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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진보 이야기, 프레임에 관하여

지난 몇 년간, 그리고 특히 요즘 들어 많은 이름난 담론가들이 적잖이 논하는 중요한 화두는 바로 “진보의 의제가 부족하다.”라는 한탄이다. 그런데 이것은 개별 정책안건이 부족하다는 점을 넘어, 진보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규정하고 늘 상기시키는 어떤 이야기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것에 가깝다.

이런 지적이 실제 활동가분들이 노력해온 바에 비해 과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대중 담론에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자체는 동의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바로 그런 이야기성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생각을 모을 필요가 있다.

이야기성, 프레이밍

무언가의 이야기성에 대해 논하려면 참여정권 후반기 이래로 선거운동 철마다 늘 등장하는 것이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이다. 정치계, 홍보계에 퍽 열심히 읽히고 원용된 ‘사고 프레임’ 개념을 담은 책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가끔 프레임론은 그냥 그럴싸한 비유법 개념 정도로 잘못 이해되곤 하는데, 사실 커뮤니케이션학에서 논하는 본래 개념은 사안에 대한 입장을 정해주는 게 아니라 입장을 정하는 ‘기준’을 세우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프레임 전략이란, 판단 기준에 따를 때 더 바람직한 느낌을 주는 범주를 자신에게 맞추고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상대는 자연스럽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몰아버리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낙태 합법화 대결은, 낙태 찬성 운동과 낙태 반대 운동의 싸움이 아니다. 낙태 찬성 측은 자신을 ‘선택권 긍정'(pro-choice)으로, 낙태 반대 측은 자신을 ‘생명권 긍정'(pro-life)으로 지칭하는 프레임을 내걸고 있다. 낙태 합법화 지지 진영은 이슈를 선택권으로 프레이밍하여, 그것에 반대하는 자는 선택권을 부정하는 놈으로 만든다. 반대로 낙태 불법 유지를 원하는 진영은 이슈를 생명권으로 프레임하여, 반대세력은 생명을 부정하는 놈으로 만든다.

선택권 긍정과 생명권 긍정 프레이밍

(좌) 나는 선택권을 긍정한다. 하지만 낙태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 우리는 열대 우림과 고래, 나무, 대머리 독수리를 지키는데,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은 왜?

레이코프의 책에서 분석한 내용은 바로 미국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그리는 진보정치와 보수정치의 서사는 각각 돌보는 부모와 엄격한 아버지 모델이고, 이런 ‘가족 프레임’을 통해 보수정치가 유리한 형국을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 사회의 관찰은 오늘날 한국에서는 좀 거리가 상당히 있는 것이, 비유로서도 맞지 않고, 진보와 보수 모두 국가가 온갖 내정에 적극적 개입을 하기를 요구하는 등, 구분점을 잡을 수 있는 부분들이 다르다.

결국, 한국에서 잘 먹힌 프레임을 돌아보고, 진보정치에 적합한 큰 이야기성을 찾아야 한다. 아래는 아직 체계화하지 않은 개인적 관찰에 기반을 둔 몇 가지 주관적 제안이다.

덜 재미없는 극단적 요약 버전

아래의 내용이 길고 길기 때문인지 필자가 글 말미에 극단적 요약 버전을 정리해두었습니다. 이를 먼저 소개합니다.

  1. 진보는 큰 서사가 부족해서 담론에서 밀린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도대체 언제적 ‘민주화 투쟁’론으로 계속 사골을 끓일 것인가)
  2. 오늘날 보수는 “능력-노력주의”로 사회 인식을 프레이밍해서, 진보란 능력과 노력이 없는 것들이 무임승차하는 걸 종용하는 세력처럼 몰아간다.
  3. 그러니 사회 인식의 프레이밍을, 진보에 합당한 프레임인 “존엄 프레임”으로 정착시키자. 진보란 함께 합의하며 존엄을 누리고자 하는 노력이다. 반대말은, 나만 잘나가보자 서로 아귀다툼하다가 함께 탈진해 쓰러지는 것.

