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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읽었다. 영국 출신의 고전학자로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의하는 에밀리 윌슨(Emily Wilson) 교수의 번역본이다. 거의 모든 언론이 칭찬했고, 뉴욕타임스는 ‘여성’ 학자가 영어로 번역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일요판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커버스토리로 윌슨 교수를 소개하기까지 했다.

'여성'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오딧세이]를 영어로 번역해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커버스토리로 소개된 에밀리 윌슨 교수 https://www.nytimes.com/2017/11/02/magazine/the-first-woman-to-translate-the-odyssey-into-english.html
‘여성’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오디세이]를 영어로 번역해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커버스토리로 소개된 에밀리 윌슨 교수 
언론의 상찬 덕택인지 윌슨 교수의 [오디세이]는 아마존닷컴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현대 소설도, 가볍게 읽히는 로맨스나 범죄 소설도 아닌 고전이 베스트셀러가 되다니, 놀라운 현상이라 할 만하다. 굳이 견준다면 199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시머스 히니가 1999년 번역해 돌연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던 ‘베오울프’(Beowulf)와 비슷하달까? (최근 스티븐 미첼의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이번 [오디세이] 완독은, 내게 개인적으로 유독 더 기억할 만한 ‘사건’이다. 열 살 먹은 막내아들 성준이와 함께 읽었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밤마다, 대개는 한 챕터씩 잠자리에서 읽어주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체 어떤 극성 부모가 어린이용 요약본도 아닌 완역본을 열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읽어준단 말인가? 무슨 영재 교육도 아니고…라고 핀잔을 줄 법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은 성준이가 먼저 [오디세이]를 읽어달라고 청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해 살고 있습니다. – 편집자)

새 [오디세이] 번역본과의 인연은 문예지 [패리스 리뷰]에서 우연히 읽은 에밀리 윌슨 교수의 [오디세이] 추억담이다. 불과 여덟 살 때(!) 학교 연극으로 [오디세이]를 준비하고 공연한 이야기였다. 자신은 아테나를 연기하고 선생님에겐 오디세우스에게 눈을 잃고 마는 사이클롭스 역을 맡겼으며, 헬렌을 연기한 여동생은 자신보다 예뻤지만, 헬렌이 아무런 대사도 없는 역이었기 때문에 시샘할 일은 없었다는 대목에선 슬몃 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일종의 ‘맛보기’로 첨부된 1권의 내용도 퍽 신선했다. 무엇보다 쉽게 읽혔다. 아마존닷컴에서 책을 확인하는데, 어라,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전자책이 고작 3.22달러였다! 아마 전자책에 한해 ‘선주문 할인’ 이벤트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냉큼 ‘선주문(pre-order)’ 버튼을 눌렀다.

8월에 선주문한 전자책은 11월초 출간되자마자 킨들로 배달되었다. 값이 너무 싸서, 혹시나 엉뚱한 옛날 오디세이 번역본이 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윌슨 교수의 새 번역본이 맞았다. 뜻밖의 횡재였다. 저작권이 소멸된 고전 중에는 새로 번역된 유료 종이책 버전과 ‘구텐베르그’ 같은 비영리 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화 된 무료 – 또는 무료에 가까운 – 전자책 버전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킨들로 배달된 에밀리 윌슨 교수가 번역한 [오딧세이]
킨들로 배달된 에밀리 윌슨 교수가 번역한 [오디세이]

“오디세이를 읽어주세요”

어느날 밤, 서사시인지라 소리를 내서 읽으면 어떨까 싶어, 혼자 웅얼웅얼 낭독을 했다. 10여분쯤 낭독하다 멈췄는데, 옆에 누워 다른 책을 보던 성준이가 대뜸 “계속 읽어주세요, 아빠.”라고 청하는게 아닌가?

잠자기 전 잠깐씩 소리내어 책을 읽는 게 거의 습관이다시피 됐지만, 그 때마다 성준이는 “아빠, 소리내서 읽는 걸 멈춰주세요. 내 책을 읽을 수가 없다구요.”이라며 다리를 걸곤 했다. 그러면 나는 “네 방에 가, 여긴 엄마와 아빠 방이야.”이라고 타박했고… 그런데 그 날은 어쩐 일로 계속 읽으라는 거다.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그 이야기가 좋아요. 계속 읽어주세요, 아빠.”

