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1일, 신용평가업체 ‘무디스’가 한국의 등급을 세계 최상위권 Aa2로 올렸다고 발표했다. 이걸 두고 온갖 해석이 나왔고, 거기에 대해 나도 좀 생각을 해봤다.
1.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해석
“이번 등급 조정은 박근혜 정부 3년간의 경제성과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출처)
나의 해설:
최경환 씨(사진)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기 위해(경상북도 청도/경산) 경제부총리직을 그만둘 예정이다. 선거를 앞두고 무디스에서 좋은 성적표를 주니 기분이 좋을 것이다.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내리는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나쁘다. 보수 칼럼니스트마저도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최 장관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무디스 발표를 해석하는 데 있어 약간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디스의 국가신용등급은 한 나라의 경제성과를 평가하는 등급이 아니다. ‘이 나라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이 얼마나 믿을 만한가. 돈을 얼마나 잘 갚을까’를 말해주는 지수다. 은행이 개인에게 신용등급 매기는 것과 똑같다. 빚쟁이 입장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하는 개인 신용평가를 생각해보자. 수입이 적고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도 없는 사람이라도, 안정적인 직장(우체국, 공무원 등등)에 다니고 있고 부동산 등 담보가 있으며 지출이 적고 과거 연체 경력이 없으면 신용등급이 높다. 빚을 잘 갚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대출도 마찬가지다. 매출이 나아질 전망이 없고 구조조정으로 직원들을 팍팍 자르는 비정한 회사라도, 빚쟁이들 입장에서의 신용등급은 좋게 받을 수 있다.
지금 국제 빚쟁이들이 한국 정부를 바라보는 눈이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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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근혜 대통령의 해석
“무디스가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한 것은 체질개선노력이 평가를 받은 것…구조개혁이 후퇴하면 무디스가 신용등급을 다시 하향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이기도 하다” (출처)
나의 해설:
박근혜 대통령(사진)은 특이하게도 ‘무디스’라는 업체 이름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의장국을 맡기도 했던 G20 정상회담 결의의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무디스 등 3대 신용평가업체들의 잘못된 평가로 위기가 확대되었다는 반성과 비판이 이뤄졌다. 그래서 오바마와 이명박을 비롯한 세계 주요 20개국 정상들은 여러 번 국제회의를 갖고 의논했다.
3대 신용평가업체들의 평가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가능하면 이들의 이름을 공식문서에서 언급하지도 말자고 합의했다. 무디스건 뭐건 간에 이들은 수익사업을 운영하는 민간업체들에 불과한데 여기에 국가가 지나친 정당성을 부여해 줄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었다.
당시는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지만, 박 대통령도 국회의원 시절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기획재정위원회 소속이었다. 신용평가업체들이 어떤덴지 알 만한 분이라 더 실망스럽다.
박 대통령의 변명을 대신 하자면, G20의 결의는 외국에서도 지키기 어려워한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처럼 특정 업체를 광고해주는 국가 수반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무디스가 대한민국보다 위에 있나. 채권자 편에 서 있는 무디스와 채무자 대한민국의 이해관계는 다를 수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무디스가 하라는 대로 할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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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일보의 해석
“체격 커져도 체력 떨어진 경제… ‘남 칭찬’에 우쭐할 때 아니다” (출처)
나의 해설:
조선일보는 방현철 기자의 기사에서 비교적 차분하게 사태를 진단했다. 신용등급은 ‘빚 갚는 능력’에 불과하며, 무디스 등등은 뒷북치는 성격이 강하다고도 언급했다. 방심하지 말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설 코너에선 엉뚱한 얘기가 나온다. “‘韓 경제 구조 개혁에 달려’ 무디스 경고 文대표도 들었나” 라는 제목의 사설이다. 뜬금없이 야당과 문재인 공격이다.