이제 진짜로 시작합니다. (편집자)

당신은 어떤 프레임 안에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프레임 안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보수의 이야기성

먼저 꽤 오래 승승장구하고 있는, 보수의 이야기성을 살펴보자. 최근 수년간 우익성향 매체 및 여타 온라인 우익 담론행위들을 소재로 논의된 백가쟁명 내용을 느슨하게 종합해보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이해 편의상, 서사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누어 살펴본다.

  • 동경하는 바: 열심히 하면 잘살게 되고, 내 눈앞의 사회갈등이 적은 세상. (그런 세상의 모범적 사례가 실존했다고 기억을 짜 맞춘 것 중 하나가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시대에 대한 동경이다.)
  •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건: 열심히 살면 된다. 종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들.
  • 그것을 가로막는 문제적 인간들의 속성: 열심히 안하고 특혜를 요구하는 자들.
  • 그래서 해야 하는 바: 그놈들을 계도시켜야 한다.
  •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침: 그놈들을 밟아 침묵시킨다.

보수의 서사에서 채용하는 세계관의 틀은 “노력-능력 프레임”이다. 이 안에서 보수는 노력과 능력을 추구하는 자들(참조: 조이라이드, 일베, 우글루스, 기타 등등). 반면 진보는 노력과 능력을 비웃는 자들이 된다.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해서는 학문으로는 애초에 개념을 정립했던 마이클 영이나 박남기 교수부터 사회 논평으로는 박권일까지 여러 적극적 담론작업이 이뤄져 온 바 있으니 더 궁금한 분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시라.

진보에 필요한 이야기성

그런데 진보가 제시해야 할 서사는, 프레임의 구축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프레임 재구축이란 무슨 엄청난 사회구성체 이론을 새로 연구하고 발명해서 던진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다양한 분들이 논의해온 내용, 이론, 통찰을 좀 더 간편한 포괄적 개념으로 정돈하여 대중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선 위의 다섯 요소 틀거리에 맞춰보면 이런 모양을 만들 수 있다.

  • 동경하는 바: 도태에 대한 불안보다는 자아실현 동기로 움직이도록 안전망이 있고, 사회갈등을 다양성 존중 속에서 합리적 합의로 해결하는 세상.
  •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건: 공존하지 않으면 결국 공멸함을 늘 인식하여, 공존이 가능하도록 계속 합의를 해야 한다. 견제에 의한 균형과 타협.
  • 그것을 가로막는 문제 인간들의 속성: 합리적 조율의 장을 망쳐놓는 자들. 다양성 불인정 인간들, 성/인종/지역 차별론자들, 그냥 싸움으로 관심을 구걸하는 자들.
  • 그래서 해야 하는 바: 자유는 주되, 사회 파탄 시도에 법적 책임을 물린다.
  •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침: 존엄을 추구하며 함께 살아야 살 수 있음에 대한 인식 확대.

바로 이런 서사의 큰 우산으로 가능한 것이 바로 “존엄 프레임”이라고 본다. 즉 존엄 프레임에서는, 진보란 함께 합의를 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존엄을 누리며 사는 자세다. 서로 무익한 스트레스는 덜 받고, 사회적 낭비를 줄여가며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다.

반면 보수는 그에 반대할 경우, 나만 출세하겠다며 아등바등 출혈 경쟁하며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함께 무너지는 세상을 바라는 자세를 지칭하게 된다. 짧게 압축하면 이렇다

“진보란 함께 합의하며 존엄을 누리고자 하는 노력이다. 반대말은, 나만 잘나가보자 서로 아귀다툼하다가 함께 탈진해 쓰러지는 것.”

물론 개인 레벨에서는, 특히 자신감과 야망이 철철 넘쳐날 경우 후자가 매력적일 수 있으나, 좋은 정글보다는 좀 갑갑해도 문명사회가 나은 것과 비슷함을 역설할 수 있다.

