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2020년 8월부터 태국에서는 수도 방콕을 중심으로 시위가 한창이다. 정부는 코로나 확산을 우려하며 시위를 진압하려 했지만, 시위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거센 기세로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태국에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위가 불타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려면 먼저, 태국 정치의 뿌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니 빠르게 근현대사를 훑어보도록 하자. (필자) [/box]
19세기 제국주의 시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동남아시아 전체를 식민화하는 와중에 태국은 홀로 독립을 지키고 자체적인 근대화를 진행했다.
자체적인 근대화와 민주화
이는 라마 5세라는 걸출한 군주의 역량, 영국과 프랑스가 지정학적 완충지대를 만들고자 했던 의도 등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전통 엘리트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주도한 덕택에, 동남아시아의 토착 권력이 유럽 세력에 의해 해체되는 동안 태국에서는 왕실의 강력한 권위와 역사적 정당성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1932년 군부가 왕실로부터 권력을 상당 부분 앗아가면서 왕실의 권력 독점은 흔들렸지만, 여전히 정치 권력은 군부와 왕실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다.
태국은 제2차세계대전 와중에 일본의 편에 섰으나, 운 좋게도 전후 처리를 피해갈 수 있었다. 오히려 미소 냉전이 시작되면서 태국은 동남아의 반공 전초기지, 베트남 전쟁 배후기지, 일본 제조업의 하위 협력 파트너 등의 위상을 획득하며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수도 방콕을 중심으로 중산층이 성장했다.
이 중산층들은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여 군부를 압박했고, 마침내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마저 민주화를 지지함에 따라 태국에도 드디어 민주주의가 들어서게 된다.
민주화 이후, ‘탁신’의 등장과 쿠데타
그러나 민주화 직후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태국을 강타하면서 상황이 빠르게 변했다. 민주화를 주도한 태국 민주당의 권위가 급속히 약화된 것이다. 대신 이 무렵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자 ‘정치권 아웃사이더’인 탁신 친나왓(이하 ‘탁신’)이 부상하면서 태국 정치는 새로운 장에 접어들게 된다.
탁신은 그간 태국 정치에서 유령처럼 취급 받던 북부 이싼 지방의 빈농들을 비롯한 온갖 대중들을 동원하여 2001년 정권을 교체했다. 본인부터 탁월한 수완가였고, 마침 세계경제가 호황을 맞이하는 좋은 타이밍까지 겹쳐 태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했다.
하지만 방콕 중심의 정치 주류에게 탁신의 부상은 아주 못마땅하게 다가왔다. 그들은 탁신의 포퓰리즘 정책이 나라를 망칠 것이고 자신들이 이권도 침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 탁신은 그의 정치 권력을 자신 족벌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사유화하려는 행보를 많이 보였고, 이는 방콕 중산층과 기업인들의 분개를 샀다.
그 결과 2006년 군부 쿠데타로 탁신이 축출되었고, 과거 군부와 싸웠던 방콕 중산층들은 쿠데타를 환영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푸미폰 국왕도 쿠데타에 지지의사를 표하면서 판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2006년 이후, 친’탁’ vs. 반’탁’
그러나 쿠데타로 탁신은 더더욱 신화적 존재가 되었고, 2006년 이후 태국 정치는 친탁(태국애국당)과 반탁(태국민주당+군부+왕실)의 대결장이 됐다. 탁신이 그동안 없는 존재처럼 여겨진 자신들의 목소리를 최초로 정치에 반영시켜줬다고 믿는 북부 빈농이 주축이 되어 쿠데타에 반대하는 ‘레드셔츠’ 운동 조직되었다.
친탁파는 머릿수를 통해 이후 선거에서도 붙었다 하면 승리를 거머쥐었고, 이제는 반탁의 기치 아래 완전히 동맹이 된 군부와 방콕 중산층은 옐로셔츠 운동을 조직해 친탁파에 맞섰다. 2010년 이런 충돌이 격화되어 방콕에서 군에 의해 친탁파 시위대 91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친탁파의 기세는 다시금 불이 붙었다. 안 그래도 2008년 대침체의 여파가 이어지는 와중에 일어난 정치 혼란으로 태국 경제는 계속해서 부진을 면치 못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아피싯 웨차치아 총리가 이끌던 민주당 정권은 2011년 선거에서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에 의해 대패하면서 5년 만에 권좌를 넘겨준다.
