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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비례후보를 알리고자 지지 당부 글을 썼다. 두 가지 비판이 있었다. 그 비판에 답한다.

당장의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


첫 번째 비판 취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비판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지지를 호소하는 글에서까지, 당선 여부와 관계없이 지지해달라는 식으로 질 걸 알지만 그럼에도 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만 호소하는가?

이왕 참여하기로 했다면 당신이 지지하면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고 해야지, 진다는 것을 전제하는 건 일종의 패배주의다.

내 글이 상당 정도 패배주의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원래 내가 강한 이상주의적 지향과 강한 현실주의적 판단을 동시에 지닌 좀 모순적인 사람이다. 하긴 사람은 누구나 일정 부분 모순적이니까 이게 나만 무슨 특별한 별종이라서 그런 건 전혀 아니지만.

이번 선거만 보자면 나는 우리 노동당이 비례 선거에서 봉쇄조항인 3%를 넘어서 비례 의석을 획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솔직히 판단한다. 물론 첫 번째 비판대로 패배를 미리 전제할 필요는 없다.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이 당신과 당신 주변에서부터 우리 노동당을 지지해 준다면 당연히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우리 노동당의 비례 후보가 그 어떤 정당의 비례 후보보다도 훨씬 낫고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므로.

하지만 당장 승리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에게 선거 아니 진보정치는 한 번의 승부로 결과가 결정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간 진보정치가 계속 헤맨 것에는, 당장의 선거에서의 승패 내지 의석 획득 여부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탓도 매우 크다.

그래서 나는 ‘질 걸 뻔히 알면 안 나오는 게 유권자들을 갈등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라는 첫 번째 비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번에 지더라도,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노동당의 정책이나 지향을 알리고 우리가 여전히 싸우고 있음을 알림으로써, 다음번 승리를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히 질 것이라고 나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에는 우리도 이길 수 있다고 믿기에 정당 활동을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사람이 쉽게 변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사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진보에 대한 믿음 아니 사람에 대한 믿음 자체가 불가능하다. 즉 나는 언젠가는 우리가 승리하리란 것을 믿는다.

‘당신’의 승리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더 중요한 비판과 물음은 두 번째다:

두 번째 비판


그렇게 ‘승리’ 즉 의석을 획득하고 나아가 ‘집권’을 해본들 그게 당신을 지지해 준 유권자인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가 찍으면 당신들이 당선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왜 굳이 당신들을 찍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국회에 들어가고 나면 그 뒤에 딴짓 안 한다는 보장이 있는가?

두 번째 비판(질문)은 그동안 당선된 진보 정치인들을 겪어본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욱 뼈아프다. 의회 등 제도권에 진출한 진보정치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는 일정하게 타당한 말일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그중에서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꼭 옳은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내 답변이 두 번째 질문에 적절한 답변이 될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타산지석, “(2012년) 5월 6일 마르세유, 프랑수아 올랑드의 승리” 미테랑 이후 최초의 사회당 대통령이 된 올랑드는 그 이후 실정을 거듭하며 극우파 마린 르펜의 득세에 빌미를 제공했다. 레임덕이 최고조였던 2016년에는 지지율이 4%대까지 추락했다.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사회당의 로고에도 붉은 장미가 들어간다. (sandrine magrin, CC BY)

하지만 두 번째 비판의 문제의식에 동의하기 때문에라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그간 너무, 누군가를 ‘대변한다’ 또는 우리가 들어가서 어떤 것을 ‘제도화하겠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우리를 지지해달라는 식의 논리에만 매몰된 것이 아니었던가라는 점.

그건 일종의 엘리트주의이며 능력주의다. 뭔가 나보다 (스펙이든 스토리든 경력이든 뭐든) 훨씬 나은 누군가가 국회에 진출해서 그들이 우리를 대변하고 우리를 위한 각종 제도개혁에 노력하는 것이 정치 내지 정당의 역할이라는.

그러나 정당은 (적어도 원론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대의제하에서 인민과 대표자를 아래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바로 정당이다. 특히 진보정당은 더욱 그러하다. 스펙 좋은 누군가가 나를 대변해주는 것이라면 그건 보수정당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는 대변하는 것조차 제대로 안 하지만). 진보정당은 억압받고 차별받는 피지배계급과 소수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것이 전달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나를 대변해 주는 정당이 아니라 내가 함께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노동당-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22대 총선 정책협약식. 2024. 2. 29. 노동당 제공.

물론 제도화는 중요하다. 오랫동안 정책을 담당해 온 내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제도가 전향적으로 개선되면 당장 숨 쉴 구멍이 생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도 개혁에는 결국은 ‘쪽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쪽수가 없거나 부족한 소수 정당은 끊임없이 타협 내지는 애초의 취지를 일정하게 훼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도 개혁이 과연 의회에서의 쪽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실제로 중요하고 핵심적인 제도개혁은 제도권 내의 쪽수보다는 이른바 ‘사회운동’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화물연대나 플랫폼노동자들의 노조 설립이, 한국의 노동법이 그걸 보장해 줘서 된 게 아니지 않는가? 스스로 권리를 쟁취하려고 제도와 관계없이 싸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화물노동자 결의대회. 화물연대본부. 2023. 09. 23.

결국 정당보다는 사회운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냐? 그럼 그냥 사회운동을 하면 되지, 왜 정당을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또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정당에서 활동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각각의 사회운동과 정당이 다른 것은, 사회운동은 해당 집단의 요구 내지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일차적이지만 정당은 그런 요구 내지 이해관계에 기반하지만 이를 보편화해서 제기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더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더 낫다는 것, 우리 사회 모두가 이를 위해 그럴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각종의 제도를 도입하는 등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는 역할 이른바 헤게모니가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역할이다.

‘내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가 아니라 ‘내 이익이 바로 당신들 내지 우리 사회 전체의 이익이기도 하다’고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진보정당의 역할이다. 물론 이건 말은 좋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당장은, 내 이익은커녕 존재 자체부터 차별받고 억압받는 모든 몫 없는 자들이 함께하는 작은 터전이라도 만들어내는 것이 당면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면과제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언젠가는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수정당이라도 정당은 우리 사회를 책임지겠다는 관점에서 발언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승리 내지 우리 사회를 책임지게 될 때 다른 정당과 똑같은 정당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선출된 정치인이나 정당의 지도부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정당을, 꼭 정당이 아니라도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는 자세일 것이다.

자세만으로 되냐고? 물론 자세만으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무엇무엇을 하겠다고 쉽게 말하기 이전에,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그런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노동당 내에서도 그런 자세가 계속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는 약속만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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