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세계를 달구어 놓았던 미국 대선의 열기도 이제 차츰 식어가고 정리되는 듯 하다. 선거는 결국 트럼프 재선이라는 이변 없이, 미국의 주류를 대변하는 민주당 바이든의 당선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미국이 겪고 있는 분열상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노년의 신임 대통령의 과제는 만만치 않을 듯 하다.

이번 대선에서 일어난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남부 공화당의 철옹성과 같았던 조지아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21세기 들어 미국의 정치, 사회적 갈등은 북부와 남부 등의 지역 갈등보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도농 갈등이라는 축을 두고 움직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경제, 인구지리적 변화는, 기후가 온화하고 사업 환경이 좋은 남부 주로 기업과 지식 노동자들이 옮겨간 것이었다. 세기 전환기부터 시작된 선벨트의 부상조지아부터 텍사스, 애리조나에 이르는 지역까지 넓은 지역의 도시 성장을 자극했고, 그 도시로 옮겨온 사람들은 거의 민주당을 지지했다.

조 바이든, 바이든은 결국 승리했지만...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의 상당수는 트럼프를 선택했다. (출처: Gage Skidmore, CC BY 2.0) https://www.flickr.com/photos/gageskidmore/48605410967/
조 바이든이 결국 승리했다.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의 상당수는 트럼프를 선택했다. 이제 바이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분열된 미국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다. (출처: Gage Skidmore, CC BY 2.0)

남겨진 사람들 

물론 옮겨간 사람이 있다면 남겨진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숙련된 지식 노동에 종사할만한 인적 자본이 없었고, 교육 수준도 낮았다. 그 대신 그들은 소도시에 거주하며 제조업 노동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자기 땅의 산업이 눈 녹 듯 사라지며 남부로,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자기 땅에 남겨진 사람들은 2016년에는 정치적으로 대이변을 일으켰었다. 트럼프를 지지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번 대선에는, 그 트럼프가 자신들의 문제를 깨달을 대안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기에 바이든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듯 하다.

그러나 그래도 남겨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가 얻은 득표가 7,300만표로, 7,800만표를 받은 바이든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4년 전 자신의 득표 수나 그 이전 오바마의 득표 수를 상회하는 표를 얻어냈다. 그렇기에 여전히 남부든 어디든 도시로 떠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고, 그러길 원치도 않는 남겨진 사람들의 갈등이 바이든의 승리로 봉합되었다고 보기에는, 선거가 보여준 깊게 패인 골이 너무나 커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힐빌리('백인 촌뜨기') 출신의 보수주의자(J. D. Vance)가 쓴 [힐빌리의 애가: 위기에 처한 어느 가족과 문화에 관한 기록](왼쪽)과 트럼프. 2016년 '힐빌리'로 상징되는 '남겨진 자들'의 선택은 잘난 도시것이 아니라 광대 트럼프였다.
힐빌리(‘백인 촌뜨기’) 출신의 보수주의자(J. D. Vance)가 쓴 [힐빌리의 애가: 위기에 처한 어느 가족과 문화에 관한 기록](왼쪽)과 트럼프.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빌리’로 상징되는 ‘남겨진 자들’의 선택은 ‘세련되고 잘난 도시 것’이 아니라 ‘광대 트럼프’였다.

붙박이 vs. 뜨내기 

그런 차에 약 1년 전에 읽고 쓴 책에 관한 서평이 떠올랐다. 영국 기자 데이비드 굿하트가 쓴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직후 2017년에 나온 이 책은 현재의 정치적 구도를 ‘섬웨어’와 ‘애니웨어’의 대립 구도를 통해 분석하는 책이다. 전반적으로 번역이 훌륭하나 사실 이 ‘섬웨어’‘애니웨어’가 영어라서 표현이 조금 어색해지는 감이 있어서 이 글에서는 ‘붙박이’ ‘뜨내기’로 표현하고자 한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7″]붙박이들(‘섬웨어’)[/dropcap]은 평생 거주지를 거의 이동하지 않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과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큰 사람들이다. 영국을 기준으로, 이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분명 있으나 현대 자유주의 하에 발전한 다양한 권리 개념을 상당히 포용하는 면모도 보여준다. 가족적 가치를 여전히 중시하며, 개인의 자아실현보다는 가정의 안정과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기도 하다. 붙박이들은 자신들이 붙박고 살고 있는 고향과 공동체의 풍경이 점차 낯설어지고 해체되어 가는 근래의 경향 그 자체를 우려하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7″]뜨내기들(‘애니웨어’)[/dropcap]은 이와 반대되는 삶의 지향점을 두고 있다. 고등교육을 통해 자유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가치관의 기본을 개인에 둔다. 인생은 개인으로서 발전의 연속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고정된 끈끈한 사회집단과 공동체, 지역이 딱히 없다. 끈끈하고 좁은 인간관계보다는 필요에 따라 형성된 느슨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갖고 있다.