다른 표어로 ‘공동체 프레임’을 생각해볼 수도 있으나 조금이라도 집단주의스러운 느낌을 주는 키워드는 가급적 모두 피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싶고, ‘공존 프레임’도 그래서 나한테 좋은 게 무엇인지 한 단계 더 설명이 필요하여 탈락시켰다.

앞서 말했듯 프레이밍은 재정리지,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이미 2012년에 ‘분배 정의를 넘어 존엄으로 진보를 리프레임하라’고 논한 장은주의 책 [정치의 이동]과 키워드가 겹친다. 다만 그 책과 달리 존엄이란 것이 불의를 바로잡기나 참된 주인 되기 같은 철학적 내용을 지칭하지 않을 따름이다.

쉽지 않은 존엄 프레임의 정착

하지만, 존엄 프레임을 정착시키기까지 커다란 난점들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실패한 경력

많은 리버럴은 물론이고 일부 좌파까지, 진보의 명찰을 달고는 말 또는 행동으로 결국 “내 능력이 대우받는 세상”에 가까운 논지를 펼쳐온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면 “사람이 먼저다.” 식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인간미를 펼친다든지 말이다. 사실은 ‘정의론’조차, 인과응보를 연상시키며 다시금 능력 프레임으로 빨려 들어가기 쉽다.

비합리성도 껴안아야 한다

큰 사회일수록, 연금이나 의료보험과 같이 ‘손해가 발생해도 국가로서는 계속 추구할’ 사회 복지 장치와 군사력과 같이 ‘개인에게는 손실이지만 사회로서는 필요한 의무 부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게임이론적 합리성만으로 이뤄내기가 대단히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사회체제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개인적이고 근시안적인 최적을 찾는 결정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사회구성원들이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헌신을 일부분이나마 감내하도록 만드는 요소가 필요하다. 비합리적인 신뢰는 필수다.

공동체의 구심력은 어디에서

비합리적인 신뢰까지 주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민족주의나 종교는 부작용이 존재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가장 합리적인 것은 국가 사회체제에 대한 자긍심인데, 이런 자긍심이 생기려면 확실히 사회체제가 점점 나아지는 과정에서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긴 경험이 누적되어 있어야 한다.

통쾌하지 않다

보수를 척결하여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노동해방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보수의 사고마저 끌어안고, 더 많은 분야에서 더 갑갑한 견제와 합의와 조율을 거치는 사회체계를 굴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열성 지지자들을 규합하기가 더 어렵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 하기에, 그만큼 긴밀한 담론 개선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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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개선 작업이 필요하다

대단히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적으로 정치인 뒷담화를 하든 논평을 내든 캠페인을 하든 학문 작업을 하든 선거운동에 뛰어들든, 정치 사안을 화제로 삼아 논할 때라면 언제나 진보정치란 공존을 통한 존엄에 관한 것이라는 서사를 어느 정도 바탕에 깔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진보를 내건 정치세력을 비판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고가 흔하고 보편적이어서, 그냥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게 하는 것이다.

“동경하는 바”에 대해서

이미 그간 누적된 단초는 적지 않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사실 남들만큼 할 필요 없다” 같은 논지들을 계속 주장했고, 경향신문의 “사회계약 다시 쓰자” 특집, 지난 대선 경선 과정에서 손학규 캠프의 “저녁이 있는 삶” 등 훨씬 정교한 논리들도 많다.

개인의 아등바등으로 남을 물리치는 것으로는 이미 사회 내적 갈등과 스트레스가 오랜 한계에 도달했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공동의 해소를 추진해야 하는 세상이다. 필요성을 논하는 좋은 글들은 진지한 분석글부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까지 적잖이 누적되어 있으니, 열심히 소개하며 이 틀로 설명하는 것이 어떨까 제안하고 싶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건”에 대해

필요한 건 고구마 줄기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안건 확장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 일반의 권익 향상을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를 포함한 노조 조직률 향상, 또 반대급부로 노조에 대한 부패 감사도 강화하되, 그와 함께 독일식 노사 합의 공동 경영 참여 등의 방향성을 주르륵 이어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경제성장 자체를 등한시해서도 안 되니 그에 대한 대책도 동시에 설계하면서 말이다. 공존의 합의를 거부하면 사회가 매우 오랫동안 고생한다는 사례, 필리핀의 독재 치하 역사의 사례 같은 것들을 열심히 반면교사로 뿌려야 하고 말이다.

