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부르키니'(전신 수용복) 착용 금지 논란을 1. 프랑스 공화주의와 세속주의 2. 종교 3. 정치와 안보(테러리즘)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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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인 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사진)의 정치 소설 [눈]에는 ‘히잡’을 두고 대화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세속주의자가 나온다. 편의상 A와 B로 칭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세속주의자의 대화
근본주의자인 A는 서구 사회에 대한 불신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입장을 대변한다.
A: 여자들이 히잡을 벗고 머리를 내놓는 것이 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지? 히잡을 벗으면 유럽인들의 대우가 달라지나?
세속주의자인 B는 히잡을 쓰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히잡이 여성을 억압한다는 의견이다.
B:나도 딸자식이 있어. 히잡을 쓰지 않았지. 아내가 히잡을 쓰는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난 여식에게도 간섭하지 않네.
(…중략…)
내 딸은 “아버지, 저 역시 모든 여학생이 히잡을 쓰고 들어오는 교실에 머리를 드러내놓고 입실하는 용기를 내지는 못할 거예요. 할 수 없이 히잡을 쓸 거예요.”라고 말했네.
내 딸의 변명은 동시에 다른 많은 터키 여성의 변명이기도 하네. 여성이 히잡을 벗는다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더 편하고, 더 존경받는 위치에 있게 될 걸세.
이에 A는 히잡이 여성을 보호하고, 여성에게 이익이라고 말한다.
A: 히잡은 여성을 불편, 겁탈, 모욕으로부터 보호하고, 사회 속에 더 편히 나갈 수 있게 만들어. 과거에 밸리 댄서였던 멜라핫 샨드라를 포함해 나중에 히잡을 쓰게 된 많은 여성이 밝혔듯이, 히잡은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남자들의 동물적인 감정에 호소하는가 하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다른 여성들과 경쟁하고 이 때문에 화장을 해대야 하는 가련한 존재에서 벗어나게 했지.
터키에선 ‘순응’ vs. 프랑스에선 ‘저항’
터키는 이슬람 국가다. 그리고 정교분리 원칙을 채택한 나라다. 프랑스처럼 학교에서 히잡을 금지하였었다. 그러나 2013년에 이 법은 폐지되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을 달린다. 서로 귀를 막고 대화를 하던 끝에 근본주의자 A는 세속주의자 B를 살해한다. 소설 [눈]에서 세속주의자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도 아닌 주인공 카는 이렇게 말한다.
“터키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가장 숭고한 사고, 가장 위대한 창조자와 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 어떤 단체에 들어가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모슬렘 여성의 히잡은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세속주의자는 히잡을 벗기는 일이 여성을 해방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히잡을 쓰는 일은 여성이 스스로 결정하는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인 무형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히잡 착용은 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이 소수인 곳에서 히잡 착용이 반대로 사회적인 압력에 저항하는 행위이다.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이를 세속주의에 대한 무슬림 집단의 분노라고 말한다.
종교와 여성의 복장
나는 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컸다. 여름이 되면 교회는 성도의 복장에 주의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서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짧은 치마, 민소매 상의, 슬리퍼를 자제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오면 어김없이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법으로 복장을 규제하는 프랑스, 터키의 사례와 한국 보수적 교회 안에서의 복장 권고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종교는 여성의 복장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일까.
우선 꾸란(또는 쿠란, 코란)을 보자. 히잡의 근거가 되는 구절은 33:59이다.
“예언자여, 그대의 아내들과 딸들과 믿는 여성들에게 베일을 쓰라고 이르라. 그때는 외출할 때라 그렇게 함이 가장 편리한 것으로 그렇게 알려져 간음 되지 않도록 함이라 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꾸란에 근거하여, 모슬렘은 히잡이 여성을 보호한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강간과 모욕, 불필요한 시선에서 여성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소설 [눈]에서 등장하는 근본주의자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고린도전서 11:5)
천주교에서 미사를 볼 때 여성이 흰 천을 쓰는 전통은 이에 근거한다. 다만 현대에 와서 천주교는 이를 강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교는 성경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 전통을 폐지한다.
글자 그대로 vs. 글에 담긴 정신
모슬렘에게 신앙은 꾸란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꾸란은 알라의 말씀이다. 아랍어로 쓰인 경전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모슬렘은 원어의 의미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번역본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부득이한 경우[footnote]예를 들어 아랍어를 모르는 경우[/footnote]를 제외하고 제한한다. 그리고 신자에게 아랍어를 배울 것을 권장한다.
이슬람과 기독교 교회 모두 ‘경전’을 중요시하는 종교다. 그러나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번역된 성경도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글자 그대로를 따르기보다는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을 더욱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사소해 보이는 이 변화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가져왔다. 문자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이슬람을 (적어도 여성의 복장에 관해서는) 중세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게 만들었다면, 교회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관습에 열린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모슬렘 여성의 의복 논쟁을 둘러싼 나의 결론은 성경과 하디스[footnote]꾸란과 함께 이슬람의 양대 경전[/footnote]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하나님(Allah)은 당신의 외모와 복장을 보지 않는다. 다만, 당신의 마음과 행동을 본다.” (하디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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