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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든다는 것

책을 읽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줄고 있다지만, 서점엔 책들이 가득하다. 책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또 한 권의 책을 얹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빡빡한 조직 생활에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쯤부터 ‘이러다 죽겠다’ 싶은 마음에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푸라기 같은 일이었지만 이내 그 일은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글을 써온 지 몇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블로그 계정이 정지를 당했다.

누군가 내 블로그의 글을 베껴가고서는 도리어 나를 “저작권 침해”로 신고한 것. 이로 인해 일련의 너저분한 일들을 겪으면서 ‘이 글은 내 것’이라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물리적인 증거물을 손에 쥐고 싶었달까. 그렇게 시작한 출판 작업을 통해 나의 첫 여행기이자 첫 출판물인 [이탈리아, 고작 5일]이 세상에 나왔다.

독립 출판, 자비 출판 등 출판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책을 만들려고 하니 모르는 일투성이였다.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시행착오였다. 아무튼,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과정(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을 거친다.

하나, 원고를 완성하다 

출판의 시작은 당연히 원고의 완성이다. 책을 만들면서 방향이 조금 바뀔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완성된 원고가 있어야 한다. 블로그에 적는 글은 누구나 다 무료로 볼 수 있는 글이니 책임감이 조금 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돈을 주고 책을 사서 보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고 성실하게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요한 세부 정보들을 좀 더 검증하고 좀 더 추가했다. 물론 현지로 재취재를 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원고지

둘, 기획안을 작성하다

원고들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건지, 노리는 주요 독자층은 누구인지, 홍보는 어떤 식으로 할건지 등에 대한 기획안을 대강이라도 만들어본다. 블로그의 글들을 그대로 인쇄해서 묶는 작업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책을 만들고 싶다는 방향성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혹은 회사에 발랄하게 사표를 내고 장기 여행, 살아보는 여행을 떠나는 게 유행이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쓴 책은 서점에 이미 많다. 내 기준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그다지 와 닿지도 않고 심지어 난 그런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느끼는 타입이기 때문에 나는 내 일상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짧은” 여행, 그러니까 가장 흔한 형태의 여행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셋, 출판사들에 투고하다

들어가는 비용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출판은 기획 출판과 자비 출판으로 나뉜다. 기획 출판은 출판 비용을 출판사 쪽에서 모두 대는 형태고, 자비 출판은 내 돈으로 대는 것. 당연히 처음에는 기획 출판을 원했기 때문에 이쪽을 염두에 두고 여행 관련 도서들을 많이 낸 출판사들을 찾아 샘플 원고와 기획안을 투고했다. 그리고 회신을 받기까지는 꽤 오래 기다려야 했다.

이메일 편지

넷, 출판사에서 거절 통보를 받다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부정적인 회신을 보내왔다. 요즘은 여행이라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닌 데다가 다른 주제에 비해 점검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 여행 관련 출판 자체를 출판사에서 꺼린다고. 그리고 꼭 여행서가 아니어도 책을 사서 보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기획 출판이 진행되는 경우도 매우 적다고 한다.

한 출판사에서는 철저한 안내서 형태로 원고를 써줄 수 있다면 기획 출판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원한 것은 안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출판사에서는 나에게 이런 회신을 줬다.

“요즘은 저자가 곧 브랜드인데 본인이 유명인이세요? 완전 무명이잖아요.”

기획출판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독립 출판과 자비 출판의 갈림길에 섰다. 둘 다 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니 물론 이쯤에서 포기할 수도 있지만 이미 원고 정리와 기획안 작성까지 마쳤던지라 그러기 싫었다.

스톱 금지 그만 멈춤 반대 거절

다섯, 독립 출판이냐 자비 출판이냐

독립 출판은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책을 유통하려면 출판사를 하나 설립해서 사업자 등록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추후 벌어질 모든 일들 역시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교정/교열을 보는 일, 내지와 표지를 디자인하는 일은 돈을 주고 외주 전문가를 쓸 수도 있지만 어디서 어떻게 전문가를 구하지? 양심적이고 실력 있으면서도 저렴한 비용으로 일을 처리해주는 인쇄소와 제본업체는 또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까지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팠다.

