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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조선에서 차출된 화약 보병 200여 명이 북쪽 아무르 강으로 진입했다. 청 제국의 요청을 받아, 북방 변경을 위협하는 오랑캐들를 정벌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그 오랑캐들은 바로 머나먼 서쪽에서 온 러시아인들(‘나선’)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들은 그 옛날에 북방에서 마주치게 된 것일까?

몽골의 후예들: 화약제국, 러시아, 명과 청 

유라시아 대륙을 발 아래 두었던 몽골 제국의 패권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 채 금세 붕괴했지만,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남겼다. 하나는 유라시아 전역을 묶어내는 광대한 네트워크로 자리잡아 기술, 물자, 사람이 이동한 것이었고, 둘은 초원의 유목 세력의 영향을 받은 강력한 후계 국가들이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초기 근대 유라시아에서 아주 특징적인 국가 형태인 ‘화약제국’이 등장했다. 몽골 제국의 조직화 방식을 받아들인 강력한 군사 집단이 상업을 통해 축적한 부를 대포를 비롯한 화약 무기에 투자했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정치적 권위, 군사적 조직, 혁신적 기술을 결합한 이들은 정주세계(농경을 위주로 정착해 살아가는 세계)와 유목세계 양편에 걸쳐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은 오늘 날 터키, 이란, 인도의 전신이 되었다.

터키 이란
화약제국(오스만, 사파비, 무굴)의 후신인 터키, 이란, 인도

유사한 국가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공간에서도 형성되었다. 하나는 러시아 제국이었다. 북유럽과 중동을 잇는 수계 무역 네트워크로 성장한 키예프 공국은 초원의 칸들의 지배를 받으며 급격히 ‘아시아적’으로 변했다. 몽골과 튀르크의 언어, 문화, 관습이 러시아로 유입되어 강력한 공후들이 지배하는 러시아 전제 왕권의 특징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격은 모스크바 공국이었는데, 그들이 여전히 상업 도시국가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던 북쪽의 노브고로드를 멸망시킨 것은 러시아 역사의 이후 진로를 예시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형성되었다. 명 제국은 원 제국을 몰아내고 한족의 지배권을 확립한 국가로, 여러 면에서 몽골 통치의 안티테제를 추구했다. 주원장은 해금령을 내리고 자유로운 상업에 제약을 가했으며, 수도를 초원에서 멀리 떨어진 남경에 정함으로써 한족 정권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미 몽골 통치를 경험한 중국이 그 유산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는데, 이는 어쩌면 쿠빌라이를 롤 모델로 삼았을 영락제 때 극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는 정주세계와 초원세계 가운데에 있던 북경으로 다시 수도를 천도하였고, 바닷길을 열어 세계 제국으로서의 위엄을 다시 보이고자 하였다. 결정적으로 그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명의 가장 극심한 안보 위협이었던 오이라트(Oirat; 몽골 서부 부족) 몽골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몽골 지배의 경험은 중국 통치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각인되었던 것이다.

17세기에 흥기한 만주의 청 제국은 중앙 유라시아적 특질을 더욱 강하게 보이면서, 명 제국을 포함한 이전 중국 왕조와 한층 구분되었다. 청의 만주족들은 일찍부터 할하 몽골의 유력집안과 통혼하면서 그들과 혈연적, 정치적 유대관계를 쌓았다. 거기에, 몽골을 통해 들어온 중국과 몽골의 관념 체계는 만주인들로 하여금 천하의 통치 원리를 주재하는 강력한 지도자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거기에 그들은 모피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로 강력한 화약 무기를 갖추었고, 이를 중국, 나아가 내륙 아시아 정벌전에 적극 활용했다. 청 제국은 분명 중국을 정복하면서 중화제국의 통치원리와 가치, 문화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몽골에서 발전시킨 내륙 아시아 제국의 원리도 적극 수용함으로써 키메라의 제국(구범진)[footnote]구범진은 그의 책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2012)에서 만주, 몽골, 한인의 ‘유전자’가 하나로 융화된 청나라를 사자, 염소, 뱀으로 이뤄진 전설의 동물 ‘키메라’에 비유했다.(편집자) [/footnote] 을 만들어나갔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괴물 키메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괴물 키메라. 구범진은 그의 책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2012)에서 만주, 몽골, 한인의 '유전자'가 하나로 융화된 청나라를 키메라에 비유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으로 이루어진 괴물 키메라. 구범진은 그의 책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2012)에서 만주, 몽골, 한인의 ‘유전자’가 하나로 융화된 청나라를 키메라에 비유했다.

