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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시간이 따로 있고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법이다.[footnote]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책세상, 1989[/footnote]

사는 시간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살고 싶다는 의지와 관계없이 자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는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회사를 나가고, 점심시간이 되면 유령 같은 모습으로 지갑을 들고 회사 앞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야근을 하다 새벽이 되면 그제야 눈이 초롱초롱해졌고, 해 뜨는 모습을 보며 잠들었다.

아침은 어김없이 왔고, 발작적으로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고 집 밖으로 뛰어나가 버스를 탔다. 이렇게 살아야 할까 매일 고민을 하면서도 결국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출근길 버스 안에서 졸고 있었다. 삶은 엄청난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그냥 살아지는 것이었다.

다섯 명의 팀 사람들 중 세 명이 우울증과 목 디스크 또는 허리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그렇게 계속 살아질 텐데, 우울해도 목이 불편해도 허리가 아파도 어떻게든 살아질 텐데, 팀장님은 과감하게 한 달 휴가를 선언했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는 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런 삶이 아닌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법을 알지 못했다. 팀장이 그러할진대 팀원들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한 달의 휴가 앞에 모두들 우왕좌왕했다. 나는 믿기지 않는 행운 앞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여행사 사이트에 접속했다. 도쿄행 티켓을 구매했다. 4월이었고, 도쿄가 생각났다. 그곳엔 친구가 살고 있었다. 왜 도쿄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늘 도쿄에서 딱 한 달만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대답했다. 실은 도쿄가 아닌 다른 곳이어도 상관없었다. 다만 나에게는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냥 사는 것만으로는 삶을 증언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도쿄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22일간의 여장을 풀었다. 새벽에 잠들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패턴이 익숙했던 나를, 친구는 새벽부터 깨웠다. 미소시루와 완두콩밥, 양배추 샐러드와 잘 구워진 스팸, 김치와 장조림. 친구는 있는 반찬 없는 반찬 다 차려내 놓고 눈곱도 채 떼지 못한 나를 밥상머리에 앉혔다. 밥상을 깨끗이 비우고 커피까지 넙죽넙죽 얻어 마셨다.

친구는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나는 그 앞에 앉아 끊임없이 쫑알거렸다. 오늘은 어딜가지? 뭘하지? 네 학교는 어느 동네야? 그 근처에 어디 갈 만한 곳 있어? 학교는 언제 마쳐? 내가 데리러 갈까? 근데 나는 오늘 어딜 가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고, 해야 할 일 따위는 없었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살아지는 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기로 작정한다면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끝까지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시스템으로 말하자면 도쿄는 서울보다 2,417배쯤 정교했다. 다만, 나를 위한 시스템은 도쿄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 나의 시스템을 스스로 구축해내야만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지금 도박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스스로의 삶이다.[footnote]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책세상, 1989[/footnote]

무턱대고 닛포리 지하철 역에 내렸다. 관광책자에는 없는 곳이었다. 낡은 골목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마음에 드는 골목을 따라 한없이 들어가다 보면 고양이가 나타나 나를 또 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누군가의 집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정적이 흐르는 그 골목길엔 고양이와 나만 있었다. 4월 햇살에 고양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가늘게 눈을 뜨고 가만히 있노라면 생(生)과 사(死)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공동묘지 옆으로 우체부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나를 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골목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요히 나를 스쳐 지나갔다. 생명을 가진 것들도, 생명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들도 모두 고요했다.

그렇게 낯선 골목을 네 시간 동안 헤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들어간 카페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커피’라는 말도 못 알아듣는 주인장에게 식사를 주문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읽지도 못할 메뉴판은 덮고 “코히-”라고 짧게 주문했다. ‘기묘하지만 마음에 드는 동네다’라고 메모를 했다. 이제 그만 여기를 빠져나갈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풍경이 말을 거는 동네였다. 아까와는 또 다른 자전거, 또 다른 화분과 꽃, 또 다른 골목이 펼쳐지는 동네였다. 유명한 것 하나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있는 동네였다.

화분과 꽃과 낡은 골목길과 함께 느긋해져도 좋았다. 딱히 해야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꼭 가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상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나는 또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어딘가에 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줬다. 괜찮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고. 오롯이 너의 시간이라고.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걸어다녔다. 지하철 역에서 다시 친구를 만났다. 집 근처에서 저녁을 사먹고, 마트에 들러서 찬거리를 샀다.매실 장아찌도 사고 연어도 사고 캔맥주도 여러 개 샀다.일본식 아침을 해먹자며 친구와 낄낄댄다. 그러다 문득, 이 순간을 찾아 내가 도쿄까지 왔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 순간이 서울에서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일상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회사 갈 걱정에 이불 속에서부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되는 일상. 이른 아침 단박에 깰 수 있고, 왠지 억울한 심정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일상. 출근길에 삼각김밥이나 우유를 입에 쑤셔 넣지 않아도 되는 일상. 집에 들어오기 전에 내일 먹을 음식을 간단하게 장볼 수 있고, 피곤하다며 멍하게 TV 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되는 일상. 이것도 해야 하는데, 저것도 해야 하는데, 라며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일상. 정직하게 몸을 움직이고, 머리는 잠시 쉬게 만들 수 있는 일상. 피곤해진 몸 덕분에, 끊임없이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머릿 속 덕분에 이른 시간에 잠을 청하게 되고 그리하여 다시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일상.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하러 온 곳에서 나는, 비로소 원하던 일상의 리듬을 찾는 중이었다. 어쩌면 원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충분히 증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footnote]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책세상, 1989[/footnote]

[box type=”note”]이 글은 [모든 요일의 여행] 중 일부입니다.[/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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