 꼼꼼해서는 하기 어려운 작업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천차만별이듯이, 그런 사람들이 쓴 편지도 천차만별이다. 개개 편지는 모두 쓴 사람의 개성을 기막히게 반영하고 있다. 이 위원은 각각의 편지에 붙인 해설에서 주인공을 최대한 복원해 냈다. 상상이 아니라 글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성품의 조각들을 맞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편지 쓴 이의 활달하거나 자상하거나 명랑하거나 엄숙하거나 요령꾼이거나 막무가내인 성품이 드러났다. 이 위원은 “이 편지들은 100명 넘는 사람의 사랑, 원망, 분노, 번뇌, 탐욕, 이기심, 고뇌가 한꺼번에 여과 없이 노출되는 한 시대의 증언대다”라고 말한다. 편지로 엮인 드라마에서는 모두가 개성을 지닌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이 편지 묶음이 전쟁 문학의 일부로서도 훌륭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한 장의 편지에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점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은 새삼 경이롭다.
편지는 편지다. 보낸 사람이 있고 받을 사람이 있다. 편지는 받을 사람의 손에 들어가야 제 역할을 한다. 이 책에 실린 편지는 그런 운명을 겪지 못했다. 편지 중에는 급하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거나 부탁하는 것도 적지 않다. 이런 편지도 모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편지들을 읽다 보면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지 걱정이 앞서고 마음이 아픈 경험을 수시로 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볼 테니 아이들 목숨만 부지시키라고 아내에게 당부하는, 전장에 나간 아버지와 그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쏟아지는 폭탄 때문에 극한의 절망 상태에 빠져 “살아 있는 동안만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차라리 다 같이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쓴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향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시시콜콜 당부하고 배려하던 인민군 여전사 최순옥은 어떻게 되었을까. 특무상사로 진급했다고 자랑을 늘어놓다가 결국 물건 좀 챙겨 보내달라는 부탁으로 끝맺은 김준주는 보급품 없이 어떻게 지냈을까. “아버지는 공습 파편에 변소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너무 놀라지 말고 너나 무사히 지내어라”라고 여동생에게 쓴 백인하 자신은 무사히 고비를 넘겼을까. ‘할 말은 태산 같으나 후일에 하기로 하고’ 라고 쓰던 사람들은 후일 만나 그 태산 같은 말을 나누었을까. 어쨌거나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걱정이지만, 생생한 편지들이 읽는 이를 당시의 급박한 상황으로 황급히 데리고 가기 때문에, 이런 걱정이 절로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편지 사연에서 공통으로 엿보이는 것은 물자의 부족과 폭격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장에서는 물자가 부족하니 필요한 보급품을 지니고 면회와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들이 가고, 후방 집에서는 먹을 것과 돈이 부족해 곤란을 겪는다는 사연을 전장으로 보낸다. 편지 노획 시기가 미군의 공습이 한창이던 때이기 때문인지, 많은 편지에서 폭격에 시달리는 절박함이 나타난다. 이 위원은 책에서 “고향에 쓴 편지치고 추수와 폭격 이야기를 빼놓은 것은 열에 한둘뿐이다. 전쟁에서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암구호 같은 것이 바로 이 추수와 폭격 얘기였다”라고 썼다.
“이제라도 수신인에게 전달되었으면…”
편지들이 개개인에게 제대로 들어갔더라면 이렇게 사료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을 남기고 싶은 욕심으로 보자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편지를 못 보내고 못 받은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편지 한 통이 들어가고 말고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6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온 전쟁 편지들은 그 자체로 값진 역사 사료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교훈을 준다. 역사는 기억하는, 아니 기록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교훈이다. 이 위원은 “미국은 1차 대전이나 2차 대전 당시 오간 편지들을 꾸준하게 수집하여 전쟁 사료로 삼고 있다. 손으로 갈겨 쓴 메모 쪽지 하나 허투루 없애지 않고 보존하는 곳이 미국 문서보관소다. 북한에서 가져간 편지 뭉치가 미국 문서보관소의 창고에서 살아남은 것도 기록 보존을 소중하게 여기는 토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라고 말한다.
이 편지들이 보관된 것은 미국의 기록 보존 정신 때문이겠지만, 세상에 나오고 알려지게 된 것은 한반도 현대사 관련 기록을 꾸준하게 추적해 온 이 위원의 집요한 노력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가 비밀 해제된 것은 1977년이다. 여기에는 책에 실린 편지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 뒤 30년이 넘도록 이 편지들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았다. 경천동지할 비밀 따위가 담긴 정부 문서도 아닌 바에야, 전쟁을 겪는 풀뿌리 민중의 시시콜콜한 삶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에서 흐려져 가고 육성 증언해 줄 사람들마저 사라지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미시적인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록은, 희생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전쟁은 통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개 비극의 총합일 수밖에 없음을 웅변하는 소중한 자료다. 그 소중함의 값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눈에 띄어야만 비로소 매겨지는 것이다.
이 위원이 60여 년이나 된 개인의 편지들을 책으로 엮어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편지는 수신인에게 도달해야 그 목적이 완료된다. 이 위원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도 그것이다. 수십 년의 세월, 그 사이 솟고 패인 전쟁과 이데올로기 갈등의 험준한 산령들을 넘어 애초에 가야 할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 위원은 미국 문서 창고에서 편지 뭉치를 발견한 이래, 한국(남한) 주소가 적힌 편지의 관계자를 직접 찾아보려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모두 전쟁의 파도를 잘 타 넘어 목숨을 부지했는지 알 수 없고, 그랬다 하더라도 격동의 세월 속에 한곳에 머물러 살아왔을 가능성은 크지 않고, 또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는 생존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나이가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이 위원은 책 서문에서 “이 편지 모음이 출간되어 나올 때까지도 필자나 발행인은 발신인이나 수신인을 찾지 못했다. … 사연이 어떻든 경위가 어찌 되었든, ‘이건 내가 쓴 편지이다’ 또는 ‘이건 내가 받았어야 할 편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만이라도 나선다면 이 편지 모음은 탄생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 위원은 미국이 보관하고 있는 한국 관련 문서를 1차 자료로 하여 지금까지 <미국 비밀 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과 <부시 행정부와 북한>을 펴냈다. 그는 매일 버지니아 주 그의 집에서 포토맥 강을 넘어 1시간을 달린다. 메릴랜드 주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그의 직장이나 마찬가지다. 물리적 공간으로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의 일터는 군사 쿠데타로 숨 가쁘게 돌아가던 한겨울의 서울, 민주화 열기가 비극으로 치닫던 광주, 핵 개발을 추진하며 미국과 갈등하던 박정희의 청와대, 그리고 전쟁의 격동 속에서 민중이 고통받던 1950년 한반도라고 해야 옳다. 다른 말로 하면, 한반도의 현대사가 그의 직장이다.
(필자는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한 부를 저자로부터 받아서 이 글을 쓰는 데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