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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2주년을 맞아 대통령과 기자가 만나 2시간 가까이 묻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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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선결할 문제가 하나 있다. 항상 가장 어려운 문제는 가장 단순한 질문에서 나오는 법이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인 이유는 그 질문이 ‘명명(命名)’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당연히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본질에 속한 문제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그 질문을 좀 더 구체화하면 이렇다.

(우리는 혹은 적어도 나는)
‘이 인터뷰를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인터뷰의 ‘이름’

1. 이 인터뷰는 ‘문재인(촛불) 정부 2주년 인터뷰’인가?

이 인터뷰는 문재인 정부 2년을 돌아보고, 남은 3년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이 당연한 목적이(었을 것이)므로 이 인터뷰가 그 목적을 달성했다면, 우리는 혹은 적어도 이 글에서 나는, 이 인터뷰를 ‘문재인 정부 2주년 인터뷰’로 불러야 마땅하다.

문재인 대통령(이하 ‘문재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먼저 국민들께 감사 인사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우리 국민들께서는 촛불혁명이라는 아주 성숙한 방법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저를 대통령으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신 위에 서 있습니다. 얼마나 기대에 부응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부분들도 많이 있고, 또 보완해야 할 과제들도 많이 있다고 느낍니다. 앞으로 그 점에 더 집중해서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그런 나라를 만들도록 노력해나가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SBS

송현정 기자(이하 ‘송현정’)는 국민을 대신해서 그리고 문재인은 ‘촛불혁명정부’를 대신해서 함께 ‘대화’하고, 함께 ‘고민’하는 것. 이 인터뷰가 성공했다면, 이 인터뷰는 말 그대로 국민과 정부의 따뜻한 대화 때로는 진지하고 치열한 토론이 되었을 테다. 그리고 언론과 시민들은 그 인터뷰에서 이야기된 많은 이야기들을 더 구체적인 자신의 문제로 체화해 더 생생한 현실의 토론과 대화로 이어가고 있을 테다.

하지만 이 인터뷰를 그렇게 명명하기는 어렵다. 이 인터뷰에서 이 정권을 일으킨 촛불의 의미를 눈꼽만큼이라도 한 번 더 되새기고, 돌아볼 기회를 우리는 가질 수 있었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인터뷰는 문재인 정부의 2년을 제대로 돌아본 것 같지도 않고, 남은 3년의 과제를 함께 진지하게 상의하고, 고민한 것 같지도 않다.

적어도 이 인터뷰를 통해 촛불 정부의 지난 2년을 돌아보는 담론이나 앞으로의 3년을 진지하게 전망하는 목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남은 거라곤 그저 흉터처럼 남은 몇 개의 인상과 가십처럼 얼룩진 몇 개의 표현들 뿐이다.

물론 송현정 인터뷰를 훌륭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긴 하다. 가령 전여옥은 송현정을 “진짜 방송 언론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빠”라는 멸칭과 “달창”이라는 혐오 표현을 쓰는데 거리낌이 없다.

“오늘 문빠 달창들이 제일 뿜었던 것은 ‘좌파 독재’라는 대목이었습니다.”

– 전여옥, 인터뷰 직후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 중에서.

그야말로 거침없다. 그 거침 없음에 기가 질려버릴 정도지만, 나도 이것 하나만은 정말 거침없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문빠”라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이 정상일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달창”이라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이 정상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전여옥
“달창”이라는 혐오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쓰면서 송현정을 “진짜 방송 언론인”이라고 칭찬한 전직 언론인, 전직 국회의원 전여옥. 정상일 가능성은 ‘별로’가 아니라 ‘전혀’ 없다. (출처: 전여옥 블로그)