거기에 쓰인 단어가 좋았을까? 문장이 좋았을까? 아니면 윌슨 교수의 번역본이 가진 리듬감이 좋았을까? 어쨌든 성준이는 듣기 좋다며, 계속 읽어달라고 주문했다. 그게 한 달쯤 전이다. 11월 말부터 거의 매일 밤마다 한 권(장)씩 읽어주기 시작했다.

오디세이 – 집으로 가는 먼 길

[오디세이]는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즘 책으로 따진다면 총 24장인 셈이다. 하지만 [오디세이]의 각 장은 챕터가 아니라 북(book)이다. 북 1, 북 2, 북 3, 하는 식이다. 10년에 걸친 길고 지루한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살아남은 그리스의 군대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만은 해신 포세이돈의 아들인 사이클롭스를 눈 멀게 한 죄로 고향에 가지 못하고 바다와 섬을 떠돈다. 그게 다시 10년이다. [오디세이]는 그 10년 간의 긴 여정,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의 곤고한 모험담이다. 아니, 이런 요약은 정확하지 않다. [오디세이]의 후반부는 이타카에 닿은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년이다. [일리어드]를 통해 불멸의 전쟁이 된 트로이 전쟁만 10년, 전쟁이 끝난 뒤 온갖 간난신고 끝에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가 아내, 아들과 해후하기까지 다시 10년. [오디세이]는 후반의 10년, 멀고 먼 귀향길의 사연을 노래한다.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끝내 고향에 돌아기 못한 채 바다와 타지를 떠돌지만, 그를 옹호하고 감싸주는 아테나 여신 덕택에 오디세우스는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Athena appearing to Odysseu
Athena appearing to Odysseu

하지만 그와 함께했던 부하 장병은 하나둘 비명횡사하고, 결국 단 한 명도 고향에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부하를 모두 잃은 오디세우스는 칼립소 여신의 동굴에서 다시 몇 년을 허비한다. 칼립소와 동거하며 영생의 유혹을 받지만 그럼에도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언덕 아래 집의 굴뚝에서 평화롭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싶은 열망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

[오디세이]의 첫 네 장은, 그런 오디세우스의 불우한 운명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오디세우스 자신은 5장에서야 등장한다. 포세이돈이 장기 출타한 틈을 타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오디세우스의 탈출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에르메스는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를 놓아주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전달한다. 오디세우스는 다시 바다로 나선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그게 쉽게 성취될 리 만무하다. 포세이돈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다시 파이아케스인들 (Phaeacians)이 사는 스케리아 섬에 표류한다. (…)

우리 마음 속의 이타카

[오디세이]는 그 단어 자체가 길고 먼 여행이나 모험을 뜻하는 말로 정착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의심의 여지 없는 불멸의 고전이다. 남녀차별과 노예제는 이야기가 싹트던 시절의 관례이자 습속이었다. 종종 신의 외도나 경솔한 개입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은 일방적인 겁간으로 여겨지는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이] 안에는 시대와 시간의 장벽을 초월해 모든 인류에게 공명되는 인간적 본성과 미덕이 면면히 살아 있다. 모르는 것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상대에 대한 인간적 예의와 호의, 전우 동료 간의 의리, 부모자식 간의 사랑, 공정과 정의에 대한 믿음, 아내와 남편의 신뢰와 사랑 등등.

2700년 전의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아마도 계량할 수 없을 만큼 더 막대하게 넓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의 세계는 대체로 미지와 경이, 모험의 세계였다. 오디세우스와 그 동료들이 곳곳에서 마주친 높은 풍랑과 파도, 사이렌의 유혹, 괴물 등은, 그러한 미지와 경이의 은유일 것이다.

2700년 전의 시간 또한, 지금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당시의 20년은, 조금 과장하면 한 생애에 필적하는 긴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그 장구한 시간 동안, 오디세우스는 고향을 열망하며 방황하고, 페넬로페는 낮에는 베틀을 돌려 옷을 짓고, 밤에는 그렇게 지은 옷의 실을 다 풀어 시간을 끌면서 구애자들을 물리치며 남편을 기다린다.

이처럼 곡절 많은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은, 이야기의 원산지인 그리스의 문호 C. P. 카바피 (C. P. Cavafy)의 시 ‘이타카'(Ithaka)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되기도 했다. 유튜브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명배우 숀 코너리의 목소리로 낭송된 시도 있다.

