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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여자를 죽일 때만 ‘가해자에 공감’하는 법원

진심으로 사랑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평소 피해자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데다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범행에 이른 점.”

“피고인은 사건 당시 피해자가 정신을 잃자 인공호흡을 하는 등 구조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전고법(청주재판부 형사1부 김성수 부장판사)이 여자친구를 때려 죽인 남성을 ‘집행유예’(1심에서는 징역 6년의 실형)로 풀어주면서 감형 사유로 든 근거들이다. 보도를 통해 드러난 판결의 핵심 요지는 이거다.

‘그럴 수도 있다.’

남성 가해자에 공감하는 법원 

재판부는 ‘사랑’을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 ‘사랑’이 정상 참작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런 사건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주먹으로 때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드는 게 먼저 아닐까. 하지만 재판부는 사실상 ‘술을 먹었다면 때릴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계획적 살인이 아니고, 인공호흡을 했다는 것은 애초에 이 사건을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 혐의로 다룬 이유였다. 그런데 재판부가 살해할 고의가 없었다는 점을 또다시 감형의 이유로 언급한 것은 가해자의 입장에 공감했기 때문으로밖에 볼 수 없다.

사람을 죽인 행위는 고의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중히 다스린다.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삶을 잃었다. 타인의 삶을 빼앗았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게 정의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럴 수도 있다’가 적용될 여지가 어디있단 말인가.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고 여자를 죽인 남자에게 깊이 공감하는 대한민국 법원.

“진심으로 사랑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고 여자를 죽인 남성 가해자에게 깊이 공감하는 대한민국 법원.

살인 사건 5건 중 1건이 남편에 의한 ‘아내 살인’이다. 그 판결들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겁이 나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사랑했고’, ‘우발적이며’, ‘술에 취했고’… 남성 가해자 입장에 서는 건 이렇게나 간단하다.

재판부는 가해자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며 “사회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갈 기회를 준다”고 밝혔다. 학업? 누군가의 인생을 앗아가놓고 학업을 이어가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다른 남자’ 생기면 죽여도 되나 

2018년 1월에도 비슷한 판결이 있었다. 역시 여자친구를 때려 죽인 사건인데, 1심(의정부지법)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이다. 그때도 사법부의 판단은 비슷했다.

“죄질이 좋지 않으나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고자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

2심에서 가해자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건은 비슷하다. 일단 유족과 합의를 했다. 그리고 가해자는 ‘다른 남자’의 존재를 살인의 원인인양 이야기한다. 이쯤되면 ‘다른 남자는 마법의 단어인가?’ 하는 추측마저 든다.

'다른 남자'가 생기면 죽여도 되나? '다른 남자'가 왜 감형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가?

‘다른 남자’가 생기면 죽여도 되나? ‘다른 남자’가 왜 감형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가?

실제로 아내를 죽였음에도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받은 판결에선 ‘가해자 남성의 입장에서 살해를 정당화하는듯한’ 문구들이 등장한다.

  • “피해자의 외도를 의심하여” (2012고합78)
  • “피해자의 외도 사실을 알고 나서 이를 용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2006고합911)
  • “피해자가 전 직장동료와 자주 연락한다는 사실을 알게” (2010고합91)
  • “피해자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장소에 찾아가 일행중 남자들도 끼어있음을 발견하고 (2009고합201).

세상을 떠난 사람은 항변을 할 수 없으니, 가해자 측이 적극적으로 살인이 여성의 부정이 야기한 ‘우발적 사건’이였음을 주장해서 감경받는 것이다.

이런 식의 판결은 살인 가해자들과 그들을 변호하는 로펌에 일종의 신호를 준다. ‘너도 풀려날 수 있어’. 괜히 강서구 주차장에서 전처를 살해한 남성이 평소 딸들에게 “(살인해도 심신미약 감형으로) 6개월만 살고 나오면 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겠는가.

남자가 여자를 죽일 때 vs. 여자가 남자를 죽일 때 

142건의 배우자 살인을 분석한 허민숙 교수의 논문 [살인과 젠더] (2014)에서는 121건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인사건에서는 재판부가 살인의 동기를 과반수 이상 ‘격분’이나 ‘분노’로 해석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해석이 판결문에 나온 경우, 살인 고의가 없는 ‘우발적’ 범행으로 판단하는 것이니 형량이 높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을 죽인 21건의 경우 대부분 약 20년 이상의 장기적 학대가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우발적으로’ ‘격분하여’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남성의 가정폭력을 여성의 격노의 원인이나 살해 동기로 보지 않고, 당연히 정상참작 요소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142건의 배우자 살인 분석(허민숙, ‘살인과 젠더’)

  • 남자가 여자를 죽일 때(121건): 과반수 이상 ‘격노’, ‘분노’로 살해 동기 해석(= 우발적 범행)
  • 여자가 남자를 죽일 때(21건): 재판부는 “우발적”, “격노하여”라는 말 쓰지 않음.
남자가 여자를 죽이면 공감하고, 여자가 남자를 죽이면 냉담한 대한민국 법원.

남자가 여자를 죽이면 ‘공감’하고, 여자가 남자를 죽이면 ‘냉담’한 대한민국 법원.

20년 동안 가정폭력을 당하다가 ‘살기 위해’ 살인을 선택한 여성의 처지는 고려 못하면서, ‘다른 남자’, ‘외도’라는 증언만 나오면 아내나 여자친구를 죽인 남성에 감정이입하는 재판부.

하지만 그런 행태를 이제 시민들이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젠더 관점이 부재한 판결들은 예전과 달리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으로) 언론에 의해 여과 없이 보도되고 있으며, 여성은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크게 분노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남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판결한다면 곧 거대한 저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똑똑히 사법부에 일러두고 싶다.

 

이 글은 필자가 기존에 쓴 기사와 허민숙 교수의 논문 ‘살인과 젠더'(2014)를 본문에 인용, 참고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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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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