경제적 기회, 사회적 기회를 따라 움직이기에 이들은 기회가 가장 풍부한 세계도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의 결합은, 개인이 온전히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 사회적, 문화적 제약에 대한 극렬한 거부반응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는 인종문제와 젠더문제에 대한 이들의 비상한 관심을 들 수가 있다.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이하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의 책 내용을 간단히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붙박이와 뜨내기의 차이는 ‘문화적 가치관의 차이’ 

1장과 2장에서 굿하트는 뜨내기와 붙박이가 어떤 집단인지, 또 이들이 1970년대 이후에 어떻게 갈라지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두 집단을 가르는 핵심적인 차이는 경제나 계급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관의 차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소득이 다소 높더라도, 붙박이로서 살아오고 그 삶에 의미를 느낀다면 그는 붙박이다. 소득이 다소 낮더라도, 뜨내기로서 정체성이 강하고 그 정책에 지지를 표한다면 당연히 그는 뜨내기다.

2. 포퓰리즘은 왜 일어났는가 

3장부터 8장까지는 이 분석틀을 갖고 영국, 유럽, 나아가 서구 세계 전체의 정치적 현안을 조금씩이나마 짚어본다. 3장은 2017년 기준으로 서구를 뒤흔들었던 포퓰리즘의 물결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본다. 핵심적 원인은 당연히 기존 서구 사회의 양대 정당이 중산층 편향적으로 돌아서면서, 지지할 정치세력을 잃은 붙박이들이 장외 선수들을 기존 체제로 소환한 데 있다.

한편 이 흐름에 전통 보수 정당은 그래도 세를 유지한 반면, 중도 좌파 정당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은 데서 이 문제가 전통적인 계급 갈등보다는 정체성 문제가 본질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퓰리즘 좌파 정당은 그리스나 스페인처럼 경제적 문제가 정말 심각한 곳에서나 인기를 얻은 반면, 대부분 국가에서는 포퓰리즘 우파 정당들이 중도 좌파 정당들의 지지세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의 세계화

3. “여전히 ‘민족국가’가 가장 적절한 협력 단위다!” 

4장과 5장은 주권과 국민국가 문제, 이주 문제를 다룬다. 이 두 문제는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다. 굿하트는 영국이 유럽연합에 너무 성급히 주권국가로서 권력을 이양했고, 붙박이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뜨내기들 위주의 유럽연합이 되돌리기 힘들어진 부주의한 정책들을 추진한 것을 비판한다. 유로와 유럽 재정문제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주 문제였다. 영국 사회가 점점 고령화되고, 젊은 인구가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영국의 전통 산업은 새로운 인력 수요처로서 폴란드부터 루마니아에 이르는 동유럽에 눈을 돌렸다. 이에 관해서 정부가 분명 이주의 흐름을 통제할 정책 여력이 있었음에도, 노동당 정부는 모두를 위한 영국을 만든다는 이상에 사로잡혀 이주 흐름을 전혀 통제하려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동유럽이나 인도, 자메이카계 디아스포라가 영국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이는 명백히 영국의 사회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붙박이들의 우려에 불을 지핌으로써 향후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굿하트는 국민국가는 여전히 가장 적절한 협력 단위이며, 민족주의로 대변되는 공통의 정서가 없이 사회가 건전하게 유지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즉, 현재 영국의 인구 구성은 뜨내기들 감성이 과잉대변된 데서 비롯된 정책 실패 결과물이다.

영국 도시

4. 세계화된 뜨내기들과 ‘야망 없는 청년들’의 문제  

6장과 7장은 경제적 이슈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화와 기술혁명이 진행되면서, 영국의 제조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붙박이 중산층들을 위해 제공되던 안정적인 중간 소득 일자리가 지역에서 사라져갔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은 변화 속도를 조절하기보다는 변화를 부채질하는 정책을 취했다. 영국에서는 기업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기 쉬웠고, 그 결과 사양산업의 노동자들은 빠르게 정리해고 되었다. 이 같은 경제적 유동성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서 런던의 경쟁력과 맞물려 런던을 중심으로 뭉친 뜨내기들에게 큰 번영을 안겨주었다.

