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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혐오표현을 다룬 칼럼이 실렸다.

‘남성혐오’라는 말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얼마 전 JTBC ‘뉴스룸’에서는 메갈리아를 ‘여성일베’라 말하고 ‘남성혐오’ 운운했다. (손희정)

– 경향신문, [청춘직설] ‘개독’은 혐오표현일까? (2016년 2월 16일) 중에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칼럼의 이 부분에 대해 동의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성연대에 공감하며, 남성들이 역차별받고 있다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남혐(남성혐오의 준말)은 심지어 메갈리아 자체에서도 유통되는 단어이며, 남성의 여성혐오를 그대로 본떠 풍자하는 자칭 ‘미러링’ 방식은 십중팔구 남성 전체(혹 한국 남성 전체)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 경계는 꽤 모호해서, 메갈리아 내부에서도 여성 혐오에 대한 혐오와 순전한 남성에 대한 혐오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혐오란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남성혐오란 남성이란 이유로 혐오한다는 뜻이다.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제로 남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낯설긴 하지만 말이다.

혐오 남자 여자 갈등 차별 싸움 증오

혐오표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그러나 칼럼이 무작정 ‘남성혐오’를 난감한 말로 규정한 것은 아니다. 칼럼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감정을 법적,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감정을 빌미로 특정 집단을 낙인찍은 뒤 폭력을 휘두르고, 제도적 차별을 조장하며, 그렇게 타인을 실존적으로 위협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혐오표현’이라고 이름하고 규제할 수 있다.

(…중략…)

메갈리아가 남성들을 차별하는 어떤 특별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칼럼은 규제해야 할 ‘혐오표현’에 대해 논한 뒤, ‘남성혐오’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논한다.

우선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어떤 ‘혐오’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지배적인 관념을 형성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는가?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외국인 혐오 등은 이 점을 만족한다. 남성혐오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여성혐오의 대척점에 남성혐오를 둘 수 없는 이유다.

둘째, 그렇다면 어떤 ‘혐오’를 규제해야 할 것인가? 이건 어려운 문제다. 앞서 여성혐오나 성소수자 혐오 등과 남성혐오를 달리 봐야 할 까닭을 제시하긴 했지만, 이를 가를 잣대는 그렇게까지 명확하진 않다. 사회상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 공격 증오

어떤 표현까지를 혐오표현으로 규정할지도 문제다. 대놓고 비하적인 욕설을 퍼붓는 경우라면 판단이 비교적 간명하겠지만, 점잖은 목소리로 “난 동성애가 죄악이라 믿는다”고 말하는 경우도 혐오표현으로 여겨야 할지, “여자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식의 성차별적 표현도 혐오표현으로 여겨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과도한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한겨레21 칼럼 ‘홍성수의 혐오시대유감’이 몇 편의 칼럼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혐오표현에 대한 판단 권한을 국가가 독점할 때의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혐오표현은 여전히 그 개념조차 불분명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추상적인 구성 요건으로 혐오표현을 규제한다면 사법기관에 지나치게 광범위한 재량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적 선동이나 허위 사실에 해당하는 혐오표현에만 적용되도록 적용 범위를 좁힌다면 본래의 규율 목적이 무력화될 수도 있다. (홍성수)

한겨레21, 법은 하나의 ‘방법’ 일 뿐 중에서

굳이 한국에 국한해 보지 않더라도, 어디까지를 규제해야 할 혐오표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쉬이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비하 표현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차별적인 언사 전부에 적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 수정헌법 1조(표현의 자유)는 혐오표현에도 예외가 없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국가의 개입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사회상에 따라 인종 등에 대한 혐오는 엄격히 보지만, 여성이나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는 덜 엄격하게 보는 경우도 있다.

혐오는 혐오다 

긴 이야기를 굳이 다시 한 까닭은, 이게 그만큼 쉽게 규정되지 않는 개념이란 점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손희정의 칼럼이 말하듯, ‘혐오표현’이란 단어는 그 뜻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데가 있고, 오히려 ‘증오조장’, ‘차별선동’과 같은 다른 표현이 실제로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이코노미스트는 성차별적 언행에도 여성혐오란 딱지를 붙이며 오히려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이 흐려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뉴스페퍼민트, “여성혐오”와 “성차별”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원문: R.L.G , 월스트리트저널, 2015년 8월 21일)

나는 일전에 ‘진보’의 개념에 대한 클린턴과 샌더스의 토론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누군가는 민주당을 좌파이자 진보라고 말한다. 반면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등 소수 정파는 민주당은 새누리당과 다를 바 없으며, 한국은 보수 양당 체제라고 말한다. 한미 FTA를 추진하는 진보가 어디 있으며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좌파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 vs. 버니 샌더스 (출처: 힐러리 클린턴, Gage Skidmore, Hillary Clinton, CC BY SA ㅣ 버니 샌더스 Gage Skidmore, Bernie Sanders, CC BY SA)
힐러리 클린턴 vs. 버니 샌더스 (출처: 힐러리 클린턴, Gage Skidmore, Hillary Clinton, CC BY SA ㅣ 버니 샌더스 Gage Skidmore, Bernie Sanders, CC BY SA)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런 식으로 한두 개의 잣대를 인식 기준으로 삼는 것이 진보라는 광의의 단어를, 그 규정하기 힘든 개념을 과하게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클린턴은 “진보란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혐오’ 또한 마찬가지다. 손희정의 칼럼은 남성과 혐오를 연결짓거나 기독교와 혐오를 연결짓는 것을 두고 사유가 필요하지 않은 지적인 게으름으로 묘사하지만, 난 오히려 식자층이 ‘혐오’라는 광의의, 규정하기 힘든 개념을 무리하게 좁게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혐오는 혐오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개개인의 혐오 자체를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남성혐오는 존재한다. 세상 수많은 것들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는 것처럼.

