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우크라이나 대통령)를 백악관에 불러서 호통을 쳤다. JD 밴스(미국 부통령)가 “무례하다”고 비난했고 젤렌스키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트럼프가 문을 열어줬다). 기자회견은 취소됐다.

두 가지가 놀라웠다.

  • 첫째,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
  • 둘째, 이걸 굳이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불발된 협상.

  • 젤렌스키: 푸틴이 약속을 안 지키면 어쩔 건가.
  • 밴스: 외교가 평화를 만든다.
  • 젤렌스키: 무슨 외교 말인가.
  • 밴스: 당신 나라의 파괴를 끝낼 수 있는 외교 말이다. 미국 언론 앞에서 미국 행정부를 공격하는 건 무례한 행동이다.
  • 트럼프: 당신은 지금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 젤렌스키: 전쟁 중에는 누구나 문제가 있다. 당신들은 멋진 바다가 있고 지금은 느끼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느끼게 될 것이다.
  • 트럼프: 우리가 뭘 어떻게 느낄지 신경쓰지 마라. 당신은 카드가 없다.
  • 젤렌스키: 이것은 카드 놀이가 아니다. 나는 전쟁 중인 대통령이다.
  • 트럼프: 당신은 3차 세계 대전을 두고 도박을 하고 있다. 당신을 지지한 이 나라에 무례한 일이다.
  • 밴스: 오늘 고맙다는 말을 한 적 있나. 한 번도 안 했다. 그냥 고맙다고 말해라.
  • 젤렌스키: 여러 번 말했다. 다시 한 번 고맙다.
  • 트럼프: 거래를 하든가 우리가 나가든가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 우리가 나가면 당신은 혼자 싸워야 한다. 그런데 전혀 고마워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건 좋지 않다.

이게 왜 중요한가.

  • 뉴욕타임스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 일단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중단할 가능성이 크다. 젤렌스키에게는 카드가 없는 게 맞다.
  • 폴리티코는 ‘괴롭힘(buylling)’이라고 평가했다. “입이 떡 벌어질 일(jaw-dropping)이었다”.
  • 미국은 단순히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내쫓은 게 아니라 동맹을 내쳤다. 전선이 불분명하게 됐다.
  •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를 부당하게 점령해서는 안 된다는 게 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공동의 믿음이었다. 형식적으로나마 세계의 경찰 역할을 했던 미국이 침략국과 손을 잡고 피해국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 젤렌스키가 앉았던 그 자리에 한국의 대통령이 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자.

트럼프의 주장.

  • “미국의 지원이 없으면 우크라이나는 진작 졌을 것이다.”
  • “평화 협정은 미국이 원하는 조건으로 맺어야 한다.”

젤렌스키의 주장.

  • “우리는 정의롭고 항구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 “푸틴은 계속 약속을 어겼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니다. 휴전 협상을 하려면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확실한 약속이 필요하다.”
  • 이를테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넣어주고 국경을 지켜달라는 요구다.

“훌륭한 텔레비전이 될 것이다.”

트럼프는 왜 그랬을까.

  • 악시오스는 세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 첫째, 감히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트럼프는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 둘째, 정장을 입지 않고 나타난 것도 트럼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 셋째, “무슨 외교 말인가. JD.” 밴스에게 소리를 지른 게 결정적이었다.
  • 악시오스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트럼프는 정치를 사업으로 접근한다. 트럼프와 푸틴은 동등하지만 트럼프와 젤렌스키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 트럼프는 측근들에게 높은 수준의 복종을 요구한다. 트럼프와 밴스가 번갈아가며 “당신은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한 건 진심이었을 것이다. 젤렌스키는 트럼프의 요구를 거부했다.
  • 한때 트럼프의 측근이었던 레프 파르나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 “트럼프는 마피아 두목처럼 백악관을 운영한다. 러시아와 중국을 다른 마피아 패거리처럼 보고, 젤렌스키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젤렌스키가 닥치고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젤렌스키도 웬만하면 받을 생각이었지만 밴스 때문에 망쳤다.”

이익과 평화.

  • 트럼프가 던진 프레임은 이런 거다.
  • “나는 이익이 아니라 평화를 원한다.”
  • “그런데 젤렌스키는 평화가 아니라 이익을 원하는 것 같다.”
  • 트럼프가 제안한 광물 협상은 우크라이나의 광물과 가스, 석유 등 천연자원 수익의 50%를 5000억 달러가 될 때까지 미국에 지불하라는 강탈에 가까운 조건이다. 전쟁 지원에 쏟아부은 것 이상을 받아야겠다는 논리다.
  • 트럼프는 “나는 평화를 이룰 사람을 원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가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그는 계속 싸우고, 싸우고, 싸우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핵심은 이것이다.

누가 우리 편인가.

의도된 사고였나.

  • 카메라가 돌기 전까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 실제로 회담 직전까지 광물 협상이 원만하게 체결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 트럼프가 린지 그레이엄(미국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계약에 서명할 때 맨 앞줄에 앉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레이엄도 회담 시작 전 젤렌스키에게 “미끼를 물지 말라”고 조언했을 정도다.
  • 회담 직후 그레이엄은 “트럼프와 밴스가 자랑스럽다”고 평가했다. 젤렌스키에게 실망하기도 했겠지만 트럼프의 눈치를 본 모양새다.
  • 마코 루비오(미국 국무부 장관)는 “어떤 대통령도 용기를 내지 못했던 방식으로 미국의 가치를 지켰다”고 평가했다.
  •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를 망칠 구실을 찾고 있었고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판을 깬 거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 샘 그린(런던킹스칼리지 교수)은 “의도된 사고였다”고 말했다. 일부러 망신을 줄 작정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다.
  • 폴리티코는 “전멸 직전의 국가가 그런 전략적인 실수를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백악관 관계자의 코멘트를 소개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사망자 수를 부풀리려 하고 러시아는 줄이려 한다. BBC에 따르면 러시아 군인 사망자 수는 북한 군 사망자를 포함해 17만~23만 명 정도다. 우크라이나 군 사망자 수는 7만 명 수준이다.

