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 정려원, 두려움에 맞서다 (서진연, 아이즈, 2018. 1. 10.)
드라마 [마녀의 법정]을 통해 K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을 받은 정려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정려원은 성범죄라는 주제를 다룬 무거운 드라마에서 복합적인 캐릭터를 소화해냈으며, 수상소감으로 ‘여성’ 배우로서의 목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그 성취에 함께 감동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전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마녀의 법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요. 여러 언론의 상찬을 듣고 챙겨보았는데, 극 초반부터 너무 황당한 스토리 진행으로 맥이 다 빠졌던 탓입니다.
마녀의 게으른 법정
[마녀의 법정] 2화. 정려원이 분한 마이듬 검사가 여성아동범죄 전담부서로 발령받은 뒤 처음으로 벌이는 법정 싸움이 그려집니다. 사건 진행 경과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 스포일러 안내: 이하 [마녀의 법정] 2화에 관한 줄거리 설명이 포함됩니다.
- 40대 여자 교수가 자신이 지도하는 남자 대학원생에게 성폭행(미수)을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 검찰 피의자 심문에서 20대 남자 대학원생은 범죄 혐의를 극구 부인하죠.
- 검찰는 수사 중에 오히려 여자 교수가 이 남자 대학원생을 성폭행하려 했다는 증거를 발견합니다.
- 검찰은 이에 교수를 피의자로 입건하고, 결국 사건은 재판으로 진행됩니다.
- 하지만 정작 성폭행 증거를 검찰 측은 공개하지 못합니다. 이 증거란 교수가 대학원생을 강제로 추행하려던 상황이 우연히 녹음된 통화 녹음 파일인데, 그 통화 상대방은 대학원생의 남자 연인이었습니다. 즉, 이 대학원생은 동성애자였던 것입니다.
-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로 드러날 경우 앞으로 대학교수가 되려는 꿈은 영원히 사라질 것으로 두려워해 검찰 측에 이 증거를 절대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사건 초기) 자신이 가해자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이 사실을 숨기죠.
- 재판이 진행되고, 증거가 없어 수세에 몰리는 검찰, 이에 마이듬 검사는 이 대학원생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피고인 여자 교수의 변호인 측에 슬쩍 흘립니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해지죠. 응? 그걸 왜? 변호인이 그걸 알아서 뭘 어쩌라고? 이 대학원생이 동성애자라면, 대학원생이 여자 교수를 성폭행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동성애자의 뜻이 뭔데요. 변호인 입장에선 당연히 숨겨야 할 정보입니다. 검찰이 그걸 변호인에게 흘려서 뭘 어쩌라는 걸까요?
그런데 이 변호인이 대단합니다.
법정에서 증인을 ‘아웃팅(outing)’해버리죠.[footnote] 외래어 표기원칙이나 발음을 고려하면 ‘아우팅’으로 쓰는 것이 더 어울릴 것으로 봅니다만, 위키백과는 ‘아웃팅’을, 다수 언론에서는 ‘아웃팅’과 ‘아우팅’을 혼용해서 쓰는 바, 일단 이 글에서는 어감이나 직관성에서 더 장점이 있는 ‘아웃팅’으로 씁니다. 아직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편집자) [/footnote]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변론에서는 변호인은 동성애자 일반의 인격을 대놓고 조롱하죠.
“여자한테 강간당하는 동성애자도 있습니까? 만약 증인(주: 대학원생)이 이성을 좋아하는 일반적인 남자라면, 여자에게 성적인 제안을 받았을 때, 남자로서 그 상황을 즐기거나, 아니면 본인이 가진 물리적인 힘으로 얼마든지 여자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증인은, 애초부터 여자를 싫어하는 게이니까, 무고한 피고(주: ‘피고인’이 옳은 용어지만, 대사를 그대로 인용)에게 강간죄를 뒤집어씌운 거 아닙니까!” [footnote]형사 법정에서 공소를 제기받은 자는 ‘피고’가 아니라 ‘피고인’이지만, 드라마의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는 차원에서 ‘피고’로 씀. (편집자) [/footnote]
.…이거 개그콘서트였나요.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로 시청자의 혼을 빼놓는지로 경쟁하는 중인가요. 아무리 캐릭터상 ‘악당’ 변호사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지상파 드라마가 이런 극도의 소수자 혐오 발언을 ‘상식적인 변론’인 것처럼 내보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조롱’이 드라마상 주제의식에 필요한 장치도 전혀 아닙니다. 그냥 시청자의 감정 자극 경연대회에 불과하죠.
악당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닙니다. 너무 비논리적이고 황당해서, 반박할 의미조차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아무말대잔치죠. 제가 굳이 정치하게 비판하지 않아도 다들 황당할 테니 더 구체적인 논평은 생략합니다.
여하튼 이런 변호인의 ‘공격’에 마이듬이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재빨리 나섭니다. 사실 대학원생을 아웃팅하지 않기 위해 숨겨뒀던 증거가 있는데, 변호인 측에서 이미 아웃팅을 했으므로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며 문제의 녹음 파일을 꺼내 들지요.
네, 그렇게 이기긴 하는데… 이기긴 하는데요. 이게 도대체 뭡니까. 이거 법정물이라면서요. 그것도 성범죄를 다루는 드라마라면서요. 정말 수준이 이렇게 떨어져도 되는 겁니까.
웰메이드
웰메이드 드라마라고들 하죠. 이 드라마에도 그런 명찰이 붙었고, 많은 매체는 입체적 ‘여성’ 캐릭터 마이듬을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이거… 웰메이드 정말 맞나요?
한 20~30화 쯤 진행되다 보니 구멍이 뚫린 것도 아니고, 이게 무려 첫 법정 에피소드입니다.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내세웠으니 괜찮은 건가요? 딱히 뭘 고발하는지도 알 수 없는 주제의식, 성범죄를 소재로 내세웠음에도 성(Gender)에 대해 지극히 얄팍한 이해…
‘여성’ 담론은 분명 현시대에 가장 중요한 담론 중 하나입니다. 가장 절실한 목표 중 하나이지요. 하지만 때로 미디어를 보면 일종의 유행처럼 소비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쿨한 담론. 우리 편 담론. 뜯어보고 따져보는 대신, 그냥 ‘옳다구나’하고 공유하는 쿨한 이야기. 이 황당한 드라마에 쏟아진 상찬처럼 말이죠.
드라마에 도덕적 올바름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완벽하게 현실을 투영하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허구한 날 팀장님 본부장님 실장님만 나오면 좀 그렇지만.) 그냥, 적어도 최소한의 주제의식, 최소한의 소재에 대한 탐구 그리고 최소한의 만듦새는 있었으면 하는 겁니다. 하물며 ‘웰메이드’란 딱지를 붙일 거라면요. 뭔가 대단한 성취처럼 묘사할 것이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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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화 컨텐츠에 관한 ‘해석’으로서 필자의 개성과 주관성이 강조되는 ‘리뷰’입니다. 이 글 소재는 물론이고, 이 글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견과 비판 그리고 보충 해석을 환영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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