몽골제국의 후계로서의 조선

개인적으로는, 오스만, 러시아, 청보다 이 같은 면모가 부족하긴 해도 조선왕조 또한 몽골 제국의 간접적 후계 국가로 간주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조선의 전신인 고려는 명백히 몽골 제국 질서에 속해있던 국가로서, 대원대몽골을 통해 세계를 인식했다. 원 간섭기 기실 고려의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변방의 고려왕보다는 대도 궁정의 왕공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에 당연하게도 이 시기 몽골의 유라시아 네트워크는 명백히 한반도까지 뻗어나갔으며, 신생 조선은 그 정보와 인적, 물적자원을 적극 활용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엘리트도 중앙 유라시아 세계에 속한 이들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그 이름이 ‘울루스 부카’였고, 건국 공신 이지란의 이름은 ‘두란테무르’였다. 당시 한반도 북부 지역은 고정된 정체성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어 있던 ‘내지’ 혹은 ‘본토’가 아니었다. 그 대신 중첩되는 정체성이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선택되는, 혼란스럽지만 개방되어 있던 변경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고려계, 여진계, 몽골계가 뒤섞여 살았으며, 이 모든 민족을 통할하는 몽골 제국의 권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1335-1408, 왼쪽)와 그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보다 원나라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고,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개국공신 이지란(1331-1402)은 여진족 출신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1335-1408, 왼쪽)와 그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보다 원나라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고,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개국공신 이지란(1331-1402, 오른쪽)은 여진족 출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함경도라는 변경에서 형성된 강력한 무력집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였을 때 과연 그들이 세운 국가가 몽골 제국의 영향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웠을지는 상당히 의심된다. 조선 초기에 계속하여 문제가 되었던 북방 여진 문제가 신속히 평정될 수 있던 이유도 조선 군사 엘리트가 중앙 유라시아 정치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더하여 조선 초에 급격히 발전한 천문학이 무슬림들에게 상당히 빚진 바가 크고, 위대한 발명가 장영실 역시 부친이 원제국 사람이며, 한글에서 찾을 수 있다는 파스파 문자의 영향도 그렇다. 적어도 조선 초만 하더라도 그 국가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뿐이지 다른 유라시아의 제국들처럼 ‘팍스 몽골리카’의 폐허에서 건국된 것이다.

몽골로부터의 단절과 연속

물론 그 성격이 언제까지 유지되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세계 각지에서 17세기가 되고, 몽골의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 각 국가들은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나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자신이 정복한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원리, 문화, 인적자원을 흡수하여 새로운 종류의 국가 제도를 정착시켰다.

러시아도 여전히 내륙아시아적 요소가 많았지만, 유럽 국제 시스템에 점차 끌려들어가면서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타타르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지우고자 했으며, 표트르 대제가 즉위하면서 그 움직임은 가속화되었다. 사파비 페르시아무굴 인도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다만 이 두 제국은 18세기에 다시 초원 세력에 의해 국가가 붕괴하면서 조금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반면 만주에서 이제 막 흥기하여 국가 체제를 건설하고 있던 청 제국은 다른 제국에 비해 더 오랫동안 중앙 유라시아적 요소를 간직했다. 그들은 심지어 강건성세(康乾盛世; 청나라 최전성기, 제4대 황제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평정한 1681년~제6대 황제 건륭제 치세 중반까지의 기간)의 서북 원정이 끝난 뒤에는 자신들이 중화세계뿐 아니라, 그것과 구별되는 초원세계의 원리를 주재하는 통치자임을 천하에 각인시켰다. 이는 21세기에도 카자흐스탄부터 몽골과 티베트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주변국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청나라 최전성기인 '강건성세' 이룬 황제들. 왼쪽부터 제3대 강희제(재위: 1662~1722), 제4대 옹정제(재위: 1722~1735), 제5대 건륭제(재위: 1735~1796)
청나라 최전성기인 ‘강건성세’ 이룬 황제들. 왼쪽부터 제3대 강희제(재위: 1662~1722), 제4대 옹정제(재위: 1722~1735), 제5대 건륭제(재위: 1735~1796)

