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웹 관련 컨퍼런스인 www2014도 웹 갈라파고스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웹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www2014마저도 한국인이 결제할 때는 액티브엑스/공인인증서를 요구하고, 외국인에게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결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3월 21일 ‘제1차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점검회의’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나라 온라인 쇼핑몰에서 결제하기 힘들다고 하자 갑자기 언론 여기저기에서 떠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계속 반복되는 ‘액티브엑스와 공인인증서는 다른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에서부터 갑자기 HTML5 방식의 공인인증서 시스템을 내놓겠다는 기사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IT와 큰 관계가 없는 정치인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저런 이야기를 한 것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인이 받는 불편은 쏙 빼놓고 중국인의 불편만 이야기한 것은 좀 편치 않았습니다. 며칠 후 앞으로 외국인이 한국 인터넷쇼핑몰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는 공인인증서를 받지 않겠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내용을 보면 가관입니다. 국내 이용자는 그대로 공인인증서를 쓰고 외국인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 : 아, 한국 쇼핑몰에서 뭐 사기 힘드네요. 한국 정부 : 곧 조치하겠습니다! 한국 국민 : 아... 'ㅂ' 그럼 우리도 덕 보는 거임? 한국 정부 : 어디 천한 것들이 한 몫 끼려 그래. 글고 너희들 해외직구로 싸게 살 생각마라."

참 웃기다 싶은 마음이 들다가 www2014 컨퍼런스 홈페이지를 알게 됐습니다.

웹 미래 함께 논의하는 전통의 WWW 컨퍼런스

WWW2014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올해로 23회를 맞는 월드 와이드 웹 관련 컨퍼런스입니다. 무려 전 세계 웹 표준과 가이드라인 개발을 수행하는 W3C가 컨퍼런스 후원자입니다. 그 외에 미래창조과학부, 한국정보과학회도 공동 후원자이며 카이스트, 국가표준기술원, 국제 월드와이드웹 운영위원회(IW3C2)가 공동 주최를 맡았습니다.

이런 대단한 행사가 한국에서 열리는 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기간은 2014년 4월 7일부터 11일까지고, 행사 장소는 코엑스입니다. 이 행사에 참여하려면 내국인,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홈페이지에서 등록을 하면 됩니다.

이 행사를 통해 다양한 논문이 발표되며, 웹과 관련된 각종 트랙과 세션이 진행될 것이라고 하죠.

한국 공동 주최 및 후원 행사에 한글 홈페이지 없음

홈페이지에 처음 들어갔는데 좀 이상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후원하고 한국의 교육기관이 주최를 맡아 한국에서 진행되는 행사, 한국 사람들이 돈을 내고 참여하는 행사에 한글로 된 홈페이지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도메인도 한국의 국가 도메인인 .kr 을 이용하고 있는 행사인데 말이죠.

www2014.kr 홈페이지
www2014.kr 홈페이지

그래서 처음에는 어딘가 한영 전환 버튼이 있는데 못 찾은 줄 알고 한 20분 동안 홈페이지를 꼼꼼히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 행사가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한 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좀 이상하더군요. 100% 영어수업으로 유명한 카이스트가 주최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어륀지의 적통을 이어받은 박근혜 정부 산하 미래창조과학부 후원 행사라서 그럴까요?

과거 www2012.org, www2013.org 등은 국제 도메인인 .org를 이용했습니다. 물론 www2014도 www2014.org로도 서비스됩니다. 그런데 www2014 공식 트위터 계정도 www2014.kr을 공식 도메인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한국인을 배려하지 않은 행사인데 한국에 알릴 때는 www2014.kr 로 알리는 거죠.

[box type=”note” head=”정정합니다”]콘퍼런스 초기에는 WWW1.org 형식으로 그다음에는 WWW2011.org 홈페이지 운영을 해왔으나, 도메인 확보가 쉽지 않아 몇해 전부터 각국에서 직접 도메인을 운영하도록 하고 있으며, 행사가 끝난 후 wwwxx.wwwconfernces.org 로 이관하는 형태로 운영이라고 합니다. www2014.org는 컨퍼런스 측에서 확보한 도메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고로 현재 www2014.kr의 소유주는 (주)제니컴이며 www2014.org의 소유주는 The Original Web입니다. 그외 www2013.org, www2012.org, www2010.org, www2009.org 등의 소유주는 IW3C2입니다. .kr 도메인은 외국인도 구매할 수 있지만 외국인 등록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업데이트 시각: 2014년 3월 26일 23시 32분)[/box]

‘외국인만 공인인증서 없이 결제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발상의 연장선상인가 싶어서 서글퍼졌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아, 한국인이라면 영어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데…… 하며 반성하고 있을 사람들이 참 많겠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영어만 쓰는 직원에 메뉴판도 영어로 되고 아무도 한글을 안 쓰는 술집 같은 느낌이랄까요?