그러나 이번엔 옐로셔츠로 대표되는 반탁신 세력이 이를 갈면서 속으로 분개를 삭이는 정반대 상황이 연출되었다. 결국, 2013년 잉락이 오빠인 탁신의 사면안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그 분노가 터져나와 반정부 시위가 다시 태국을 뒤엎었다. 이때도 시위 진압 과정에서 28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잉락 퇴진을 외치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14년 쿠데타, 쁘라윳 짠오차의 등장
정치적 혼란은 마침내 2014년 역시 푸미폰의 승인 하에 쿠데타가 또 일어나면서 정리되었다. 이 쿠데타의 주인공이 바로 2010년 레드셔츠 시위를 유혈 사태를 감수하면서까지 진압한 쁘라윳 짠오차였다. 그는 민정이양을 약속하며 총리에 올랐지만, 민정이양을 했을 때 친탁파가 복귀할 개연성이 아주 높았기에 약속한 민정 이양은 계속 미루며 국가 권력을 장악해갔다.
그러나 쁘라윳과 군부는 태국에 산재한 여러 문제를 힘으로 누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2006년 이래로 안정되지 않는 정치가 발목을 잡으며 태국 경제는 정체했다. 오히려 그 기간 태국이 ‘아랫것’으로 간주했던 베트남과 인도네시아가 무섭게 추격하면서 동남아시아의 경제 지형이 흔들렸다.
연이은 쿠데타와 정정 불안은 동남아시아의 가장 굳건한 친미 국가인 태국의 위상도 변했다. 쿠데타와 군부독재로 태국이 서방 세계의 눈초리를 받게 되자 군부는 권위주의 군부 독재에도 아랑곳 않는 중국과 친선 관계를 강화했다. 이는 마침 운남성을 거점으로 대륙부 동남아시아를 중국 경제권에 끌어들이려는 중국의 전략에 부합하는 결정이었다. 태국 군부 입장에서도 중국의 투자와 유커의 관광 소비는 구조 개혁 없이 경제난을 쉽게 넘길 수 있는 편한 대안이었다.
푸미폰의 죽음과 ‘망나니’ 후계자 그리고 ’19년 총선
한편 쁘라윳은 쿠데타 후 2년 만에 예정된 정치적 위기를 맞는데, 태국 주류의 든든한 보루나 다름 없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2016년 죽었기 때문이다. 푸미폰 국왕은 본인의 정치적 지향이 어쨌든 친탁신파에게도 존경받았던 태국의 국민적 구심점이었고, 탁신파가 계속 물러날 수밖에 없던 데에도 푸미폰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이런 푸미폰이 죽고 평범한 국왕이 후계를 이어도 반탁신파 입장에서는 위험한 상황인데, 하필이면 푸미폰의 후계자가 역사에 길이 남을 ‘망나니’인 마하 와찌랄롱꼰이었다는 데 있었다. 와찌랄롱꼰의 기행은 온갖 가십 뉴스로 이미 소개된 바 있다.
경제난과 푸미폰의 사망 등으로 아래에서 쌓여만 가는 불만을 계속 누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눈 가리고 아웅식이지만 민정이양이 차츰 이루어지게 되었다. 쁘라윳은 2016년 군부 주도 개헌을 통과시켰고, 2019년이 되었을 때야 선거를 열었다. 결과는 무승부.
탁신계 정당인 태국인당이 제1당을 차지했으나 과반을 얻지 못했고, 쁘라윳을 지지하는 공민역량당이 근소하게 제2당이 되었다. 색깔을 잃어버린 과거 집권당 민주당은 쪼그라든 대신에 1978년생 젊은 리더 타나톤 쯩룽르앙낏이 이끄는 신생 좌파정당인 미래전진당이 다크호스로 부상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우본 라따나 공주는 탁신계 정당의 총리 후보로 나서려고 했다가 후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코로나 상륙 이후, 태국의 혼란상
2019년 총선 이후 이런 위태로운 교착 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코로나가 태국에 상륙했다. 태국은 통계만 보면 코로나를 꽤 잘 막은 것으로 보인다. 확진자는 지금까지 3,5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리 방역에 성공적이었어도 국제 여행과 관광의 전면적 중단은 관광대국 태국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다. 실업자가 속출했고, 관광지 가게들이 줄줄이 폐업할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경제난 하에 현 총리와 군부에 대한 불만이 재점화만 기다리는 장작처럼 쌓여가는 가운데, 정치 스캔들이 연달아 터지기까지 했다.
