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눈물이 많은 편이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심지어 밝은 내용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다가도 눈물이 나올 때가 있다.
그래서 제일 싫어하는 게 ‘관객 울리려고 작정한 영화’다. 너무 억지스러운 설정인데, 지나치게 극적으로 연출했는데, 머릿속으로는 화가 나는데도 눈물이 펑펑 나온다. 그래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 같은 홍보 문구가 들어간 영화는 기피 일순위다.
혹시 또 하나의 신파영화 아닌가 하는 걱정
[또하나의 약속]을 보기 전에 걱정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가 꽃다운 나이에 백혈병을 얻어 숨진 고 황유미 씨. 그리고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에 나선 아버지. ‘반올림’ 활동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졌기에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반드시 봐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설정 자체가 눈물샘을 자극하는 내용이라 지나친 신파조 영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걱정은 신파에 대한 우려뿐이 아니었다.
시나리오가 지나치게 극적이고 한 쪽은 천사화, 다른 쪽은 악마화함으로써 오히려 거부감이 들게 하지는 않을까? 반대로 너무 다큐멘터리 스타일이어서 극적인 긴장감이나 재미가 없지는 않을까. 반도체 라인에서 일하는 것과 백혈병 및 희귀병과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하느라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어렵지는 않을까? 반대로 극적인 요소를 중요시해 이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는 내용은 대충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홍보하는 방식이나 영화를 보고 온 분들의 리뷰도 헷갈렸다. 주요 극장에서 많이 상영하지 않는다고 계속 강조하는데, 혹시 영화를 재미없게 만들어서 진짜로 관객이 없는 것은 아닐까? 많이들 보고 오시고 추천도 하시는데 “재미있다” “정말 잘 만들었다” 이런 얘기는 없네? (물론 내용상 ‘재미있다’고 할 만한 주제는 아니지만) 혹시 지루하거나 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한 것은 영화를 볼까 말까를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를 내가 남들에게 권유할 수 있을지 걱정해서였다. 정말 좋은 영화였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꼭 보러가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영화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컸다.
담담하지만 눈물겨운 사실의 힘
2월 10일 월요일 저녁 7시, 명동역 CGV에서 본 영화는 다행히도 만족스러웠다. 이런저런 걱정은 다 빗나갔다. 재미없고 지루하지도 않았고, 지나친 신파도 아니었으며, 사실을 과장하거나 일방적으로 주장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난 물론 울었다. 황유미 씨(극 중 이름 한윤미, 박희정 분)가 아버지 황상기 씨(극 중 이름 한상구, 박철민 분)의 택시 안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아버지가 “이 아빠가 네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줄 거야!”하면서 울 때,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 밖에도 눈물을 흘릴 만한 장면은 많았다. 하지만 ‘감정 과잉’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그 점이 좋았다.
잔잔하면서 감동적이었다. 이건 사실의 힘이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택시 뒷좌석에서 눈을 감는 유미 씨. 가장 슬픈 장면이지만 연출이 아니고 실제로 유미 씨는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산재 인정을 않는 대가로 처음 500만 원을 들고 온 진성(삼성)의 실장이 재판이 진행되면서 3억 5천만 원, 10억 원까지 합의금을 올리는 장면 역시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한 실제 사실이다. 공장의 겨우 1개 라인에서 팀장은 백혈병, 부팀장은 피부암, 자신은 이름도 듣지 못했던 희귀 림프종에 걸렸다는 증인의 발언 역시 ‘사실인가’ 싶은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사실이다.
“삼성 반도체 근무와 백혈병 발병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주장을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는 장면은 안타까우면서도 반성이 됐다. 아버지가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공중전화를 붙들고 딸이 죽은 후 방송사, 신문사, 국회의원, 시민단체, 계속 전화하지만 다들 들어주지 않는다. 순간 법원, 검찰청, 국회 앞 1인시위 하시는 분들을 무심한 듯 지나쳤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분들은 절실한데,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나 같은 기자들조차.
재판 장면은 [부러진 화살]이나 [변호인]처럼 극적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원고(공단) 측 참고인(진성)의 주장도 꽤 상세하게 담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의 디테일이 사실적인 장면들로 꽉 차 있기 때문에,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팝콘 먹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집중했다. 연기자들의 열연도 빛을 발했다. 주연을 맡은 박철민뿐 아니라 고 황유미 씨 역을 맡은 박진희, 아주 비중이 작지만 인상적이었던 이경영까지 실제 인물처럼 생생했다. 제작 중단의 위기를 몇 번 겪었던 만큼, 만듦새가 완벽하다고 볼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매끄럽지 않은 게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다.
삼성, 존경받는 기업 되길
영화를 본다면 삼성이라는 기업이 없어지라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 다 알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삼성과 싸우고 싶어 했던 게 아니었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다 쓰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사는 가난한 택시 운전사가 우리나라 정관계 언론은 물론 법조계까지 지배하는 거대 재벌과 싸움을 시작한 것은 영화 속 표현대로 “또라이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삼성은 1심 판결 후에도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은커녕 마지못해 시작한 협상도 1차 협상 후 일방적으로 문을 닫아버렸다(“우리 모두가 반올림입니다” 황상기 씨 경향신문 기고).
영화를 직접 보고 걱정을 날려버린 지금, 사실의 힘으로 진한 감동과 여운을 주는 휴먼 드라마, [또 하나의 약속]을 꼭 보라고 강력히 권한다. 반올림의 활동에 관해 관심을 가졌던 분이나 제작에 참여하신 분뿐 아니라 이제 ‘제2의 수능’이 됐다는 시험을 보고 삼성에 들어가려는 취업 준비생들도, 삼성그룹에 다니는 임직원들도, 삼성 휴대폰이나 가전제품을 쓰는 소비자도, 모두 다 함께 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나라 1위 기업 삼성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으면 좋겠다.
삼성이 진상을 파악하고 잘못엔 책임을 지고 좀 더 좋은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제품뿐 아니라 기업을 운영하는 정신에서도 일류인 글로벌 기업이 된다면 좋지 않겠나. 세상 누구도 영원히 살지 못하고 기업도 영원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왕이면 박수받고, 존경받고, 칭찬받는 기업이 되는 게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