송현정이라는 인터뷰어에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나 ‘촛불 혁명의 시민’, 지난 2년에 대한 아쉬움과 여전히 3년을 함께 만들어가야 할 기대감이 담겼다고 느낀 시청자는 별로 없을 거다. 모든 인터뷰가 전여옥이 말하는 것처럼 “전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footnote]”인터뷰라는 것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질문을 받는 사람)와의 한 판의 승부이자 전투입니다.”(전여옥, 위 페이스북 게시물에서)[/footnote] 모든 대화는 상대적이고, 관계적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이끌어 갈 앞으로의 3년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자리다. 그런데 정작 송현정의 질문에 담긴 건, 국민들의 ‘촛불’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유한국당과 나경원의 악의적이고 선동적인 프레이밍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재자’다. 그것이 이 인터뷰를 규정하는 ‘인상’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2. 그렇다면 이 인터뷰는 ‘문재인 인터뷰’인가

이 인터뷰는 인터뷰이 문재인 대통령의 전언과 목소리가 강하게 인상적으로 전달되고, 국민(시청자)에게 남은 ‘문재인 인터뷰’인가. 대통령으로서의 문재인이 강하게 남은 인터뷰라면 이 인터뷰를 그것만으로 실패한 인터뷰로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통령 문재인은 그저 한 명의 자연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헌법기관이고,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이며, 대한민국 통치구조의 중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인터뷰는 문재인 ‘정부’라는 시스템의 중핵이 어떤 철학과 어떤 방법론으로 그 시스템의 운동 원리를, 비유하면,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있는지, 설계할 것인지를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 아쉽게도 이 인터뷰는 그런 역할을 전혀 혹은 거의 하지 못했다. 적어도 인터뷰를 두 번 ‘시청’하고, ‘정독’한 나에겐 그렇다.

대통령으로서의 문재인이 고유한 철학과 자기 역할에 관한 원칙 혹은 방법론을 국민(시청자)에게 전달하지 못했다면, 이 인터뷰는 그렇다면, ‘자연인 문재인’의 모습을 국민이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줬을까. 대통령(이라는 역할과 권한과 권력)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문재인의 결핍 혹은 매력을 이 인터뷰는 드러내고 있나. 그래서 대통령 문재인은 아니더라도 인간 문재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돕고 있나.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것 같다.

왜냐고? 인터뷰가 끝나고 남은 건 문재인이 아니라 송현정이었으니까.

문재인 정부 출범 2년, '대통령에게 묻는다'에서 결국 남은 유일한 생존자는 인터뷰어인 송현정 기자 자신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2년, ‘대통령에게 묻는다’]에서 결국 남은 유일한 생존자는 인터뷰어인 송현정 기자 자신이다.

3. 그렇다면 이 인터뷰는 ‘송현정 인터뷰’인가

그렇다. 이 인터뷰는 인터뷰어(송현정)의 개성이 과하게 드러나서 결국 인터뷰이(문재인)까지 지워버리는, 송현정 인터뷰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개성이 표출되는 과정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고, 그 이미지는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기는커녕 인터뷰를 지배하는 감성과 이미지는 권위주의와 불쾌한 긴장감, 그리고 뭔가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이다.

인상비평의 한계를 감당하는 전제에서, 이 인터뷰를 ‘송현정 인터뷰’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니 그렇게 불러야 한다면, 이 인터뷰의 감성과 이미지는 마치 과거 권위주의 정부,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송현정의 문제적 질문인 ‘독재자’, 바로 그 독재자를 연상시킨다.

그 인터뷰의 ‘내용’은 별론으로, 송현정 인터뷰를 흐르는 공기에는 마치 전두환이나 더 나아가 박정희 시절의 관제 인터뷰 같은 뻣뻣함과 경직성이 느껴진다. 인터뷰가 무슨 뽀송뽀송한 시트콤이나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송현정 인터뷰는 너무 건조하다. 너무 사막 같다.