 Edward Dodwell, "Port Bathy and Capital of Ithaca", 1821
Edward Dodwell, “Port Bathy and Capital of Ithaca”, 1821

[오디세이]의 민망한 대목들

밤마다 읽는 [오디세이]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 그저 호기심에 가득찬 어린 아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독서에 더 가까웠다. 자주, 성준이는 하루의 독서 분량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잠이 들곤 했다. 모든 에피소드가 다 재미난 것일 수는 없고, 더욱이 복잡다단한 그리스식 이름과 지명, 신들의 대화 등은 읽는 나조차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Red dawn’, ‘golden dawn’, ‘new dawn’ 식으로, 동틀녘의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은 하나같이 엇비슷했고, 배는 거의 예외없이 빠르고 날렵하고 검은 색이었다. 멋있고 품위 있는 외모는 하나같이 ‘godly’나 ‘god-like’였다. 번역자도 진작에 경고 아닌 경고를 하지만, 먼 옛날 음유시인이 리라(수금)를 켜며 신들의 시샘과 갈등, 그들을 대리한 영웅들의 전투와 모험담을 읊는 풍경을 상상해 보면, 그런 상투적 표현의 난무는 당연한 현상 같기도 하다.

차마 읽어주기 민망한 대목은 대충 건너뛰기도 했다. 상세한 묘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와 정사를 나눈다는 장면이나 페넬로페와 20년 만의 회포를 푸는 대목, 그리고 정체를 드러낸 영웅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며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내고, 아들 텔레마커스의 살해를 모의했던 구혼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장면, 그리고 페넬로페를 배신하고 구혼자들과 난교를 일삼았던 여성 노예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부분도, 곧이곧대로 읽어주기는 다소 난감했다.

Jan Brueghel the Elder,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1616
Jan Brueghel the Elder,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1616

한창 읽는 중에 성준이가 건너뛰어달라고 한 대목도 있었다. 세세한 요리와 음식 준비 장면, 그렇게 푸짐하게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만찬 장면이다. 그런 대목을 들으면 밤도 늦었는데 괜히 배도 고프고 간식을 먹고 싶어진다는 이유였다. 그럴듯했다. 앞에 언급한 중언부언의 표현들도, 종종 건너뛰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논외로 친다면, 책으로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를 제대로 읽은 적은 아마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물론 태극출판사나 계몽사 같은 데서 나온 일본어 중역 요약본이었다. 단순히 사건의 줄거리만 살렸으니 실제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생 처음 [오디세이]의 완역본을 읽으면서, 그 내용이 그 동안 막연히 기억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다.

신선하고 명료하고 새로운 에밀리 윌슨의 [오디세이]

[오디세이]라고 하면 흔히 ‘오디세우스의 모험’ 정도로 이해하지만, 그러나 책의 실제 내용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다양하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커스의 비중이 제법 크고, 무엇보다 20년 동안 한결같이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페넬로페의 고난사가 전체의 3할을 차지한다.

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1751–1829), Odysseus and Penelope, 1802, oil on canvas, 86.8 × 107.9 cm
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1751–1829),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1802

윌슨 교수의 번역에서 특히 찬사를 받은 대목도 페넬로페의 심정을 묘사한 장면들이다. 다른 어떤 번역본들보다 절박하면서도 진정성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칭찬이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 19권(Book 19)에서, 늙은 거지로 변장한 오디세우스 곁에서, 남편이 이미 이타카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줄도 모르고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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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윌슨 교수의 새 번역본은 종종 ‘파격’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은 긍정적인 평가가 절대적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 반대의 혹평도 분명히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기원전 700년 경에 처음 지어졌다고 추정되는 오디세이는 구전문학과 문자문학이 서로 섞이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승되어 왔다고 한다. 학자에 따라 ‘구전’ 쪽에 더 무게를 두기도 하고, ‘문자’에 더 큰 비중을 싣기도 한다.

그리스어도 모르고, [오디세이] 시의 형식과 특징은 더더욱 모르는 나로서는 여러 매체의 비평과 주장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들에 따르면 윌슨 교수의 번역은 이전의 여러 시도들에 비해 원작의 리듬감을 살리고 유지하는 데 더욱 성공적이라고 한다. 가령 [오디세이]의 첫 문단을 비교해 보면, 웬만큼 영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만하다. 위는 에밀리 윌슨, 아래는 1990년대 큰 호평을 받은 로버트 페이글의 번역이다.

