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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에 전한 말, "사실 널 위해 싸우려고 했어"

최근 숙대에서 일어난 일(트렌스젠더 합격생 입학 반대 사건)은 혐오다. 차별금지법이 없는 우리나라는 그 행위의 범죄성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가히 범죄적이다. 누구보다 이런 인권 문제에 사회적인 발언을 활발해왔던 한 인권전문가(그는 트렌스젠더 학생이 입학을 준비했던 법학과 교수이기도 하다)가 이 사태에 관해 긴 침묵을 깨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아래 편집자 주 참조).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동안 그분이 적극적으로 입장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내부자의 한계라는 현실적인 고민도 이해한다. 하지만 트렌스젠더 학생이 등록을 포기하고 나서 뒤늦게 밝힌 입장은 아무래도 무의미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1. 거울 

그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혐오발언을 하는 학생은 드물고, 다만 대부분은 공포와 거부감 등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일 뿐이라고. 그래서 그들을 향해 “너희는 혐오야”라고 말하는 게 효과적인 대응일지 모르겠다고.

근데, 이거 진짜 어디서 많이 본 얘기 아닌가? 단어를 조금만 바꿔보자.

적극적으로 삼일한 운운하며 여성에 대한 혐오를 공개적으로 피력하는 남자는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량하고, 성평등 자체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공포와 거부감 등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런 남성들을 향해 “여성혐오”라고 말하는 게 효과적인 대응일지 모르겠다.

거울에 비추면 혐오를 일삼는 일부 숙대 학생들의 '혼동과 공포'는

일부 숙대 학생들의 트렌스젠더 혐오는 ‘공포와 거부감’ 때문이라서 “너희는 혐오야”라고 말하는 게 효과적인 대응인지 모르겠다고? 그 말을 거울에 비춰보시라. 무엇이 나오는가.

2. 둘 중 하나만 

내 생각은 그렇다. ‘전략적으로는’ 둘 다 맞는 말이다. ‘네가 가해자임을 인정하라’는, 계몽주의적인 ‘윽박지르기’ 전략이 좋은 결과를 낼 리가 있나. 이건 확실히 반동을 조장하고 강화하는 종류의 전략이다.

‘여성혐오’란 개념은 오늘날 성차별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격상했지만, 사실 여러 비판에도 부딪쳐왔다. 가장 대표적인 건 그게 너무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물리적인 성폭력부터 성차별적인 사회문화, 가스라이팅, 나쁜 데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여성혐오’란 단어로 묶이다보니, 사안의 경중, 심각성이 제대로 분별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 모든 걸 ‘여성혐오’라 묶음으로써 오히려 물리적 성폭력 등 분명한 성범죄의 심각성을 눙쳐버리는 반면, 나쁜 데이트 경험 등 함께 개선해나가야 할 문화적 한계를 역적모의만큼 심각한 범죄로 격상시켜버렸다는 비판이다.

“너희는 모두 여성혐오자다.”

이 진술은 한줌의 진실을 담고 있긴 하지만,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사실 우린 수많은 변주를 듣고 경험해왔다.

“우리 모두는 앙시앙 레짐의 자식이다.”
“우리 모두는 일베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그럼에도 ‘여성혐오’가 의미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건 어떤, 우리 주위에 늘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그런 사회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냈다. 고통받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그건 ‘전략적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전략 너머’의 이야기였다.

하물며, ‘여성혐오’ 같은 포괄적인 개념도 아니고, 당장 직접적으로 일어난 혐오범죄를 두고 혐오라고 칭할 수조차 없다면… 그 사람들의 목소리는 누가 대변해 줄 것인가? 전략’이라는 미명 하에 그들의 고통은 언제까지 수면 밑에 가라앉힌 채 내버려 둘 것이란 말인가?