비합리적 구심력으로는 이미 보급된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재발굴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데, 예를 들어 유학의 ‘체통’ 개념을 역설하며 그것이 남이 세워주는 ‘위신’과 다른 스스로 지키는 품위임을 강조해볼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염치(廉恥), 인의(仁義) 같은 개념 또한 진지하게 재평가 및 재포장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점점 더 발전하는 사회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의식을 갖추면 좋은데, 아쉽게도 “전반적 민주화 증가가 곧 전반적 생활 수준 증가”라는 학습 과정은 IMF 사태를 필두로 이미 오랫동안 박살 난 상태다. 그렇기에, 그보다는 우리 사회는 견제가 작동했을 때 비로소 사회가 계속 더 나아진 부분들을 계속 퍼트리고 생색내야 한다. 4.19나 6월 민주화 혁명이라든지, 법정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 막걸리 보안법 체포의 극복과정이라든지, 다행히도 사례가 결코 적지 않다.

그런 견제를 앞으로는 피를 덜 흘려도 이뤄내도록 상설화하는 게 바로 균형의 합의와 제도다. 우리 사회는 그간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는 부분만큼씩 정말 한 걸음씩 나아졌으며,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

“그걸 가로막는 문제 인간들의 속성”에 대해서는

어뷰징론을 적극적으로 적용하며 사안을 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뷰징이란 포털이나 게시판 공간 등을 악의적 방식으로 오남용 하여 자기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인데, 그 뉘앙스를 확실하게 전하는 좀 더 손쉬운 한국어 조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으로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어뷰징론은 뭔가 잘못하는 성원을 지목한다는 점에서 보수의 ‘무임승차론’과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으나, 주목하는 문제 지점이 완전히 다르다.

무임승차론은 ‘내 것을 수탈한다’, ‘부당하게 대접받는다.’라는 개인적 찌질함의 결집이라면, 어뷰징론은 ‘우리가 함께 잘 살자고 만든 합의를 네놈이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공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안전망에 대한 공동의 룰을 지켜야 공존할 수 있음을 전제할 때, 나 하나만 꼼수를 쓰면 대박을 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판 전체를 깨는 시도는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어뷰징론이다. 이렇듯 온라인 공간의 비유들을 사회 전체로 꽤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해야 하는 바”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 사회가 다양성과 평등성을 지니고 함께 굴러갈 수 있는 조건에 대한 방해를 엄중하게 단죄/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전에 필자가 일베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의 논지, 즉 표현의 자유 원칙에 근거하여 공간은 용납해주되 개별 표현에 대해 필요한 법적 책임을 확실히 묻자는 것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하나의 사례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침”에 대해서

그간 나온 수많은 진보 담론들을, 이 프레임으로 살짝 이어붙여야 한다. 그런 작업의 진행은 몇 가지 설득적 담론 전략에 입각해서 점검해보는 것도 좋고, 민주제의 기본 역할을 상기시키는 기초적 작업도 필요하다.

우선 시민적 참여의 힘 자체가 이미 진보적 가치를 담아낸다는 평범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도 바람직한데, 각자의 전문 분야를 통해서 추진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예를 들어 미디어 분야라면 ‘시민적 참여 향상을 위한 미디어 도구의 조건’ 같은 식으로 세부 토픽을 축적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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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다시금 강조해보자.

“진보란 함께 합의하며 존엄을 누리고자 하는 노력이다. 반대말은, 나만 잘나가보자 서로 아귀다툼하다가 함께 탈진해 쓰러지는 것.”

이 스토리를 좀 더 다양하고 쉽고 재미있는 말로 거듭 업글하여 여기저기 뿌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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