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닝 케이블 안녕.
함께 해서 괴로웠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애플이 ‘마침내’ 라이트닝 포트를 포기했다. 11년 만이다. 어제 발표한 아이폰 15부터는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USB-C 케이블로 충전할 수 있게 됐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가 2021년 9월 USB-C를 스마트폰 충전 케이블 표준으로 채택하고 24개월을 유예기간으로 뒀다.
- 충전 케이블을 통일하면 연간 2억5000만 유로에 이르는 충전기 구매 비용과 1만1000톤 규모의 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태블릿과 랩톱 컴퓨터, 디지털 카메라, 헤드셋, 키보드, 마우스까지 하나의 케이블로 충전할 수 있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 애플은 처음에 “혁신을 억압한다”며 버티다가 결국 물러섰다. 표준을 만들자는 데 반대할 명분이 없었고 유럽에 아이폰을 안 팔 것도 아니니까.
- “이미 수십 억 개 이상 보급된 라이트닝 액세서리를 버리게 된다”는 애플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애플에서만 쓸 수 있는 액세서리를 앞으로 더 만들 거냐 여기서 멈출 거냐의 문제였다. (게다가 애플은 이미 2012년에 30핀 포트를 라이트닝 포트로 바꾼 전력이 있다. 그때 버린 수많은 케이블과 어댑터는 뭐라고 설명할 건가.)
USB의 짧은 역사.
- 1996년 USB-A로 시작해서 2000년 무렵 USB-B와 Mini-USB가 나왔고 2007년 Micro-USB가 나왔다. 모두 한 쪽 방향으로 꽂아야만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USB-C는 2014년에서야 나왔다.
-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파하드 만주는 “USB-C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낙관하는 이유는 기술의 새로운 안정화 시대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지금 USB-C 충전기와 케이블을 구입하면 한동안 바꿀 일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 USB-C 포트는 충전 뿐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신호와 데이터를 주고 받을 수 있다.
- 어느 집이나 온갖 케이블로 가득한 서랍이 있을 것이다. RCA 케이블과 S-비디오 케이블, 디스플레이포트, HDMI, Mini HDMI, Micro HDMI에 이르기까지 케이블과 포트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런 케이블 상당수가 USB-C 케이블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
- USB-C와 동일한 외형의 썬더볼트 포트는 모니터 전원으로 노트북을 충전하면서 동시에 비디오 신호를 전송하는 것도 가능하다.
- 라이트닝 포트가 처음 나왔을 때 Micro-USB가 대세였는데 속도나 안정성에서 라이트닝이 훨씬 앞섰다. 일단 방향을 신경쓰지 않고 꽂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열광했다. USB-C가 자리잡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뒤였다. 한때는 “더 우아하고 약간 더 얇은 포트”였지만 지금은 라이트닝 포트가 USB-C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 아이폰15의 USB-C 포트는 20W 이상 충전기로 30분 동안 50% 충전을 지원한다. 전송 속도도 최대 10Gbps로 빨라졌다.
애플은 왜 라이트닝을 고집했던 걸까.
- 더버지는 “애플이 USB-C를 채택한다는 것은 애플이 세심하게 관리한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 밖에서 통제권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제품의 액세서리 퀄리티는 우리가 관리한다’는 애플 특유의 고집을 꺾은 셈이다. 실제로 아이폰 이용자들은 이런저런 짝퉁 액세서리를 쓰다가 정품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 라이트닝은 애플의 독자 규격이다. MFi(Made For iPhone) 인증을 받으려면 애플에 라이선스 비용을 내야 한다. 인증 받지 않은 액세서리를 연결하면 “이 엑세서리는 지원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가 뜬다.
- 애플이 MFi 인증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2~3달러 정도의 칩과 인증 비용을 포함해 많게는 액세서리 가격의 절반에 이를 정도다.
- 애플이 USB-C로 간다는 건 MFi 인증과 이에 따르는 매출을 모두 포기한다는 의미다. 아이폰15에 들어가는 케이블에는 MFi 인증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 애플이 정확한 통계를 밝히지 않았지만 액세서리 관련 매출이 30억~40억 달러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었다.
- 이미 2016년에 맥북 프로에 USB-A 대신에 USB-C 포트를 도입했고 2018년부터는 아이패드 프로부터 USB-C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2019년 아이폰 12부터는 이미 충전 어댑터도 USB-A에서 USB-C로 바뀌었고 케이블도 USB-C-라이트닝으로 바뀌었다. 호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 애플은 이미 2020년부터는 아예 충전 어댑터와 케이블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환경을 생각해서 그냥 갖고 있는 것 쓰라는 제안이지만 덕분에 2년 동안 65억 달러 이상의 이익을 챙겼다. 제작 단가를 줄이면서 액세서리를 별도로 판매할 수 있었고 운송 비용도 40% 줄였다.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명분도 덤으로 얻었다.
너무 늦게 도착한 USB-C.
- 어쨌거나 환영할 일이다. 전통적인 아이폰 마니아들도 그렇고 환경 보호를 위해서도 그렇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을 충전하던 어댑터와 케이블로 아이폰을 충전할 수 있게 됐다.
- 삼성전자는 미국 X(트위터) 계정에서 “At least we can C one change that’s magical(적어도 우리는 한 가지 변화를 볼 수 있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See 대신에 C를 쓴 것은 신형 아이폰의 유일한 변화가 USB-C 포트 밖에 없다는 언어 유희다.
- 삼성전자가 긴장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매시어블에 따르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이용자 가운데 44%가 아이폰에 USB-C 포트가 있으면 갈아타겠다고 답변했다. 어쨌거나 아이폰의 단점 가운데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 애플은 잽싸게 라이트닝-USB-C 어댑터를 내놨다. 가격은 미국은 29달러, 한국에서는 4만5000원이다. 지금까지 쓰던 라이트닝 케이블 앞에 끼워서 쓸 수 있다.
- 적당히 집 안에 굴러다니는 USB-C 케이블을 쓸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전문가들은 아무 케이블이나 쓰면 자칫 스마트폰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뉴욕타임스는 주유소에서 파는 5달러짜리 값싼 케이블을 사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전류를 제한하는 칩이 없는 케이블이나 충전 속도가 명확하지 않은 어댑터는 위험하다.
- 애플은 아마도 무선 충전 맥세이프(MacSafe)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크다. 멕세이프 충전기는 라이트닝 케이블보다 훨씬 더 비싸고 마진도 많다. 애플이 아예 무선 충전만 남겨놓고 충전 포트를 없애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 게다가 이미 케이블로 데이터 통신을 하는 시대가 아니다. 맥셰이프 충전기에 근거리 통신(NFC) 기능이 내장돼 있기도 하고 에어드랍도 대안이 된다.
- 더버지는 새 아이폰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다면 썬더볼트4프로 케이블을 구입하라고 조언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케이블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에는 더 길고 강력한 케이블에 투자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다. 최대 100W까지 충전이 가능하다. 이 케이블 하나로 노트북과 모니터를 연결하고 동시에 충전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