엇갈린 평가.

  • 미국 정치권은 충격에 빠졌다. 러시아는 신이 났고 유럽연합은 뒷수습에 나섰다.
  • 러시아: “건방진 돼지가 백악관에서 제대로 한 방 먹었다. 트럼프가 옳다.”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전 러시아 대통령).
  • 유럽연합: “젤렌스키는 혼자가 아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유럽위원회 위원장).
  • 프랑스: “나는 우리가 3년 전에 우크라이나를 돕기로 한 결정이 옳았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미국과 유럽, 캐나다, 일본을 비롯한 많은 나라를 말한다.” / 에마뉘엘 마크롱(프랑스 대통령).
  • 미국 민주당: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들로부터 멀어지고 세계 민주주의와 미국의 가치에 위협이 되는 푸틴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여서 괴롭다. 러시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게 문제다.” / 리사 머코스키(미국 상원의원).
  • 공화당 의원들은 당혹해하면서도 트럼프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다. ‘바이든-날리면’ 사건 때 국민의힘 의원들을 보는 것과 같다.

냉정한 평가.

  • 밴스가 젤렌스키를 자극한 건 맞지만 어쨌거나 판을 깬 건 젤렌스키다. 존엄을 지켰지만 훨씬 더 불리한 상황이 된 건 사실이다.
  • 어쨌거나 트럼프가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던 것도 사실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 돈을 더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이 모든 걸 비즈니스로 본다.
  • 트럼프가 푸틴에게 우호적인 것도 맞다. “푸틴은 나와 함께 많은 일을 겪었다”고도 했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두고 한 말이다.
  • 푸틴에게는 실패한 전쟁이다. 사망자가 10만 명에 육박하지만 우크라이나 영토 20%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트럼프는 그런 푸틴을 도와주려 한다.
  • ‘가짜 평화’라는 젤렌스키의 우려도 근거가 없지는 않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안전에 별 관심이 없다.

TMI 1: 젤렌스키와 머스크의 옷차림.

  • 젤렌스키는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들과 연대를 강조하기 위해 정장을 입지 않는다.
  • 평소 입던 대로 나타났는데 트럼프는 “다들 차려입었네”고 비꼬았다.
  • 한 기자가 젤렌스키의 옷차림을 두고 “정장이 있긴 한가”, “백악관을 존중하지 않는 건 문제가 있다”고 하자 “전쟁이 끝나면 입겠다”, “당신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을지도 모른다”고 받아쳤다.
  • 일론 머스크(테슬라 CEO)가 마가(MAGA) 모자를 쓰고 국무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질문이다.

TMI 2: 출입기자는 우리가 정한다.

TMI 3: 트럼프의 뒤끝.

  • 트럼프는 원래 젤렌스키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
  • 트럼프가 첫번째 재임 중이던 2019년 젤렌스키와 통화하면서 조 바이든(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의 아들 사건을 수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거절했다. 트럼프는 이 사건으로 탄핵을 당했다가 복귀했다.

전망: 트럼프와 푸틴이 원하는 건 전쟁의 종식이 아니다.

  • 트럼프는 “그가 준비가 되면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젤렌스키 입장에서도 명분이 필요하다.
  • 광물 협정도 굴욕적이지만 트럼프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 젤렌스키는 판을 깨기보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아쉬운 건 젤렌스키다. 유럽연합도 협상 재개를 압박하고 있다. 젤렌스키가 X(트위터)에 “미국의 지원 덕분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서 “미국의 모든 지원에 감사드린다”는 글을 남겼다.
  • “광물 협정은 안보 보장을 향한 첫 번째 단계가 될 것”이라면서도 “미국의 지원 없이는 어렵다”면서 “NATO에 가입할 수 없다면 확실한 안전 보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 러시아는 잃을 게 없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선언한 상황이라 러시아는 전쟁을 더 길게 끌고 가려 할 가능성이 크다. 조금이라도 우크라이나 땅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다면 휴전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 유럽연합이 우크라이나를 도울 수는 있지만 우크라이나가 이기게 만들 수는 없다. 다만 한동안 미국과 유럽연합이 거리를 두는 구도로 갈 가능성이 있다.
  • 젤렌스키가 사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유럽연합의 지지도 확인했고 우크라이나에서 지지율도 여전히 압도적이다.
  •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트럼프와 젤렌스키 둘 다 협상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 유럽연합이 중재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조르자 멜로니(이탈리아 총리)는 “서방의 분열은 우리 모두를 약하게 만들고 우리 문명의 쇠퇴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이롭게 할 것”이라며 “힘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유라는, 우리 문명을 세운 원칙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폴리티코는 “트럼프가 평화를 위해 준비가 되면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는 백악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 여전히 가능성은 남아있지만 젤렌스키가 훨씬 불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시작해야 할 거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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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여전히 러샤는 악이라는 되도않는 이분법으로 이 상황을 보려하니 그저 표피적인 분석만 가능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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