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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렇지만 외부의 투서(投書)로 시작되는 수사는 잘해봐야 본전이다. 아무 이유 없이 투서를 넣지는 않겠지만, 투서자의 신분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투서자를 불러서 물어볼 수도 없고 오로지 투서의 내용에 기초해서 수사를 진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한 달 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강 검사 방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의 투서가 배달되었다. U건설이 중앙부처 공무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수차례 제공해 결국 두 건의 관급공사를 수주했다는 내용이었다.

공무원이 개입된 비리는 특수부 검사들이 사명감으로 파헤쳐야 할 사건이다. 특히 △△지검장께서는 일선 검사들에게 공무원의 비리 사건만은 발본색원하라는 엄명을 내린 상황이라 강 검사는 이 사건을 반드시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의욕과는 달리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강 검사는 백지에 관련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려보았다.

U건설 황OO 사장, 중앙부처 권OO 국장, 채OO 국장, 신OO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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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건설 황 사장은 올해 예순한 살 된 자수성가형 경영자다. U건설은 3군에 속하는 중소 건설업체로서 최근 몇 년간 관급공사를 많이 수주해서 급성장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중앙부처와 유착돼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긴 했다. 투서는 U건설의 경쟁업체에서 제기한 듯한데 확실한 증거가 없어 수사 책임은 온전히 검사가 져야 한다.

중앙부처 국장을 대상으로 한 수사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우선 강 검사는 황 사장과 권 국장에게 수사계장을 보내 정중히 몇 가지를 물어봤다. 황 사장이 권 국장, 채 국장과 몇 번 식사를 한 사실은 드러났지만 황 사장과 권 국장은 고등학교 선후배 간이어서[footnote]황 사장이 권 국장의 10년 선배였다.[/footnote], 동문 선후배끼리 만나서 식사했을 뿐 뇌물 제공이나 부정 청탁은 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수사가 지지부진할 즈음, 두 번째 투서가 강 검사 방으로 우편 접수되었다. U건설의 회계장부를 깊게 파보면 분명 펑크 난 돈이 있고, 의심되는 공무원 및 가족들의 계좌를 추적해보면 돈이 입금된 흔적을 발견할 거라며 코치(?)를 하는 내용이었다.

강 검사는 스타일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투서를 근거 자료로 첨부하여 법원에 U건설 회계자료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을 청구하고, 관련 공무원들과 가족, 형제들 예금 계좌에 대한 내역 조회를 신청했다. 막상 U건설로부터 회계자료를 압수해 수사관들을 시켜 조사해보니 불분명한 돈의 흐름이 많이 발견되었다.

사실 중소 건설업체들의 회계장부는 대기업과 달리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돈이 다소 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바로 뇌물 공여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강 검사는 U건설 회계 담당자들을 불러서 강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회계장부를 보니 문제가 아주 많아요. 황 사장이 개인적으로 빼간 돈들, 그리고 비자금 형식으로 만들어서 인출한 돈들을 다 밝힐 겁니다. 아울러 돈이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여러분들도 배임이나 횡령의 공범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회계 담당자들은 자신에게 형사 책임이 떨어지는 상황을 두려워한 나머지 황 사장이 개인적으로 수시로 현금을 많이 인출해 갔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비자금을 운용한 방식을 굳이 비교하자면 세련된(?) 대기업에 비해 아주 순진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강 검사의 목표가 황 사장의 개인 비리(횡령, 배임) 적발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고위 공직자들의 커넥션을 밝혀내는 것인데, 고위 공직자들과 기업인의 연결고리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았다.

공무원들의 계좌를 뒤져봤지만 불시에 큰돈이 입금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뇌물을 받는 이들은 꼬리를 밟힐까 두려워 절대 자신이나 관련자의 예금 계좌에 입금하지 않고 별도로 모처에 보관하거나 무기명 금고에 보관해둔다.

강 검사는 별 뾰족한 방법이 없어 황 사장을 수시로 검찰로 부른 다음 때로는 호통을 치고 때로는 회유하면서 공무원들과의 유착관계를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황 사장님. 지금 회사 계좌에서 돈이 상당히 비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것만 따져도 업무상 횡령, 배임입니다. 법정형이 상당히 무겁습니다. 하지만 황 사장님이 이 돈을 어쩔 수 없이 공무원들에게 줬다고 진술하면 황 사장님에 대해서는 충분히 정상을 참작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뇌물 공여 자체도 ‘증뢰죄’[footnote]뇌물을 약속·공여 또는 공여의 의사를 표시하거나, 이에 공할 목적으로 제3자에게 금품을 교부하거나 그 정을 알면서 교부받을 때에 성립하는 범죄[/footnote]가 되지만 수사에 협조해 주신 점을 고려해서 기소유예 등의 불기소 처분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깃은 부정하고 부패한 공무원들입니다!”