조선은 청과는 반대의 길을 택했던 것 같다. 4군 6진이 안정화되고 한반도가 하나의 자족적 세계가 되면서, 초원세계와의 교류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한반도는 그저 삼한 이래로 중화제국과 천자의 덕을 받아 잘 교화된 농민들의 땅이었지, 야만적이고 거친 초원과 삼림 전사들의 땅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언제나 중앙 유라시아 세계와 접해있었고, 그 대외적 위기는 항상 중화세계와 초원세계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 흉노와 한제국의 충돌이 고조선의 멸망을 불러왔고, 돌궐과 당제국의 쟁패는 고구려에게 힘든 외교적 선택을 강요했다. 고려에게 작용한 요, 금의 위협 역시 마찬가지였고, 몽골은 한반도를 아예 자신들의 질서로 편입시켰다.

따라서 명 제국의 안보 우산에 기대고 있다 하더라도, 조선은 언제고 다시 중앙 유라시아의 역학 관계가 혼란스러워졌을 때 그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갈 수 있던 것이다. 이는 만주 국가가 강성해지고 그들이 정주 세계를 위협하면서 현실로 되었다.

17세기 소빙기와 러시아의 부상

직접적으로 조선의 북방을 다시 열어젖힌 것은 17세기 내내 지속되고 있던 소빙하기였다. 13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소빙기는 화산활동의 증가와 아메리카 원주민 절멸로 17세기에는 더욱 맹렬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비상한 추위 때문에 유라시아 각지에서 모피 수요가 크게 늘었는데, 만주인들은 이를 명 제국에 판매하여 큰 이득을 남기고 국가 건설의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채굴된 은은 그렇게 명 제국으로 들어가 만주에서 모피와 교환되었고, 만주인들은 그 은으로 최신 화약무기를 구매해 또 하나의 ‘화약 제국’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소빙기는 아마 만주에서의 식량난도 초래했었을 것이고, 이는 만주가 조선을 침공하게 만든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거기에 홍타이지(숭덕제; 청 제국의 창업군주; 1592~1643)는 자신들이 중국과 동등한 ‘제국’으로서 속방을 거느리는 것을 과시할 필요도 있었다. 200년 간 잊고 살 수 있던, 아니 어쩌면 망각한 과거일 수 있는 중앙 유라시아가 다시금 한반도에 엄습한 순간이었다.

최근 1,000년간의 기후 변화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역사 속에서 살펴본 지구의 기후변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23016&cid=47340&categoryId=47340
최근 1,000년간의 기후 변화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역사 속에서 살펴본 지구의 기후변화’)

더욱 복잡해진 것은 이제 만주족의 청 제국 이외에 몽골 제국의 다른 후계 국가가 동아시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청 제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몽골은 아니었다. 그들은 역시 서쪽에서 모피를 찾고자 다가온 러시아인들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초원 세계의 ‘내부자’로서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 1240년대~1502년의 몽골인 지배층, 주치는 칭기스 칸의 장남이고, 울루스는 주치 씨족의 영지를 뜻함)가 분열하고 남긴 여타 칸국들을 정벌하고 통합했다. 시베리아 원주민을 ‘총, 균, 쇠’로 복속시킨 러시아 코사크 탐험대는 요충지마다 요새를 세우고 인근 부족들에게 식량을 공급 받아 항구적 주둔을 시작했다. 이 요새들 중 일부는 오늘날 수십만명이 사는 도시로 성장했다.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는 1649년 이곳을 탐험한 코사크족 대장의 이름(옐로페이 하바로프 바르로비치)에서 유래했다. 현재 이 지역 인구는 150만 명 정도이고, 중심부인 하바로프스크 인구는 69만 명 정도다. (참고: 박노보, 코사크의 시베리아 탐험과 하바로프스크)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obopark&logNo=4004977880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는 1649년 이곳을 탐험한 코사크족 대장의 이름(옐로페이 하바로프 바르로비치)에서 유래했다. 현재 이 지역 인구는 150만 명 정도이고, 중심부인 하바로프스크 인구는 69만 명 정도다. (참고: 박노보, 코사크의 시베리아 탐험과 하바로프스크)

문제는 러시아인들이 동쪽으로 향하면서 청의 북방 변경을 침범하기 시작한 데 있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서 명확한 경계를 짓는 국가는 중국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통치자들은 그런 경계짓기에 무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면서, 만주 국가에 조공을 받치고 신속한 부족들의 통제권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 제국은 협상을 통해 경계를 획정하고, 경계와 무관히 살던 민족들을 서로의 통치권력 하에 복속시키기 시작했다.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1727년의 캬흐타 조약이 그것이었다.