이런 경향은 바로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론과 정책 우선순위가 뜨내기들의 지향점에 초점이 맞추어지다보니, 붙박이에게 필요한 정책들은 논의조차 안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영국에서 직업훈련학교가 종합대학교로 변하고, 대학 진학율이 대거 오른 지난 몇십 년의 변화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고등교육은 세계화된 뜨내기들을 양성하는 가장 좋은 기관이다. 특히 영국처럼 지방의 수재들이 런던으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는 나라들이라면, 지방의 붙박이 출신 청년들도 조만간 또래집단의 영향으로 뜨내기처럼 변하곤 한다.

문제는 이런 무리한 고등교육 팽창이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1. 대학에 가지 않는 청소년과 청년은 논의에서 배제된 정책들이었다.
  2. 관성에 따라 대학을 늘리는 바람에, 인문계의 잉여전공들이 크게 늘어나 산업 현장의 요구와 미스매칭 현상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이것은 부모의 지원을 받아 명문대에 가 세계적 감각을 기르고 유수의 런던 기업에 취업할 이들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되었지만, 그런 ‘야망’이 없는 다수 청년들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영국 브렉시트

5. ‘자아실현’과 ‘기회 평등’에 열광하는 뜨내기들의 세계관 

7장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능력주의와 계층이동 문제에 대한 뜨내기들의 세계관을 논한다. 뜨내기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아실현, 기회의 평등에 따른 성취에 열광한다. 따라서 계층이동성과 사회적 유동성을 찬양하며, ‘개천에서 더 많은 용을 내보내는 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굿하트는 이에 어느 정도 비판적이다. 먼저, 이 같은 정서는 딱히 용이 되고 싶지 않고, 지역 사회에서 단조로운 일상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몰곤 한다. 과연 모두가 그런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지 먼저 질문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영국의 계층이동성에서 중요한 건 전체 인구의 계층이동성이 아니다. 상층계급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녀들이 부모의 지위를 이어받도록 바닥을 받쳐주는 반면 하층계급은 가족이 해체되고 직장을 잃는 가운데 빈곤의 덫에 계속 갇히게 되는 구체적 현실이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한 번 상층계급으로 떠오르면 그 다음 세대에서 하층계급으로 떠밀리기는 어려운 반면, 상층계급을 위한 양질의 고소득 일자리는 그만큼 빠르게 증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엘리트 과잉생산 문제가 최근 영국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보았을 때, 용이 되고자 하는 야심 있는 이들을 북돋아주되 그렇지 않은 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몰지 않도록 능력주의와 계층이동 정서는 조심스럽게 조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굿하트의 주장이다.

자아실현과 기회 평등의 이면에는 '무한 경쟁'이 도사리고 있다.
자아실현과 기회 평등의 이면에는 ‘무한 경쟁’이 도사리고 있다.

6. 젠더와 가정의 문제 

8장은 젠더와 가정에 관한 문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굿하트는 개인적 성취를 중시하는 뜨내기들의 가치관이 그 가치관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무작정 강요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뜨내기들은 여성이 일터에서 더 높은 성취를 이루고 남성과 공정한 조건에서 경쟁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가정, 특히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커리어를 방해하는 일을 최대한 방지하고자 다양한 정책을 입안해왔다.

하지만 굿하트는 이 정책들이 ‘남성 부양자를 두고 가정에 집중하고 싶은’ 또다른 여성들의 욕망은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정책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산업구조의 재편(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과 맞물려, 일에서 의미를 찾고 가정을 부양하는 책임감을 원하는 붙박이 남성들은 실직과 우울증, 알콜 중독을,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굳이 직장에 의미를 두지 않는 붙박이 여성들에게는 과중한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다는 것이다.

성취 지향의 여성상을 정책 우선 목표로 삼는 건 과연 올바른가.
성취 지향의 여성상만을 정책 지원의 우선 대상으로 삼는 건 과연 올바른가.

굿하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두 부모가 안정적으로 자녀를 기르는 것에만 지원금을 덜 보내주는 뜨내기들의 정책 선호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연구 결과는 이미 두 부모가 한 부모보다 양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가족 형태’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 아래 ‘일반적인’ 두 부모 가정이 맺어지도록 장려하는 정책은 거의 고려되지 않아왔다.