우여곡절 끝에 책이 잘 만들어졌다고 해도 갈 길은 멀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서점 담당자들에게 영업은 어떻게 하지? 그리고 인쇄된 책은 물류창고에 보관해야 하나? 아니면 유통대행업체와 계약을 해야하나? 등등 고민거리가 끝도 없다.

출판의 경험이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과연 이런 과정들을 모두 잘해낼 수 있을까? 심지어 회사에 다니면서? 모든 걸 내 손으로 해낸다면 분명 성취감도 생길 일인 것 같긴 한데 아직은 자신이 없다. 내가 비용을 대고 출판사에서 일련의 작업을 대행해주는 자비 출판으로 해야겠다.

여섯, 계약서를 작성하다

한 출판사와 자비 출판 형태로 진행하기로 하고 견적을 받았다. 수긍할 만한 견적이다. 그런데 대형 체인 서점으로 유통하려면 책이 최소 300부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 300부? 적은 듯 많은 듯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과연 그게 다 팔릴까? 하지만 최소 부수가 그렇다고 하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렇게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고 몇 번 등기가 왔다 갔다 했다. 근로 계약서 말고는 써본 적이 없는데 어느새 난 ‘작가’가 되어 있었다.

서구의 문화는 계약을 체결하는 의사표시를 '서명'을 통해 완결하는 문화다. (사진: LOSINPUN, CC BY NC SA)

LOSINPUN, CC BY NC SA

일곱, 출판 비용을 마련하다

자비 출판 형태로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돈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크라우드 펀딩을 받았다. 텀블벅 사이트를 활용해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지원을 받았다. 단순히 ‘제가 책을 만들건대 비용을 지원해주세요’보다는 구미가 당기게 소개 글을 써야 지원을 받기가 쉽다.

타인의 개인적 체험보다 객관적인 정보들에 초점을 두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 이 과정에서 원고에 미술관, 박물관 관람 Tip을 추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텀블벅은 사이트 정책상 반드시 후원자들에게 ‘선물’을 지급해야 한다. 어떤 선물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예정에도 없던 사진엽서를 제작해 인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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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끝없는 교정과 교열, 그리고 디자인

원고를 가지고 내지를 디자인하고 교정과 교열을 보았다. 대부분 작업은 출판사에서 해주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오·탈자를 찾기 위해 나도 눈에 불을 켰다. 하지만 자꾸 보면 볼수록 눈에 익어서인지 점점 더 오탈자 찾기가 어려워져 최종 확인 때는 남편까지 동원했다.

어려운 작업을 요구한다면 당연히 추가 비용이 들어가겠지만, 그게 아닌 선에서는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출판사 쪽에 확실히 요구하는 것이 좋다. 나는 여태껏 내가 꼼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는 느낌이었다. 기왕 만드는 거 제대로 해야지! 라는 생각에 표지는 물론이고 내지 상의 사진 배치, 정보 상자의 형태와 색깔, 소제목의 말머리 등 손댈 수 있는 부분에 모두 손을 댔다. 군말 없이 나의 의사를 존중해준 출판사에 감사를!

002

아홉, 인쇄에 대한 것들을 결정하고 인쇄에 들어가다

인쇄에 들어가기 전 인쇄 세부 사항들을 결정해야 한다. 당연히 모니터에서 보는 것과 실제 인쇄물은 색감이 다르다. 인쇄라는 건 그날의 온도, 습도 등 외부환경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차이를 최대한 줄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확실히 보장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다년간 작업을 해온 인쇄소의 노하우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믿으라는데 믿어야지 별수 있나 싶어 걱정은 접어 넣었다.

다만 확실히 내가 정해야하는 건 내지의 종류. 모조지와 뉴플러스지 중 결정해야 했는데 둘의 느낌이 무척 달라서 이 또한 엄청난 고민 끝에 간신히 모조지로 결정했다.