하지만 황 사장은 회사 계좌에서 비는 돈은 모두 자기가 개인적으로 급한 데 쓰거나 유흥비로 사용했을 뿐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준 적은 결코 없다는 기존 태도를 되풀이했다. 강 검사의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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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강 검사는 수사관으로부터 황 사장이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고혈압이 있던 황 사장은 계속되는 수사와 그로 인한 회사 사정의 악화 등이 겹쳐서 뇌출혈로 쓰러졌고, 증상이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강 검사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황 사장 담당의에게 황 사장의 상태를 문의했다. 몸의 2/3가 마비됐고 언어 기능이 많이 손상되어 향후 상당 기간 극도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강 검사로서는 그렇게 무리하게 수사를 하지도 않았는데 황 사장이 저 지경까지 이른 것을 보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이제 더 진행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내사 종결 처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며칠 후 윤성일(가명) 씨가 강 검사를 찾아왔다. 수사계장을 통해 U건설 사건으로 검사님을 꼭 봬야겠다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제가 강 검사인데, 어떻게 오셨죠?”

이미 김이 빠져버린 U건설 사건이기에 강 검사는 별다른 기대 없이 윤성일 씨를 맞았다.

“네, 검사님.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황 사장님의 운전기사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황 사장의 운전기사라는 말에 강 검사는 속으로 짚이는 바가 있었다. ‘내가 왜 운전기사를 조사해볼 생각을 못 했을까?’, 속으로 무릎을 쳤다.

윤성일 씨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두툼한 업무 수첩을 펼쳤다.

“이 수첩에 보면 제가 사장님 지시로 권 국장을 만나서 돈을 건넸던 날짜, 장소, 대략의 금액이 다 기재되어 있습니다.”

강 검사는 수첩에 기재된 내용을 스캔하듯이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 2010/04/02
    권 자 희망주유 앞 / 쇼1개 / 1,000
  • 2010/04/28
    권 컨트리 주차장 / 박1개 / 3,000

“윤성일 씨, 이 내용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대략 감이 오긴 하는데.”

“네, 2010년 4월 2일, 권 국장 자택 근처 희망주유소에서 쇼핑백 한 개에 1만 원권으로 1,000만 원을 건넸고요, 2010년 4월 28일 권 국장과 사장님이 골프 치실 때 컨트리클럽 주차장에서 제가 권 국장 차량 트렁크에 1만 원권이 가득 든 박스를 하나 실었습니다. 그게 3,000만 원가량 됩니다. 이외에도……”

강 검사는 쾌재를 불렀다. 아니 이렇게 꼼꼼하게 기재해 두었단 말인가. 대략 5회에 걸쳐 1억 5,000만 원 정도가 권 국장에게 건너간 것이었다.

“수사에 도움을 줘서 고맙긴 한데, 이걸 왜 이렇게 기록해두셨나요?”

강 검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윤성일 씨가 이런 자료를 만들어뒀다가 이제 공개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윤성일 씨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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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병으로 군대를 졸업하고 선배의 소개로 U건설 황 사장의 운전기사로 취직한 윤성일 씨는 변변한 기술도 없는 자신을 항상 인간적으로 대우해준 황 사장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 이래저래 외부 접대가 많아 새벽 늦게까지 황 사장을 수행해야 했지만, 윤성일 씨는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네도 공부를 좀 하지그래? 대학도 못 마쳤다면서?”

인간미 넘치는 황 사장은 성일 씨에게 공부를 계속하라는 주문을 했다.

“어차피 날 따라다니면 대기하는 시간이 많잖아. 그때 스마트폰만 보지 말고 책 보고 공부 좀 하게. 나중에 편입 시험도 쳐보고 말이야. 평생 남의 차 운전하며 살 수는 없지 않나?”

성일 씨는 황 사장의 배려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황 사장은 1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주면서 호탕하게 말했다.

“자, 이걸로는 술 사 먹으면 안 돼! 책을 사서 나를 기다리는 시간에는 항상 공부하도록 해. 알겠지?”

성일 씨는 그동안 안일하게 살아왔던 자신을 반성하며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의 인생 계획을 다시 세워보리라 마음먹었다. 우선 서점에 가서 자격증 시험을 위한 교재를 몇 권 구입했다. 성일 씨는 황 사장이 시키는 대로 차량에서 대기할 때면 언제나 책과 볼펜을 들고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공부하는 습관이 들지 않아 자꾸 스마트폰에만 눈이 갔는데, 그러다 몇 번 황 사장에게 들켜서 혼이 난 이후부터는 단 5분이라도 여유 시간이 생기면 책 보는 습관을 들였다.

어느 날 황 사장은 평소랑은 달리 마음이 좀 들뜬 것 같았다. 뒷자리에서 창밖을 보며 성일 씨에게 말했다.