윌슨(파란색), 페이글(분홍색)
윌슨(파란색), 페이글(분홍색)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은 윌슨 교수의 번역이 훨씬 더 짧고 간결하며 리듬감이 높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행이 6-9개의 짧고 평이한 단어들로 짜여져 죽 소리내어 읽으면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어렵고 복잡한 단어가 거의 없어서 즉자적으로 이해된다. 둘째는, 그처럼 스타카토 식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길게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은 과감히 의역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오디세우스의 영리하고 비상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복잡한 성격을, 원본을 고스란히 옮긴 페이글은 ‘the man of twists and turns’이라고 표현한 반면, 윌슨은 ‘a complicated man’으로 요약했다. 어떻게 번역하든 비판은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풀었고, 그로 인해 어떤 비판이나 지적이 학계에서 나오더라도 감수할 준비가 돼 있다고, 윌슨 교수는 뉴욕타임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오디세이]의 원본이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시적 구조와 특징을 가졌는지도 전혀 모른다. 그저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 더 명료하고 직설적이고 쉽게 이해되면서도 일정한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윌슨 교수의 번역이 다른 어떤 번역자의 판본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할 뿐이다.

불멸의 일리어드, 그리고 오디세이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는 숱한 번역자를 거쳤다. 앞으로도 수많은 학자, 연구자들이 다시 번역할 것이다. 내가 소장한 몇몇 판본의 번역자만 꼽아도 여럿이다. 보편적으로 가장 무난한 정통 번역판을 냈다고 평가 받는 리치몬드 래티모어를 비롯해 스티븐 미첼, 이언 존스톤, 로버트 페이글, 피터 그린 등등.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언론은 전문가를 동원해 그 가치를 매기려 애써 왔고, 때로는 주요 번역판들을 비교해 우열을 가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뉴요커’의 이런 글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뿔난 학술적 관심이 아닌, 그저 흥미 위주로 읽을거리를 찾는 나로서는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의 번역판 역시, 그런 흥미의 관점에서 골라 왔다. 윌슨 교수가 ‘패리스 리뷰’에 쓴 [오딧세이]의 추억담이 한 계기였다면, ‘일리어드’는 먼저 유명을 달리한 아들에게 바치는 아버지(번역자)의 헌사 때문에 고른 경우다. 밴쿠버 아일랜드 대학의 교수였다 은퇴한 이언 존스톤은 온라인으로도 공개된 일리어드의 번역 페이지 맨 앞에, ‘아들 조프리 (1974-1997)와 손자 파비안(1992년생)에게 바친다’라는 말과 함께, 일리어드의 구절을 인용했다.

Generations of men are like the leaves.
In winter, winds blow them down to earth,
but then, when spring season comes again,
budding wood grows more. And so with men–
one generation grows, another dies away. (Iliad 6.181-5)

겨울이면 바람에 날려 떨어져버리지만 봄이 오면 다시 새 생명을 싹틔우는 나무처럼, 나뭇잎처럼, 인간의 운명 또한 그러하다는, 더없이 쓸쓸하면서도 한 줄기 희망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다.

다음에 읽을 책은…

각설하고, 크리스마스 연휴가 낀 주말밤, [오딧세이]를 마쳤다. 얼마나, 어디까지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음미했는지는 지극히 의문이지만, 아빠로서는 한 달 넘게 들어준 것만으로도 아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다음에는 무슨 책을 읽고 싶으냐, ‘일리어드’를 읽어볼까, 하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필립 풀만의 [골든 콤파스]를 읽어달란다. 우연치 않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2007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황금 나침반] (The Golden Compass)
2007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황금 나침반] (The Golden Compass)
그런데 역시 열살짜리 마음이라 버드나무 가지처럼 몇 마디 힌트에도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마지막이 정말 슬프다. 아빠는 읽다가 울었다.”

“아…그러면 라이라가 죽나요?”

“아니야, 해피엔딩이긴 해. 그런데 무척 슬퍼. 자세한 얘기를 미리 해주면 재미가 없어지고…”

“슬픈 결말이면 읽기 싫은데…”

그러더니 오늘은 [나니아 연대기]가 어떠냐고 묻는다. 기독교의 내용을 소설화한 것이어서, 나는 썩 내키지 않는 선택이다. 요는, 다음에 읽을 책은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오딧세이]라는, 나로서는 독서의 에베레스트 같았던 서사시를 하나 떼게 돼서, 그것만으로도 뿌듯하기 그지없다. ‘책씻이’라도 벌여서 아들에게 감사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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