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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28일 금요일.

그날은 아침 6시 48분에 해가 뜨고, 5시 13분에 해가 졌다.

한 달 전만 해도 점심 먹고 나면 해가 지던 것에 비해 낮이 한결 길어졌다. 하지만 해가 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어둑어둑해 낮이라고 부르기가 머쓱할 정도다. 그나마 낮에 수은주가 0도까지 올라와 한결 포근했다. 저녁이 되니 기온이 다시금 내려가 영하 10도를 향한다.

바다 위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스톡홀름의 공기는 물기를 머금고 있다. 촉촉한 바람이 분다. 이 정도면 걷기 좋은 상쾌한 겨울 날씨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누구 말마따나 총리가 경호원 없이 다녀도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평안한 북유럽의 겨울밤이었다.

그날 팔메는 아내와 코미디 영화를 봤다 

당시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는 아내인 리스베트 팔메와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모차르트 형제들]이라는 제목의 스웨덴 코미디 영화였다. 팔메는 6시가 좀 넘어 퇴근했다. 집에 돌아왔다가 아내와 함께 극장을 향해 나섰다. 이때가 저녁 8시 반이다.

부부는 극장까지 전철을 타고 가기로 했다. 집 근처인 감라스탄역에서 세 정거장 거리다. 로드만스가탄역에서 내린 후 다시 목적지인 그랜드시네마까지 걸었다.

지하철 올로프 팔메
Ingolf, CC BY SA

팔메는 자신과 리스베트의 표를 사러 갔다. 표가 몇 장 남아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스웨덴 공직자가 그렇듯, 팔메는 평소에 총리라고 해서 특별 대우를 요청하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줄을 서서 표를 샀다.

팔메를 알아본 매표원이 극장 감독의 자리로 배정해 주었다. 그날 밤 극장에서 여러 사람이 팔메를 봤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그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했다.

Michael Coghlan, CC BY SA https://flic.kr/p/9iqgnQ
Michael Coghlan, CC BY SA

영화가 끝나고 나니 밤 11시가 넘었다. 2월의 한밤, 스웨덴. 춥긴 해도 걸을 만한 날씨였다. 팔메 부부는 바로 전철을 타는 대신 대로를 따라 한 정거장 걷기로 했다. 팔메는 평소에도 경호원 없이 다니는 것을 즐겼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특별한 일정이 없던 팔메는 그날 오전 11시쯤 평소 자신을 경호하는 두 명의 경호원에게 해산해도 좋다고 했다.

스웨덴 팔메
Ingolf, CC BY SA

그리고 아내와 함께 밤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시내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스베아베겐을 따라 걸었다. 지하철역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미술상인 데코리마(Dekorima, 현재 크레아티마; Kreatima)에 잠깐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로 상점을 구경했다. 상점을 본 후 가게를 지나 길 건너 지하철역 입구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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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olf, CC BY SA

길의 중간쯤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역 입구까지는 몇 걸음 남지 않았다. 이때 총소리가 울렸다. 총을 든 사람은 팔메의 등 뒤쪽 가까이에 서 있었다. 팔메는 뒤에서 총격을 받았다. 등에서 가슴 윗부분까지 관통했다. 치명상이었다.

두 번째 탄환은 아내인 리스베트를 향해 발사되었다. 리스베트는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총을 들고 있던 남자는 역 바로 옆으로 난 투넬가탄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팔메의 죽음, 29년 동안 숨겨진 암살자 

스웨덴처럼 평화로운 나라의 시내 한복판에서 총리가 총에 맞아 죽었는데, 29년이 지난 지금까지 암살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타살에는 동기가 있다. 그 이유가 희생자를 향한 것이든 사회를 향한 것이든 말이다.

더구나 팔메와 같이 격동의 시기를 살면서 여러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언사로 곳곳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누군가는 그가 없어지기를 바랄 만큼 증오했을까. 그의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음모와 추측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팔메에 대한 관심은 대개 여기에 머문다.

하지만 팔메는 죽음보다 삶이 더 빛나는 사람이었다. 팔메의 죽음은 그의 삶을 증명한다. 그는 정치의 고전적 정의가 말하는 기능적 측면에, 현대적 의미의 정치적 기술까지 갖춘 정치인이었다. 카리스마가 넘쳤다.

올로프 팔메( Olof_Palme; 30 January 1927 – 28 February 1986) 1968년 당시의 모습  사진: Folke Hellberg,  www.dn.se http://www.dn.se/kultur-noje/kulturdebatt/darfor-lever-intresset-for-olof-palme-an-i-dag/)
올로프 팔메(Olof Palme, 30 January 1927. 1. 30~1986. 2. 28.) 1968년 모습
(사진: Folke Hellberg, www.dn.se)

그 죽음이 증명한 치열했던 삶 

팔메는 스웨덴의 복지 정책을 근대화했다.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보편 복지를 확대했다. 연대 임금제도의 부작용을 개선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를 잇달아 도입했다. 세금 올리면 나라를 뜨겠다는 기업인들에게 배짱으로 맞섰다. 팔메가 주도한 일련의 개혁을 살펴보면 ‘정치’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인지를 알 수 있다.

팔메 시대에 작은 나라 스웨덴은 외교무대를 주도했다. 팔메는 미국과 소련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제3세계 국가를 지원했다. 국가원수로서 당장 눈앞에 있는 국가 경제의 관점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선택해 무기 수출을 무기한 금지하기도 했다.

미국의 베트남 폭격을 비난하다 미국에서 스웨덴과의 외교 단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중립을 내세워 뒤에서 침묵을 지키기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열강에 맞서는 적극적 중립을 택했다. 미소 열강을 압박하기 위한 제3의 노선을 만들고 지지 세력을 늘려 갔다. 그의 소신 있는 외교는 정치의 기술을 보여 준다.

베트남전 반대 행진에 참여한 팔메 (1968년 2월)
당시 교육부 장관 신분으로 베트남 외교관과 함께 베트남전 반대 행진에 참여한 팔메 (1968년 2월). 이 사건으로 미국은 주스웨덴 대사를 소환했고, 팔메를 맹비난한다. 총리가 된 팔메는 72년 다시 미국의 ‘하노이 공습’을 게르니카 공습 등에 비유하며 비판하고, 이 사건의 여파로 미국은 스웨덴과 외교단절을 선언, 이 단절은 1년 넘게 유지된다.

정치꾼 아닌 정치가, 스웨덴인 이전에 인류 

팔메는 정치꾼이 아닌 정치가였고, 스웨덴인이기에 앞서 인류의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그의 삶은 평범하지 않은 죽음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그를 암살이라는 비극에만 가둬두는 것은 불공평하다. 누군가를 죽임으로 그 삶을 멈추게 할 수는 있지만, 이상(理想)까지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팔메의 죽음은 사람들을 그의 삶으로 인도한다. 팔메의 죽음을 둘러싼 권력의 이해관계야말로 팔메의 삶을 따라가는 길잡이다. 29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암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팔메는 그의 비극적 죽음으로 기억되기보다 삶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2월 28일이다. 오늘 밤 스웨덴의 밤공기는 어떨까.

Bernt Sønvisen,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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