나에게 송현정 인터뷰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사막'이다. 그 구체적인 인터뷰의 내용과는 별론으로 TV를 통해 표현되는 이미지, 카메라의 구도와 앵글도 '콘텐츠의 일부'가 되는 TV 인터뷰라면, 좀 더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각적인 기획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깊게 남는 인터뷰.
나에게 송현정 인터뷰의 지배적인 감성과 이미지는 사막이다. 그 구체적인 인터뷰의 내용과는 별론으로 TV를 통해 표현되는 이미지, 카메라의 구도와 앵글도 ‘당연히 콘텐츠의 일부’인 TV 인터뷰라면, 좀 더 ‘대화’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시각적 설계나 설정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인터뷰에 관한 잔상이 결국 인터뷰어(송현정)로 수렴된다면, 그렇게 느끼는 수용자(시청자, 국민)이 다수라면, 이 인터뷰는 ‘송현정 인터뷰’다. 그렇게 인터뷰어와 인터뷰어 간의 대화와 화학적 작용, 그 상호 삼투하는 의미는 고갈하고, 인터뷰의 주된 목적 중 하나인 인터뷰이마저 증발시켜버린 인터뷰, 그리고 끝내 인상만 잔뜩 쓰고[footnote]나는 당연히 송현정이 일부러 인상을 쓰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고, 당연히 긴장해서 생긴 표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처럼 보인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footnote], 어떤 식으로든 ‘고군분투’하는 인터뷰어만 남겨 놓은 인터뷰, 그 인터뷰가 성공할 리 만무하다. 이 인터뷰는 송현정 인터뷰고, 그래서 실패한 인터뷰다.

나는 이 글에서 이 인터뷰를 ‘송현정 인터뷰’로 부르려고 한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하 그 이유, 그러니 ‘촛불 정부 2주년 인터뷰’가 되지 못하고, 결국 송현정 인터뷰가 되어버린 그 이유를 좀 더 상술한다.

“현직 언론인”이 보기엔 괜찮았어요?

우선 송현정 인터뷰를, 정치적인 당파를 떠나, 저널리즘 상품으로 평가해보자. 송현정 인터뷰는 저품질 상품이다. 국민일보의 놀라운 이분법처럼, 송현정 인터뷰는 “네티즌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고, “현직 언론인들”이 보기엔 별로 문제가 없는 그런 인터뷰가 아니다.

“네티즌들의 비판은 대략 3가지로 요약됐다. 대통령의 말을 중간에 끊는 게 무례했고, ‘독재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질문이 부적절했으며, 인터뷰 내내 지은 독특하게 찡그린 표정이 불편했다는 것이다.

(중략)

현직 언론인들은 송 기자의 대담과 송 기자를 향해 쏟아지는 국민적 비난 및 칭찬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국민일보는 10일 신문기자 6명과 방송기자 1명을 포함해 총 7명의 현직 언론인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송 기자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기자 7명 중 5명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중간중간 말을 끊고 표정을 찡그린 행동에도, 질문의 수위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 국민일보, “송현정 기자 태도, 문제였나” 현직 언론인 7인에게 물었다’ (2019. 5. 11.) 중에서

국민일보

내가 보기에 송현정 인터뷰는 그냥 전반적으로 망한, 저널리즘의 관점에서도 저품질인 그런 인터뷰다. 이 인터뷰가 별로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기자나 언론학자가 있다면, 글쎄, 그렇게 느끼는 것까지 내가 어쩔 수는 노릇이지만,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자세한 설명을 듣고, 배움을 얻고 싶다. 진심이다. 알려주시라.

그런데 “네티즌들은 왜 이렇게 비판적인”지에 관해 국민일보 기사 속 “현직 언론인”의 진단은 놀랍다.

“왕에게 공손히 질문해야 하듯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일부 국민이 바라는 것 같다. 한국이 여전히 왕조사회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종합일간지 정치부 기자 E씨)

“문 대통령의 팬들은 실례 되는 표현으로 느꼈던 것 같다” (경제지 산업부 기자 F씨)

정말 눈을 의심했다. 익명화된 “현직 언론인”이 “네티즌들이 왜 이렇게 (송현정 인터뷰에) 비판적”인지에 관해 정말 믿어지지 않는 훈계를 전해주신다. 이건 정말 당파성이고 뭐고를 떠나서 어이가 없다. 국민을 “문대통령의 팬”으로 취급하거나 “왕조사회”를 사는 봉건주의적 잔재로 취급한다. 이래도 되는 건지는 정말 모르겠다.