혹시 주최 측에서 한글로 된 홈페이지를 열심히 다 만들었는데, 깜빡 잊고 링크를 연결하지 않으신 거라면 지금이라도 달아주면 좋겠습니다. 사전 등록 기간이니까 아직 시간이 많잖아요.

한국인은 액티브엑스/공인인증서 까세요!

www2014 행사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등록을 할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도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www2014 등록 과정 설명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이 등록 과정은 외국인에게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인이 결제를 시도하면 저 세 번째 단계인 Payment, 즉 결제가 다른 부가적인 단계들이 붙기 때문입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 같은데, 바로 액티브엑스 설치입니다.

www2014 결제 모듈 설치 팝업창
한국인이라고요? 액티브엑스 설치부터 하세요.

저는 이런 무서운 것이 뜨면 일단 ‘취소’를 선택합니다. 뭔가를 설치하라는 팝업창이 떴다고 덥석 설치를 하는 바보가 아니거든요.

자, 그럼 저 액티브엑스를 설치하지 않은 채 결제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될까요? 정부가 반드시 하라고 한 뭔가를 안 했으니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문구로 연결되겠죠? 쨘!

www2014 인코딩이 깨진 팝업 메시지

아닙니다. 인코딩이 깨진 팝업창 하나가 달랑 나옵니다.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딱 하나 있군요. Active X. 그나마 표기법도 틀렸군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기술은 띄어쓰기 없는 ActiveX 입니다.

[box type=”info”]액티브엑스/플러그인을 강제하는 국내 결제사 솔루션 중 상당수는 아직도 euc-kr 을 쓰고 있습니다. 오픈소스, 국제화 시대 등등 여러 이유때문에 utf-8을 주로 쓴지 오래인데 국내 결제사 중 일부는 여전히 euc-kr만 지원하는 거죠. 참 발전이 안 됩니다. 돈은 참 많이 버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아직도 utf-8 인코딩 하나 지원을 못 해주고 있을까요?

참, 국내 은행은 주민등록번호와 같이 민감한 고객의 개인정보를 보관할 때도 암호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 잘 아시죠? 몇백억이 든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미뤄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은행이 거둔 수익이 얼마인데…… 시대가 바뀌면서 보안에 신경을 써야하지만, 보안에 돈을 쓸 여력은 없다는 겁니다. 이윤은 남겨야 하고 보안은 하기 싫고. 정부는 그걸 그냥 지켜보고 있고. ‘공인인증서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box]

참고로 새로 만들어진 깔끔한 www2014.kr 홈페이지는 결제 페이지를 제외한 모든 곳에 utf-8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 만약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접속한 게 아니면 액티브엑스를 설치하라는 문구는 뜨지 않다가 결제 버튼을 눌렀을 때 바로 액티브엑스가 필요하다는 팝업을 띄워줍니다. 물론 다 깨져서 뭐라고 하는지 정확한 문구는 알 수가 없지만요.

www2014를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아닌 브라우저로 접속하면 이런 화면이 뜬다
올앳페이 플러그인은 윈도우 계열의 OS에서만 설치, 사용이 가능하답니다. 한국인 여러분.

외국인은? 액티브엑스/공인인증서가 뭔가요? 먹는 건가요? 우걱우걱

그렇다면 외국인이 결제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런 액티브엑스로 놀라게 하는 설치화면이나 인코딩 와장창 깨진 팝업창이나 “윈도우 계열의 OS만 지원한다”는 반WWW 같은 문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www2014 결제화면 1/2
결제 정보를 알려주는 이런 우아한 화면이 떴다가
www2014 결제화면 2/2
어떠한 설치 프로그램이나 인감증명서 따위는 요구받지 않고 결제를 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우아한가요. 외국인은 저 부드럽게 진행되는 웹 서비스를 이용할 자격이 있고, 아직 한국인들은 이런 우아함을 누릴 자격이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www2014 측은 어떻게 한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할까요? 어떤 첨단장비가 있길래 구분을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런 건 없습니다. 회원 등록할 때 회원이 입력한 국적을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이용자가 자신의 국적을 Korea라고 입력하면 공인인증서 결제 진행을 밟는 거고요, U.S.A로 입력하면 우아한 결제 진행을 밟게 되는 겁니다.