적어도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트렌스젠더 입학을 반대한다"는 명백한 혐오 발언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범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땅히 범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인격을 칼로 찌르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트렌스젠더(의 입학)를 반대한다”는 명백한 혐오 발언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범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땅히 범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인격)를 칼로 찌르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3. 죽음 뒤에 전한 말

페미니즘이 어찌될지는 모른다. 그건 내가 오지랖 부릴 문제도 아니다. 뭐 ‘터프’(TERF; 트랜스젠더 혐오 성향의 급진 페미니즘 조류)가 득세하더라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지금 당장, 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집단이 자행하는 혐오로 인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고, 자신이 설 자리에서 내쫓겼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숙대에서 일어난 집단 혐오는 ‘중장기적인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어제, 오늘, 지금 당장 봉착한 생존의 문제다.

혐오범죄에 노출된 소수자에겐, 누군가 옆에 서 있어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나는 네 옆에 서 있을 거라고. 난 저 혐오 발언을 딛고, 네 친구가 되어줄 것이라고.

숙대 졸업생을 비롯해 일부 개인, 또 외부의 많은 사람들이 지지의 성명을 보내주긴 했지만, 결코 충분하진 않았다. 지지의 한마디, 저 혐오범죄자들과 분명히 선을 긋는 연대의 목소리가 필요한 건, ‘중장기적인 전략’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위해서였다.

모를 리 없지 않나. 나같은 필부필부에 비해 훨씬, 오랫동안 공부하고 고민해오셨던 분이 아닌가.

이건 페미니즘도 똑같지 않나. 모든 소수자 운동이 다 그렇지 않나. ‘중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당연히 전략도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낭떠러지에 서 있는 사람을 위해, 내가 당신 편이라고 손을 잡아주는 것. 저들과 함께 싸워주겠다고 말하는 것. 그게 필요한 순간도 있다.

혐오의 칼에 소수자가 찔리고 있는 와중에도, ‘중장기 전략’을 내세워 ‘나중에’를 말한다면 대체 그 ‘나중에’는 언제 찾아오는 것인가. 끝내 사람이 죽고 나서야 말할 것인가. ‘나중에, 당신을 위해서도 싸워주려고 했는데.’

바비를 위한 기도 (2009, 러셀 멀케이)

바비를 위한 기도 (2009, 러셀 멀케이)

영화 [바비를 위한 기도](2009)는 부모의 편협한 종교관과 사회적 편견으로 고통받다 끝내 운명을 달리한 게이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어머니는 소년의 죽음 후에야 그가 겪었던 고난을 깨닫고 뉘우쳤으나, 바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일어날 이야기다. 육우당(동성애 인권운동가, 1984년 8월 7일 ~ 2003년 4월 26일)은 개신교의 혐오로 괴로워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현실은 더 잔혹해서, 그의 죽음을 주목하는 미디어는 거의 없었다. 일부 언론의 보도에는 동성애를 조장하고 자살을 미화한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현실

소돔과 고모라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이야기
가식적인 십자가를 쥐고 목사들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우리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발악하고
만일 우리가 떨어진다면
예수님이 구해 주시겠지
창녀와 앉은뱅이에게도 사랑을 베푸셨듯이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보여 주시겠지.
푹신한 솜이불처럼 따뜻한 사랑을

육우당

 

이 글이 비판과 토론 대상으로 삼은 건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의견’입니다. 그 의견을 말씀하신 분은 자신의 글이 외부로 인용되는 걸 삼가달라고 해당 게시물 말미에 부탁하셨습니다. 물론 그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공표된 글이었습니다.

그 부탁을 당연히 존중하지만, 이 사안은 공적 사안이고, 그분의 발언(의견) 역시 사적인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이에 그분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토론과 비판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으로 그 의견을 인용합니다.

그 사람(행위자)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그 내용(행위)을 토론하고 비판하기 위해 공적 사안에 관한 토론의 재료는 가급적 널리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그분과 독자께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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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슬로우뉴스 편집위원, ㅍㅍㅅㅅ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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