몬스터 종이신문
국민일보 속 “현직 언론인” 중에는 송현정 인터뷰에 비판적인 국민을 “문재인 대통령의 팬”이나 “왕조사회”의 신민으로 바라보는 기자도 있다.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선민의식이 가장 유치하고 천박한 형태로 발현됐다고 밖에는 말할 길 없다. (출처: epSos.de, CC BY)

“7명의 현직 언론인”이 대한민국 언론을 대표하는 건 전혀 아니고, 인턴기자가 ‘삑싸리’ 낸 기사에 무슨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생각도 없지만, 이토록 민감한 소재에 관한 기사가 데스크의 승인을 거쳐 포털에 송고됐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리고 송현정 인터뷰가 별 문제 없다는 국민일보 기사 속 “현직 언론인”에 분노하는 다수 “네티즌들”에 깊이 공감한다. 그 네티즌의 분노는 정당하다. “문 대통령의 팬들” 운운하는 기사에 예의를 갖추는 것은, 국민일보 기사 속 현직 언론인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일이다.

여전히 지상파라는 강력한 공공재를 장악한 어느 기득권 언론인의 오만과 게으름, 그리고 전혀 느껴지지 않은 촛불의 시대정신, 기자의 비판정신으로 미화된 권위적 태도와 불필요한 공격성. 마치 서로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송현정 인터뷰에 짜증난 시청자를 다시 한번 “문재인의 팬” 취급하고, “왕조사회”의 신민 취급하는 국민일보 기사 속 현직 언론인의 오만한 훈계는 서로 닮았다.

문재인 대통령을 "왕"으로, 그리고 송현정 인터뷰에 비판적인 시민을 "문재인의 팬"으로 표현한 국민일보 기사 속 "현직 언론인"은 도대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 걸까.
문재인 대통령을 “왕”으로, 그리고 송현정 인터뷰에 비판적인 시민을 “문재인의 팬”으로 표현한 국민일보 기사 속 “현직 언론인”은 도대체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걸까.

저널리즘은 일반 대중, 달리 말하면 시민 혹은 국민을 소비자로 하는 특수한 형태의 공익적 서비스 상품이다. 그래서 언론산업은 B2B(기업 대 기업, 즉 언론사 대 언론사)가 아니라 본질에서 B2C(기업 대 소비자, 즉 언론사 대 국민)다. 국민에게 실패했다면, 그저 남긴 거라곤 당파적 갈등을 극단적으로 부추기고, 인신공격적 발언을 옹호(예: 전여옥)하는 맹목적 오호만 남긴 인터뷰라면, 그 인터뷰는 실패한 인터뷰다.

송현정 인터뷰는, 거듭 말하지만, 촛불 정부 2주년을 돌아보고, 촛불 혁명으로 세워진 문재인 정부가 남은 3년을 어떤 철학과 원칙 그리고 방법론으로 공동체를 이끌어갈지에 관한 국민과 대통령의 대화와 토론장이어야 했다. 송현정이라는 개인이 문재인이라는 개인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당황하게 하며, 엿먹일 수 있는지에 관한 게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국민일보 기사 속에서 “현직 언론인”은 인터뷰 보고 화난 국민을 “문대통령의 팬”이라거나 “한국이 여전히 왕조사회에 머물러 있”다고 훈계한다. 무지하다기보다는 천박하고, 천박하다기보다는 오만하다. 내가 “현직 언론인” E씨와 F씨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 말뿐이다. ‘그래, 너는 그렇게 살다가 가라.’ 

독재자 질문 그리고 질문에 질문하는 자 

송현정 인터뷰에서 가장 문제된 부분은 문재인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정확히 그 질문과 답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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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정 기자:

제1야당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자유한국당 입장에서 보면 ‘야당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정국을 끌어가고 있다’ 이런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대통령께 ‘독재자’라고 얘기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독재자’라고 들으셨을 때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문재인 대통령:

정말 그 촛불 민심에 의해서 탄생한 그런 정부가 지금 독재, 그것도 그냥 독재라고 하면 또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 색깔론을 더해서 ‘좌파 독재’ 이런 식으로 규정짓고 투쟁한다고 하는 것은 참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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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란 어떤 존재인가. 기자를 규정하는 다양한 철학과 관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생각으로 기자는 질문에 질문하는 존재다. 그것은 기자라는 존재의 본질에 속한 부분이다. 기자는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 누군가를 향해 질문하고, 그 질문을 위해 질문에 다시 질문한다. 그래야 한다.