- 새로운 다크호스 타나톤 쯩룽르앙낏의 부상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이는 미래전진당 해산 결정
- 태국 일반인은 코로나로 고통받는 와중에 애첩 20명을 데리고 독일에서 무사태평하게 지내는 마하 와찌랄롱꼰
- 코로나 경제난으로 다들 등허리가 휠 것 같은데 갑자기 중국에서 거액을 들여 잠수함 2척을 구매하기로 결정한 태국 군부
-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가 8년 전 음주운전으로 낸 뺑소니 사망사고에서 모든 혐의가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되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제대로 입증해보인 태국 검찰과 경찰
1020의 반란: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
이런 사건들이 태국인의 분노 포인트를 하나씩 자극해 8월을 기점으로 시위가 폭발했고 지금은 쁘라윳 퇴진은 물론이고, 태국에서 절대 금기시 왕실 개혁 내지 퇴진 요구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10대와 20대의 학생들이다.
이미 2014년 쿠데타로부터도 6년의 시간이 흘렀기에, 10년을 가까이 끌어온 탁신을 중심으로 한 대결 구도에서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것으로 보인다(추정). 이들은 기성세대가 품고 있었던 푸미폰 아둔야뎃에 신화적 존경심도 거의 희미하고, 자라서 보아온 왕이 마하 와찌랄롱꼰이기에 왕실에 대해서도 더 급진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태국 시위를 크게 키운 여러 스캔들만 보아도 시위를 이끄는 에너지는 결국 태국 사회에 자리한 불평등과 문화적 간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류사회(High society)를 의미하는 소위 “하이쏘”는 주로 방콕에 거주하고, 대개가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중국계 태국인이다. 레드불 가문인 유비디야 가문부터 그렇다.
탁신을 둘러싸고 형성된 태국 정치의 지리적 분리는 이 분리를 선명하게 반영한다. 태국의 1인당 GDP는 7천 달러지만, 방콕의 1인당 GDP는 1만 5천 달러가량으로 압도적으로 부유하다. 반탁신 경향이 강한 다른 지역은 태국 전국 평균에 근접한 5천 달러 선이다. 반면 친탁신 경향이 가장 강한 곳의 1인당 GDP는 대개 2천 달러, 심하면 그 아래일 정도로 가난하다.
북부 빈농들이 자신들과는 별세계에서 사는 것 같은 방콕 중산층과 왕실-군부 연합에 ‘한 방 먹여준’ 탁신을 보며 환호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역설적인 것은 탁신도, 타나톤도 모두 중국계라는 것이다.
남겨진 질문들
이번 시위의 향방을 예측하긴 어렵지만, 태국 정치가 기로에 선 것은 확실해보인다. 이런 질문들을 갖고 태국 시위를 지켜본다면 앞으로 전개될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 쁘라윳은 퇴진하고, 국왕 마하 와찌랄롱꼰의 거취도 무언가 변화를 겪게 될까? 아니면 라마 5세 대왕 이래로 흔들린 적 없는 태국 지배층의 굳건한 위치를 그저 다시 확인하게 될 뿐일까?
- 한때 민주화를 이끌었으나 탁신에 대한 증오로 군부를 지지해온 옐로셔츠와 태국 중산층들은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 그런데 시위 세력이 정권을 획득한다 하더라도 경제적 난국 속에서 태국을 분열시키는 저 거대한 격차와 간극을 통합할 수 있을까?
- 쁘라윳과 밀월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이나, 태국의 전통적 우방으로 태국 안에서 거대한 제조업 공급선을 갖고 있는 일본, 아세안에서 중국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미국은 어떻게 반응할까?
-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쁘라윳 총리와 우호관계를 구축해온 한국은 이후의 정국에 어떻게 반응하려 할까?
- 만약 쁘라윳이 이번에도 무력 투입으로 대규모 유혈진압을 감행한다면? (닉쿤도 무력진압은 안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