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한순간도 헛되지 않았노라 되뇌고 싶다면 실연에서도 교훈을 찾아야 할 일이다. 특히나 뭐든 결과물을 내지 않으면 무의미한 시간과 경험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회에서 배우는 것도 없이 매번 반복적인 실수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적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언제쯤 철들래’라는 말을 듣는 것이 지겨워졌다면 말이다.
20대의 끝자리에 가까워지거나 30대의 문턱에 올라서면 어느 날 문득, ‘더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순간이 헤어진 연인의 비겁한 뒷모습에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 눈물, 콧물 짜며 우는 날이든, 호감 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만취해 침을 흘리고 까맣게 잠들어버리는 날이든.
더 나은 자신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힘들고도 지난한 시간을 견디어 왔는데 어느 날 되돌아보니 이루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도, 멋진 라이프 스타일도, 폼 나는 애인도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다른 부분은 어차피 우리 모두 힘든 때이니까, 취업도 힘들고 멋진 커리어를 만드는 것도 힘들고 여가로 해외여행을 하거나 서핑을 하는 것도 힘드니까. 사랑만큼은, 사랑만큼은 특별하고 싶은데 그것이 가장 힘들더란 말이다.
우연하게 순도 100%의 연인을 만나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나오는 츠네오처럼 조제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그녀와 함께한 모든 것을 한번에 놓아버리는 날도 언젠가는 온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의심이 커진다. 지금껏 해온 선택들이 다 별로였다며, 지금이라고 맞을 리가 없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쉽게 떠나 보낸다. 다시는 사랑 때문에 울거나 잠 못 들지 않겠다고 한 굳은 결심 때문에 그 사람의 조건이라든지 환경적인 요인을 핑계로 떠나 버린다. 점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힘들어지지만, 어차피 어른의 삶이란 이런 것이었다며 스스로 현실적인 눈을 가지라며 독려한다.
더군다나 사회에서 정해준 사랑의 형태는 일정한 것처럼 보인다. 저마다 내 사랑의 특별함을 믿고 싶지만 많은 경우 내 사랑은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 너무 엇나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좋은 집안의 능력 있고 자상하기까지 한 사람을 만나 연애하다가 결국 결혼까지 한다는 데 난 자꾸만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구덩이에 빠진다. 그렇게 많은 늪이 왜 내 앞에만 놓여 있는 걸까, 이런 자책의 끝은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른다.
가을이 되면 여름날 한껏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로 함께 올라간 체온이 떨어진다. 목 뒷덜미에 선선한 바람이 불고 뜬금없는 옛 애인의 추억이 덮쳐온다. 레이첼 야마가타의 ‘Over And Over’는 실연한 사람들을 위한 송가이다. 슬픔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반복된다. ‘I really thought I was okay. I really thought I was just fine’
적어도 결혼을 하면 그 실연의 기회가 어느 정도는 차단되니 반복되는 바보짓을 피할 수 있는 어른의 행위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다들 결혼을 독려하는 것일 수도 있다. 더 이상 네 뻔한 연애담은 듣기 싫다는 뜻으로. 물론 결혼을 통한 실연의 차단은 많은 경우에서 오래된 판타지일 뿐임이 증명됐지만.
나의 경우, 실연의 틀은 매번 비슷했다. 우선 피할 수 없었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거칠게 반항하면서도 결국엔 순응해야 했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가을을 맞이해야 했다.
결혼이든 오래된 연애이든 관계를 지속시키려면 일상적인 편안함을 줄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해요.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은 서로에게 느끼는 기대나 매력이 아니라, 일상에서 편안함을 나누고 그것에 서로 만족할 수 있냐는 문제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