기자는 본질에서 어떤 질문이 진실로 질문이 되어도 좋은 지에 관해 다시 질문하는 존재다.
기자는 본질에서 어떤 질문이 진실로 질문이 되어도 좋은 지에 관해 다시 질문하는 존재다.

그래서 기자는 단순히 뱉어진 어떤 말, 벌어진 어떤 사고, 일어난 어떤 사건을 그저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스스로 다시 질문하고, 거기에 다시 대답해서 그것이 질문이 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질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것이 질문이 되어야 한다면, 그 질문에 가장 적합한 해답은 무엇인지, 그 해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인지를 끊임 없이 찾아간다.

그런데 송현정의 ‘독재자’ 질문은 그 질문에 관한 질문이 없다. 기자라면, 그것도 공동체의 운명에 관해 그 희망과 좌절, 분노와 갈등에 관해 대통령과 ‘대담’씩이나 하는 존재라면, ‘독재자’와 같은 어마어마한 단어를 꺼내면서 그 단어에 관해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송현정 인터뷰에는 놀랍게도 그 질문에 관한 질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제1야당이, 나경원 원내총무가 그렇게 혀와 입술로 ‘독.재.자’라고 ‘발음’했으니까 그 말을 빌려서 질문한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경원. 최근 일베를 싱크땡크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은 2013년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2.0)
나경원. 최근 일베를 싱크탱크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은 2013년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2.0)

질문에 관한 질문은 아주 간단하다. ‘독재자’를 언급하기 전에 송현정은 반드시 아래의 과정을 거쳤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행위는 정당하고 의미있는 행위인가.
  2. 그것이 정당하고, 의미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 근거를 정리해 질문하면 된다.
  3. 그것이 정당하지 않고, 의미 있기는커녕 진실 추구를 방해하는 ‘소음’이나 당파적 이익에 바탕을 둔 무책임한 ‘선동’이라면, 조지 레이코프가 당부한 것처럼, 프레이밍의 원칙론상 그것을 언급하지 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 코끼리를 떠올리게 되니까. 다만, 부득이하게 꼭 언급해야 한다면 그것의 부당함과 허위성을 비판해야 한다.

송현정의 ‘독재자’ 질문에 1번의 질문이 있었나. 2번이나 3번의 판단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 있었다면 저런 형태로 질문이 나왔을 리 없다. 단순히 ‘독재자’라는 표현이 문제가 아니다. 독재자라는 대단히 민감하고, 자극적이며, 선동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에 관해 다시 질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박정희

위 1. 2. 3의 과정을 간단히 진행해보자.

자한당이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행위가 정당화되기 위해선 문재인 대통령이 독재자여야 한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직장'(두 번째 MBC)에 다니는, 넉넉히 사회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이 대통령과 대담하면서 ‘야당에서 당신을 독재자로 부르던데 그렇게 불리니 어떤 느낌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는 나라가 독재국가일 리 없고, 그런 질문을 ‘감수하는’ 대통령이 독재자일 리 없다.

‘독재’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한국당이 ‘독재자’로 누군가를 비판해야 한다면, 비판할 수 있다면, 그 기준이 되는 너무도 완벽한 모델이 존재한다. 자유한국당의 뿌리이자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와 전두환이다. 서울신문 문소영은 “독재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독재에서 시민의 삶은 어떠한가. 한국의 대표적인 독재인 ‘박정희 개발독재’와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을 살펴보면 되겠다.