아전인수 격으로 뉴스를 끌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주장을 하는 건 한국 언론계를 지배하는 ‘꼰대’ 특성이다. 무디스가 문재인한테 발표한 것도 아니고 문재인이 한국 대통령도 아닌데. 조선일보가 박 대통령의 대변인 혹은 청와대 기관지도 아닌데. 좀 (…)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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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겨레의 해석
“냉정하게 말해 국제신용평가기관의 눈에 비친 우등생이란 ‘돈 될 만한 나라’이지 ‘건강한 나라’라는 뜻은 아니다” (출처)
나의 해설:
한겨레 신문은 사설에서 자기 말마따나 냉정한 얘기를 했다. “가계와 기업은 비틀거리는데 정부 곳간만 튼튼한 한국 경제의 기형적 구조”를 드러냈다고도 말했다.
11월에 나온 김경락 기자의 기사가 더 재밌다. 한국 정부가 신용평가에서 좋은 성적표를 받는 이유는 빚 강박증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주장이다. 국가신용등급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복지 등 정부지출을 제한하고 있어서, 결국 이게 시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고 장기적인 경제 성장의 힘은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가계부채야 늘어나든 말든 그건 당장 무디스 성적표에 반영이 안 되니까 일단 정부부채만 잘 조절하자는 식이다.
이 사설의 주장엔 절반만 동의한다. 우선 한국정부가 지출을 더 늘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4대강 같은 데 들어간 눈먼 돈을 생각해보면 경제나 복지엔 도움 안 되는 엉뚱한 데서 돈 잔치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정부에 ‘(정부) 빚 강박증’이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IMF 때도 그랬다. 한국정부는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며 혹시라도 연체되면 나라 망신이다, 혹은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스처럼 채권자와 당당하게 채무 협상을 벌이는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들이 하란 대로 할 필요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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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의 해석
“IMF외환위기 직전에도 한국 신용등급은 상향됐다. 신용등급은 과거를 볼 뿐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법률 등을 통과시키지 않으면서 경제 민주화만 얘기하는 게 환란때인 1997년과 지금이 똑같다” (출처)
나의 해설:
‘한국경제연구원’은 대기업 로비단체인 전경련에서 파생됐으며 전경련 회원사들의 회비로 운영된다. 이름에 ‘한국’자가 들어가서 무슨 공기관처럼 들리지만, 전경련 소속 대기업의 입장을 반영하는 이익단체에 가깝다.
위의 기사에서, 권태신 원장(사진)은 무디스 등급 상향이 어찌 됐든 한국은 지금 IMF와 비슷한 위기 상황이라고 말한다. 무시무시하다! 그는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 돈 많이 받는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해야 한다.
- 의료를 민영화해야 한다.
- 싱가포르처럼 카지노 산업을 허가해야 한다 등의 의견을 제시한다.
소속단체의 입장을 아주 충실히 반영하셨다.
이번 무디스 발표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매체들이 권 원장의 코멘트를 실었는데, 앞으로 이렇게 편향적인 단체의 입장을 소개할 때는 독자들에게 살짝 주의를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들의 논리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떠나, 단체 이름만 보고 중립적인 기관인 것으로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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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무디스 칙사 대접은 그만하자
앞서도 얘기했듯이 한국정부는 스스로가 주도한 G20 국제회의에서 합의한 대로 무디스, S&P, 피치 등 신용평가 3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정부가 내는 보도자료에서 혹은 고위공직자들의 공식 논평에서 이름을 언급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들은 수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다. 정부가 도와준다고 해서 내릴 등급 올려줄 것도 아니고, 설령 단기적으로 등급 올려준다고 해서 국가 경제에 장기적으로 좋을 일도 없다. 신용도가 신용등급을 정하는 것이지 신용등급이 신용도를 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무디스에서 한국을 오면 레드 카펫만 없을 뿐이지 거의 무슨 청나라 사신 대접을 해 주더라. 힘 있는 사람들이 이들과 친분을 쌓으며 사익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무디스에서 한국을 오래 담당했던 톰 번(Tom Byrne, 사진)은 2014년과 2015년 연간 경제성장률이 3.8% 정도 될 것이며(현실은 2%대) 박근혜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18년엔 한국이 선진국 국민소득에 도달할 것이라는 설레발을 쳐준 적이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에도 긍정적 코멘트를 해줬다.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일까? 그는 은퇴 후 ‘코리아소사이어티’의 회장직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