참 세련된 방식이죠?

남에게 비치는 우리 모습만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ODI(Open Data Institute)의 연구팀 총괄이 www2014에서 결제를 하다가 한국 사람들이나 겪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최적화 문구를 맞닥뜨린 모양입니다. 그는 바로 이 사실을 트윗했습니다.

한국인이 아닌 그가 그 페이지를 만난 건 버그였겠죠. 페이게이트의 이동산 이사가 그게 한국인이 겪는 문제라고 알려주자

그는 결제에 액티브엑스를 이용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랍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저는 이 장면을 이미지로 만들어 노액티브엑스 캠페인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습니다. 그 이미지 안에는 태극기와 함께 “대한민국 만세!”라는 문구가 들어있습니다.

정부는 이제까지 국내의 이용자, 전문가, 사업자가 온라인 결제, 공인인증서, 액티브엑스/플러그인과 관련해서 불편하다, 개선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르쇠로 일관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류 드라마 성공으로 중국인 관광객의 불편을 느끼자마자 언론 플레이를 하고 외국인을 위해서만 규제를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국민이 느끼는 모순과 불편보다는 외국인에게 어떻게 비치는가를 더욱 중요시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조적인 심정으로 이미지를 올린 거죠.

제가 이렇게 이미지를 올리자 대부분은 저의 자조적인 심정에 동의했지만 행사에 대해 매우 상세히 알고 있는, 행사관계자로 추정되는 분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여늬 국제학술대회처럼 외국인들은 공인인증서없이 등록하고, 국내분들은 공인인증서로. 3/24 일부로 873명 등록, 외국인이 585명 등록했습니다. 학회 홈페이지가 내국인/외국인 구분이 등록 맨 첫페이지부터 되어 있지 않아 "소수"의 사람들에게 혼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회는 현재 예상 참석인원 1000명 (조직위 등등 무료등록자 포함) 이상으로 여늬 해와 같이 성황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물론 액티브X가 폐지되면 학술대회 조직위에서 국내외 등록을 따로 준비하느라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고, 외국사람들에게 혼동주지 않게 웹페이지 설계하지 않아도 되서 국제학술대회 활동할때 신경써야할 잡일이 하나 줄어들어 좋을 것 같습니다. FYI 국내에서 열리면서 회계도 국내 학회/단체가 맡는 모든 학술대회에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국내에서 열리면서 외국학술단체(IEEE/ACM)이 회계를 맡으면 생기지 않는 문제입니다.

제가 저 글을 보고 해석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미 국내외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무사히 잘 등록을 했다. 외국인이 www2014 관련해서 특정 브라우저만 최적화되어 있다는 문구를 본 것은 실수다. “소수”의 외국인만 공인인증서 문구를 본 것이니 별문제 없다. 이런 게 우리뿐만 아니다.”

저 댓글을 보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다른 학술대회, 컨퍼런스도 아니고 월드와이드웹과 관련된 행사인데 그냥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답변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어서 몇 가지 물어보겠다고 하니 비실명인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 신분을 밝히고 전화번호, 이메일 등 제 정보를 함께 적어 궁금한 내용에 관한 메시지를 보냈는데,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분이 www2014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 준비한 행사에 잡음이 끼는 것에 서운했을 수도 있습니다. ‘노액티브엑스’에 올린 이미지나 이 글이 www2014를 악의 원흉으로 모는 건 아닙니다. 한국의 어이없는 상황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www2014 를 준비한 한국의 주최 측도 이 비판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웹의 국제 표준을 개발하고 장려하는 w3c의 후원을 받아 웹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컨퍼런스인데 이 행사와 관련하여 아무도 공식적으로 한국의 비정상적인 온라인 결제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전문가들이 모여 웹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인데 지금 당장 현실에 존재하는 불편하고 이상한 점을 이야기하지 않고 (개인적으로만 이야기하고) 공식적으로는 쉬쉬하고 행사가 잘 진행되길 바란다니, 이 얼마나 웃픈 코미디입니까.

https://twitter.com/WWW2014_Korea/status/448404659766456320

액티브엑스를 이용하는 것에 놀라는 ODI의 연구팀 총괄에게 WWW2014 주최 측은 ‘이 액티브엑스는 한국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영어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액티브엑스를 쓰는 게 우리도 유감이다’, ‘우리도 창피하다’와 같은 별다른 설명 없이 느낌표까지 붙인 것 보니 ‘우리가 외국인을 귀찮게 하려는 건 아냐!’ 라는 심정을 담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고로, ODI의 공동창립자 겸 소장은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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