열, ISBN을 받다

출판사에서 ISBN을 받아주었다. 공식적으로 내 이야기가 책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책 표지 뒤쪽에 인쇄된 바코드 모양의 ISBN은 ‘도서 식별 번호’인데 사람으로 치자면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이다. 이 번호가 없으면 일반 서점에서 유통할 수가 없다. 어찌 보면 형식적인 일이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한데 출판사에서 알아서 해주니 편했다.

열하나, 책이 나왔다

인쇄소에 작업을 맡기고 2~3일 정도 지나자 책이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요청한 분량(서포터즈들에게 제공할 선물)의 책이 집으로 배달왔다. 결과물을 손에 쥐면 뿌듯하다거나 가슴이 벅차오를 줄 알았는데 그렇다기보단 ‘겁도 없이 덜컥 큰 일을 저질렀구나’ 싶은 기분이었다. 이제야 그게 실감나다니! 정신을 차리고서는 얼른 포장을 해 서포터즈들에게 택배를 보냈다. 편의점 택배가 있어 감사했다.

011

열둘, 서점 배부를 시작하다

출판사에서 각 오프라인 서점의 구매 담당자를 만나 신간 미팅을 가진 후 배부 분량이 결정되었다고 연락해왔다. 신기했던 건 담당자마다 보는 관점이 다른지 각 서점으로 입고되는 분량이 크게 차이가 났다는 점. 아무튼, 정해진 분량만큼 하루 이틀 내에 출고예정이며 조만간 서점에 진열도 될 거라고. 찾아보니 온라인 서점에는 이미 내 책이 등록되어있다.

열셋, 독립 서점에 입점

일반 서점에의 배부는 출판사가 알아서 해주었지만 나는 개성 있는 독립 서점에도 일부 입점하고 싶었기 때문에 독립 서점들을 수소문했다. 엄밀히 따지면 내 책은 독립출판물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독립 서점에선 독립 출판물과 함께 일반 출판물도 취급하기 때문에 입점에 제한을 받지는 않았다.

대신 서점 주인의 마음에 드는 책만 입점할 수 있어서 여러 곳에 메일을 보내 책을 입점시켜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결과적으로 서울 지역(노린 건 아닌데 우연히 그렇게 됐다)의 6개 독립 서점에 책이 입점되었다. 입점을 위해 책을 짊어지고 직접 각 서점을 방문했는데 이쪽 세계도 재미있는 듯해 그 과정은 고생스럽다기보단 즐거웠다.

013

열넷, 홍보 그리고 또 홍보 – 과연 책이 팔릴까?

SNS 활동을 하긴 하지만 팔로워가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고, 당연히 홍보 효과도 적겠지마는 열심히 SNS에 올렸다. 개인이 할 수 있는 홍보는 지인들의 주머니를 털거나 혹은 SNS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각 독립 서점에서 올려놓은 게시물들이 더 외부 노출은 많이 된 것 같다.

014

열다섯, 기획 출판으로 전환하다

몇 주가 지나고 자비 출판 형태로 진행되었던 1쇄의 재고가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프라인 서점에 진열되어있는 책들이 남아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완판은 아니지만, 물류 창고에는 책이 남아있지 않아 온라인 주문 건들에 대해 배송이 못 나가고 있다고.

그리고 1쇄가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으니 2쇄는 기획 출판 형태로 찍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계약 내용이 바뀌면서 새로운 계약서를 쓰고 등기가 왔다 갔다 하고.

001

책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또 한 권의 책을 얹는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내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그 자체보다 더 좋았던 건 이런 작업을 거치며 내가 몰랐던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낯선 곳으로 잠시 떠나는 게 “여행”이듯 내가 몰랐던 새로운 분야의 일을 잠시 경험해본 것 또한 일종의 “여행”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글도 마치 여행기처럼 느껴진다) 만약 처음부터 기획 출판 형태로 진행되어 출판사에 원고만 넘기고 한 발짝 뒤에 서서 모든 것을 관망했다면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새로운 세계.

겪어보니 책이란 건 모든 면에서 사람 손이 참 많이 가는 결과물이다. 고로 출판이란 적어도 당분간은 알파고가 대체하지 못할 영역인 듯싶다. 출판 업계에 종사하시는 모든 분께 파이팅을 외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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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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