이것은 현재 영국에서 늘어나고 있는 비혼 출산, 한부모 자녀들의 정서와 발달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 피해자들은 상당수 붙박이들이었다. 왜냐면 중산층과 상류층에 걸쳐 있는 뜨내기들이 역설적으로 결혼과 가족에 있어서는 가장 보수적으로 행동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는 중산층 이상의 뜨내기 여성들의 정서와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여성들의 요구(주로 붙박이들의 요구)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굿하트의 주장이다.

7. 붙박이와 뜨내기의 균형과 공존 

9장에서는 이상의 논의를 종합한 뒤, 현재 영국에서는 붙박이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수용되고 있으며, 특히 최근 인구통계학적 변화의 결과두 집단 사이에 새로운 균형이 정립될 수 있을 가능성을 논한다.

서구 사회에서 ‘뜨내기 정서’는 기본적으로 68 혁명 즈음에 베이비붐 세대와 함께 형성되었다. 이 정서에 기초한 정책들이 지금까지 이주와 가족과 교육에 걸친 수많은 사회 정책들을 결정지었으며, 그 성취와 부작용을 우리는 모두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최근 등장한 Z세대를 비롯하여 젊은 세대는, 다양한 사회적 권리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지만, 동시에 68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과도한 일탈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다소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굿하트는 이 둘이 영원히 화해하지 못하고 큰 충돌로 끝나는 부정적인 시나리오도 가능성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다소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며 뜨내기들로 하여금 붙박이들을 좀더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뜨내기와 붙박이는 서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뜨내기와 붙박이는 서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괜찮은 포퓰리즘 입문서 

이 책의 결론이 제시하는 과도한 낙관주의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포퓰리즘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 협력 기제로서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의 순기능
  • 이주 통제의 필요성
  • 제조업의 쇠퇴와 서비스업으로의 재편
  • 중간소득 일자리의 종말과 남성 부양자의 쇠퇴
  • 여성의 부상 등

현대 서구 사회 포퓰리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들을 균형잡힌 시각에서 서술해준다. 결국, 핵심 메시지는 ‘그들(‘붙박이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제발 좀 이해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같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아니냐’는 것이고.

전반적 내용이 익숙해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은 수 있는 기회는 아니었지만, 이 문제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괜찮은 입문서가 될 수 있다. 다만 영국과 서유럽의 전반적인 맥락을 알아야 좀 더 쉽게 책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의외로 한국과 영국은 ‘닮은 꼴’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미에서 자주 묘사되는 영국 사정이 은근 한국과 비슷해서 놀랐다. 모두가 ‘개돼지’인 한국과 철저한 계층 사회인 영국은 지울 수 없는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긴 하다), 책을 읽다보니 비슷한 점이 눈에 자주 밟힌다.

런던의 엄청난 팽창과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단일 거대도시의 위상은 우리의 서울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특히 고향을 떠나 런던의 기숙학교로 공부하러 가 뜨내기 세계관의 세례를 받는 수많은 지방 학생들의 이야기는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와 고향과 점점 연이 옅어지며, 고향 사람들과 대화의 공감대를 상실해가는 내 또래 지방 출신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써놓은 것만 같았다. 거기에 종합대학교의 무분별한 팽창으로 벌어진 인문계 과잉 공급대학 진학 안 하는 청소년과 청년이 논의에서 배제된다는 것도 어찌나 한국과 똑같던지.

영국의 모습을 의외로 한국과 무척 닮아 있다.
의외로 영국과 한국은 닮은 꼴이다.

그래도 5장에서 묘사하는 런던의 혼란스러운 모습이라든가(굿하트에 따르면 런던은 이미 이주민에게 인구학적 주도권을 넘겨주고 있으며 이 때문에 주거지와 민족집단 별로 극단적으로 분열된 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이미 극단화될 대로 극단화되어 붙박이들을 같은 국민으로 생각이라도 하는지 의심스러운 영국 뜨내기들의 정서를 보다보면 아직 한국이 이 수준까지는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시간문제라고 생각하며, 굿하트가 제시하는 두 집단 간의 새로운 균형점 같은 건 근시일내에 보기 힘들 것이라고 여기긴 하지만 말이다.

책을 덮고 나서 ‘붙박이’로 태어나 ‘뜨내기’ 세계관의 세례를 받고, 다시 붙박이의 세상으로 돌아와 내 뿌리를 재발견하는 과정에 관해 써보고 싶어졌다. 사실 옛날부터 써보려고 한 주제기는 했다. 바로 이 과정이 내 자아와 사회에 대한 관념을 정립하는 과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그래도 좀 더 잘 정돈된 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든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책과 엮어서 나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남겨볼 수 있으면 한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