나선정벌과 그레이트 게임의 여명

물론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이 있기 전에는 당연히 무력충돌이 존재했다. 러시아인들은 아무르 유역에 요새를 설치하고 활동을 개시했는데, 청은 이를 북방 변경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그런 와중에 청은 속방인 조선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병시켜 협조하도록 요청했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나선정벌’(羅禪征伐; 효종 재임기인 1654년 4월 1차, 1658년 6월 2차, 여기서 ‘나선’은 러시아인을 의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선정벌은 사실 거창한 이름에 비해 규모는 아주 작았다. 정벌보다는 그저 국경 분규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양측은 모두 2천 명가량의 군사만을 투입했고, 러시아는 아예 중앙 정부의 통제와 거리가 있던 탐험대에 가까웠다. 투입된 조선군도 200~3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효종이 북벌을 생각하고 화약보병을 만들었고 이를 유럽군에 맞서 실전투입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큰 의의를 찾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나선정벌은 점차 세계사적 의미가 뚜렷해지고 있던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러시아와 청이라는, 강력한 전제 권력 하에 화약무기를 갖고 움직이는 몽골 제국의 후계 국가들이 내륙 아시아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는 유목민의 침입과 대응이라는, 지난 수천년 간 계속되어 온 유라시아 문명사의 패턴에 종지부를 찍는 일대 대사건이었으며, 그간 군사적 우위를 통해 독자적 세계를 꾸려오던 유목민에게는 정체성의 근간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 획정된 국경, 양대 제국과 그 사이 모든 민족의 역사적 기억과 정체성 문제는 이후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격렬하게 타올랐으며, 그 유산은 지금 21세기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작은 규모긴 했어도, 나선정벌은 조선 또한 그런 세계사적 흐름에서 무관할 수 없음을 미리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졌음에도 조선 역시 몽골 제국의 후계국가였다. 거기에 조선군도 이미 동아시아에서도 보편화된 화약무기로 무장하여 출병했다. 나선정벌은 그렇기에 몽골 제국의 세 후계 국가가 화약무기로 무장한 채 조우했다는 점에서 아주 전형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유라시아 세계에서, 주변부였지만 분명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은 효종 5년(1654) 함경북도 병마우후 변급을 영병장(대장)으로 조총군 100명과 고수 및 기수 등 152명을 출정시켜 쑹화강 일대에서 러시아군과 싸워 사상자가 전혀 없는 완승을 거두었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430023006#csidx8bed81bdd394a40974eadd8b6261e90
“조선은 효종 5년(1654) 함경북도 병마우후 변급을 영병장(대장)으로 조총군 100명과 고수 및 기수 등 152명을 출정시켜 쑹화강 일대에서 러시아군과 싸워 사상자가 전혀 없는 완승을 거두었다.” [캡션 및 이미지 출처: 서울신문, 나선정벌과 조총군, 서동철, 2016. 4. 29. 중에서)
나선정벌은 조선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는 청 제국이 너무나 비대칭적으로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원길이 러시아인들과 중국인들에 의해 메꿔지고 있었지만 유라시아는 여전히 광대했고, 시베리아와 몽골 초원은 풍요와는 거리가 먼 극지였다. 러시아인들은 중국과 차, 모피, 비단 등을 거래하는 국경무역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여 청에 상당한 양보를 해주게 된다.

청은 초원의 배후를 차단해준 러시아의 지원 덕으로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를 멸망, 아니 멸족시켰는데, 중국사, 나아가 세계사의 한 장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몽골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복으로 발생한 후계 국가들에 의해 끝내 멸망하고 복속되는 비극적인 역사였다. 이후 약 100여년 간 북방 국경은 상대적인 안정을 구가하게 되니, 조선 입장에서 더 신경 쓸 일이 없던 것이다.

그러나 1858년이 되자, 세상은 다시 뒤집히게 된다.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 균형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향하는 출구를 얻고 나아가 제국의 심장에서 바로 연결되는 철도를 부설하면서 조선은 다시 지정학적 소용돌이에 원치 않게 빨려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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