수입된 정의(定義)

내가 손희정 칼럼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성혐오나 기독교 혐오(‘개독’) 등을 여성혐오나 소수자 혐오와 동등하게 둘 순 없다. 여성혐오나 소수자 혐오는 실제로 차별을 발생시킬 뿐 아니라, 칼럼의 말마따나 그들을 실존적으로 위협한다. 하지만 기독교 혐오는 그렇지 않다. 그것을 법적으로 규제해야 할 것인지는 따로 논의해야 할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여성혐오나 소수자 혐오는 명백히 규탄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기독교 혐오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너는 왜 그것도 모르느냐”는 태도가 가진 위험성이다. 단어에 단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고 그 밖의 해석을 멍청함, 지적인 게으름으로 몰고 가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서구권에서야 긴 시간 논쟁과 숙의를 거쳐 단어의 뜻이 다듬어져왔을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조차 못하다.

이 정의(定義)들은 말하자면 수입된 것이다. 그래서 단어를 좀 더 면밀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쟁의 역사가 짧기에 결론만을 수입해왔고, 그 탓에 교조적으로 빠지기 쉽다. 번역되어 들어온 개념들은 일상어와 혼재되고, 덕분에 일부 식자층을 제외하면 공감을 얻기가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고립된다.

문자 개념 알파펫 언어

혐오와 차별 

한편, 혐오와 차별은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고, 차별은 등급을 나누고 차이를 둬 구별한다는 뜻이다. 산낙지를 혐오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차별할 순 없다. 성소수자를 혐오하지 않으면서도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등 차별할 수는 있다.

이 서로 다른 표현이 뒤섞인 까닭은 여성, 성소수자, 인종, 종교 등에 있어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사회적인 차별을 확대함은 물론 그 자체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등 차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혐오감을 드러내는 표현, 예를 들어 ‘김치녀’ 같은 말들이 ‘여자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식의 차별을 용인하는 표현에 비해 거칠고 극단적인 경우가 많아, 차별의 더 극적인 형태라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적잖다.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단어가 이용되고 자리 잡아온 바도 있고.

하지만 ‘혐오’와 ‘차별’은 특정한 사회적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이런 식으로 차별과 혐오를 혼용하는 것이야말로 오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유색인종과 백인종으로 분리된 식수대
유색인종과 백인종으로 분리된 식수대 (사진: 출처 미상)

개념은 더 분명하게 자리잡혀야 한다.

  • 메갈리아는 남성을 혐오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 메갈리아는 남성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에 편승하거나 이를 확대하는가?

이 둘은 분명히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전자는 ‘혐오’에 대한 문제이며 후자는 ‘차별’에 대한 문제다. 나는 전자에는 “예”라고, 후자에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 메갈리아의 남성 혐오는 사회의 여성 혐오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건 또 다른 문제다. 메갈리아의 남성 혐오는 사회를 지배하는 여성 혐오적 정서에 대한 풍자의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미러링’이라고 부른다. 또한, 사회의 여성 혐오처럼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실질적인 위협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는, 예를 들어 “메갈리아는 사회의 여성 혐오에 대해 반발하여 이를 풍자하는 의미에서 남성 혐오 표현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식의 맥락 위에서라면, 함께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Giovana Milanezi, CC BY https://flic.kr/p/bPL3S8
Giovana Milanezi, CC BY

왜 혐오와 차별을 구별해야 하는가 

나는 왜 혐오와 차별을 명확히 구별하길 바라는가? 무엇보다도, 본질을 흐리기 때문이다. 명백히 다른 개념이 뒤섞이며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분명히 혐오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다수자를 향한 것이므로 혐오가 아니”라 규정한다면 많은 사람이 이에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뻔히 사각형을 그려놓고는 흰 색이 아니란 이유로 사각형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단어의 뜻을 분명히 해야, 그 다음 차원의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

한편 메갈리아의 남성 혐오는 소수자 문제와 결합하면서, 다수의 메갈리아 유저들이 게이도 어차피 남자이므로 혐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웃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는 명백히 차별에 편승하거나 이를 확대하는 데 동조한 것이다. 남성 혐오가 아니라 소수자 혐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혐오의 이유가 성적 지향이 아니라 남성이란 성별이었음을 생각해볼 때 그렇게 피해갈 수만은 없는 문제다. 엄밀히 말해 남성 ‘혐오’가 성소수자 ‘차별’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와 차별을 뭉뚱그려버리면 이런 문제를 설명할 수 없어진다.

자의적인 판단이 지나치게 개입될 공산도 크다. 성별 문제, 인종 문제, 성적 지향 문제가 뒤섞이거나, 한국의 나이 문화처럼 특정 사회상이 함께 반영되는 등 다양한 문제가 뒤섞일 경우 특히 그렇다. 메갈리아의 남성 성소수자 혐오는 대표적이다. 또한 ‘이것은 미러링’이라 주장하며 온갖 혐오 발언을 정당화할 수도 있고, 실질적으로 차별을 불러일으키지만 않으면 단순한 혐오 발언에 모두 면죄부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정명(正名)을 주장한다. 혐오와 차별을 분명히 구별하고, 어떤 혐오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지, 어떤 차별이 혐오를 낳고 또한 어떤 혐오가 차별을 가속하는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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