(중략)

문재인 대통령을 두고 야당의 정치인들이 자유롭게 “독재자”라고 저격하며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는다면, ‘막걸리 긴급조치’라던 박정희 시대와 비교해 과연 독재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표현의 자유가 넘쳐 흐르다 보니 ‘달창’과 같은 여성 비하적인 혐오 발언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입에서 나오고, ‘태극기 집회’ 등에서 대법원이 부인한 ‘5·18 북한군 침투설’과 같은 가짜뉴스를 유포하며 시민사회를 교란하는 지경이 됐다.”

-서울신문, 문소영, “독재란 무엇인가” 중에서 (2019. 5. 15.)

전두환. 80년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고, 무수한 폭압으로 정권 내내 무고한 피를 뿌린 전두환. 곧 5.18이다. 그리고 아직 전두환이 29만원으로 호위호식하는 나라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전두환. 80년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고, 무수한 폭압으로 정권 내내 무고한 피를 뿌린 전두환. 곧 5.18이다. 그리고 아직 전두환이 멀쩡하게 29만 원으로 호위호식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에 죄짓는 기분이다.

문소영의 상식적인, 너무도 상식적인 논리에 말에 어느 것 하나 반박할 수 있는가. 이 상식을 누군가 반박할 수 있다면, 그 근거를 나에게 알려준다면, 그렇다면 나도 송현정의 독재자 질문을 옹호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독재’를 역사적으로도 악질적인 전두환이나 박정희의 기준에 맞춰서 ‘하향평준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문재인을 독재자로 비판하려면, 그리고 그 비판을 질문으로 당사자에게 던지려면, 거기에 합당한 최소한의 근거가 필요하다. 나는 그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문재인의 ‘인사 정책’에 한정하면, ‘독재자’가 아니라 ‘독단적’이라는 정도의 평가와 비판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자유한국당이 말하는 그야말로 뜬금없는 선동에 불과한 ‘독재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참고로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약속한 좀 더 높은 도덕성을 견지하는 인사 원칙에서 문재인 정부는 꽤 후퇴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자기 안에 있는 ‘우리’

송현정은 자신의 말처럼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했을 존재다. 그 자격으로 대통령과 대담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나는 이 인터뷰의 실패가 의도적이거나 악의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송현정도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고, KBS도 나름으로 애써 준비했으리라 믿는다. 애쓴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 애썼지만, 그저 결과가 참담하고, 불쾌하며, 소모적이었을 따름이다.

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이름이 ‘혁신’이라는 무소불위의 표어로 지워내는 가치들, ‘낡고 오래되어 보잘 것 없어진 것들’에 관해서 구체적인 쟁점과 정책의 맥락 속에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길 바랐다. 모르는 척 하고 싶어도 정말 보고 싶지 않아도 점점 더 체감하고 눈에 보이는 특히 젊은 세대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갈등을 풀어갈 정책적 해법, 문화적 해법에 관해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고민을 품고 있는지 궁금했다. 점점 더 사기업이 제공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줄고, API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디지털 경제의 양극화는 심화하는 산업구조의 혁명적인 변화 속에서 기본소득을 비롯한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이 이번 대담에서 적어도 맹아적인 형태로나마 언급될 수 있기를 바랐다.

재벌과
송현정 인터뷰에서 남은 건 송현정 그 자신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워졌고, 모든 국민이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들, 마땅히 함께 숙고해야 할 미래의 숙제들도 흩어져버렸다.

나에게만 간절하거나 나에게만 궁금한 이야기를 송현정이 대신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나에게만 간절하거나 나에게만 궁금한 이야기를 문재인 대통령이 대신 답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누구나, 심지어 나경원 원내총무에게도!, 그 자기 속에 ‘우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송현정도 문재인도 심지어 나경원도 그 자기 속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함께 조화롭게 그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송현정은 이번에 실패했고, 나경원은 내내 실패하고 있다. 그것은 내 개인적인 판단에 불과하지만, 그 개인적인 바람이 모여 ‘촛불’이 되기도 한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문재인만은 실패하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고 인터뷰에 관해선, 다음 3주년에는 더 재밌고, 더 따뜻하고, ‘독재자’ 이야기 따위 없어도 치열하고 열띤 그런 인터뷰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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