“우리 시골 고등학교 출신 후배 중에 아주 훌륭한 후배가 있더라고. 행정고시 합격하고 벌써 국장 자리에 올랐단 말이야. 참 자랑스러운 후배야. 앞으로 종종 식사하게 될 거 같아. 자네도 나중에 인사 잘 드리라고.”

황 사장은 사전에 예약된 한정식집에서 후배인 국장과 식사를 했고, 성일 씨는 그날도 열심히 차 안에서 자격증 수험서를 읽고 있었다. 9시 반쯤 되었을까, 어느 중년 신사와 같이 음식점을 나오는 황 사장이 보였다. 성일 씨는 얼른 차를 대기시키고 차 밖에 나와서 서 있었다.

“선배님! 오늘 진짜 감사합니다.”

중년 신사는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다.

“아이고, 후배님. 내가 오히려 더 영광이지요. 차 안 갖고 왔나요? 아하, 택시는 무슨 택시. 내 차로 모셔다드리죠. 어이 윤 기사. 권 국장님 좀 모셔라.”

성일 씨는 황 사장이 시키는 대로 신사를 황 사장 차량 뒷자리에 모셨다.

“윤 기사, 나는 택시 타고 갈 테니 내일 아침에 우리 집으로 오게. 대신 권 국장님 댁까지 잘 모셔다드리고.”

성일 씨는 황 사장에게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국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댁이 어디 신지요? 어디로 모실까요?”

그러자 뒤에 타고 있던 권 국장은 방금 바깥에서 보이던 태도와는 달리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노가다 주제에 돈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어디서 선배 노릇이야. 나 원 참. 더러워서. 어이, OO동 OO아파트로 좀 가!”

많이 취한 권 국장은 성일 씨에게 물었다.

“뭐야, 허― 공부하나? OO자격증? 이거 따서 뭐에다 써먹는 건데?”

권 국장은 갑자기 조수석에 있던 성일 씨가 보고 있던 책을 휙 집더니 뒤적여 보았다.

“아, 네. 제가 학교 때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이제야 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이구, 공부는 다 때가 있는 거야. 그리고 이런 자격증 따서는 아무것도 안 돼. 헛지랄이야 헛지랄. 당신도 어지간히 갑갑한 인생이구먼, 갑갑한 인생. 커― 오늘 무지 취하네.”

권 국장은 성일 씨 책을 몇 장 찢어서 자신의 입을 닦고는 창밖으로 휙 던져버리더니 뒷자리에서 곯아떨어졌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거야. 나도 술에 취하면 그럴 수 있어.’ 저 혼자 여러 번 저를 진정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모욕감은 계속 생각이 나는 겁니다. 특히 권 국장 그놈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성일 씨는 황 사장의 지시로 수시로 권 국장에게 돈을 건넸다. 황 사장은 입이 무거운 성일 씨를 신뢰했고, 권 국장 역시 선배로부터 받는 돈이라 그런지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일 씨는 황 사장을 비하하던 권 국장이 황 사장이 주는 돈은 넙죽넙죽 받는 행태에 화가 났다. 그래서 자신의 노트에 권 국장에게 돈을 건넨 날짜와 장소, 대략의 금액을 다 적어놓은 것이다. 언젠가는 써먹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사장님, 정상적인 생활은 앞으로 힘들다고 합니다. 만약 사장님이 저렇게 되지 않으셨으면 전 이 장부를 공개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쓰러지시는 모습을 보니 제 눈이 뒤집혀버렸습니다. 이 정도면 권 국장은 처벌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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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강 검사의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확실한 참고인인 윤성일 씨를 앞세워 공무원들과 대질신문을 벌이고 관련자들에게 압박을 가하자 권 국장은 자신이 돈을 받은 사실, 그중 일부가 권 국장의 윗선까지 흘러간 사실을 실토했다. 권 국장과 상사는 각각 징역 3년,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파면 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공직자 부정부패 척결 사건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기업 범죄 세미나에서 만난 대학 후배 강 검사가 뒤풀이 자리에서 술안주 삼아 해준 이야기이다.

“권 국장 그 양반, 술 먹고 운전기사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제가 수사하면서 슬쩍 물어봤지요.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면 참 섬뜩합니다.”

나는 강 검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법적인 쟁점보다는 한 사람의 부주의한 말과 행동이 다른 이에게 치명상을 안기를 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하고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용[한비자]에 “역린”[footnote]逆鱗; 거꾸로 박힌 비늘.[/footnote]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무릇 용이란 짐승은 길들여서 탈 수 있다. 그런데 턱밑에 직경 한 자 정도의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다. 만일 사람에 부주의해서 그것을 거스르게 되면 용은 화가 나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

사람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학력, 가족관계, 건강, 신체, 자식 문제, 금전 문제 등…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심리학에서는 핵심 컴플렉스(Core Complex)라고 하는데 타인이 이걸 건드리면 당사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러니 어찌 가벼이 입을 놀리고 경솔하게 행동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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