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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테러와 이상한 나라 프랑스의 미국 콤플렉스

이 글은 샤를리 테러 이후, 프랑스에 대해 그동안 내가 체험하고, 품었던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정리한 글이다.

유럽이 미국과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를 짚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 글에서 유럽, 특히 프랑스의 사정을 설명하며,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믿어왔던 한 가지 윤리가 어떤 특수한 문맥에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로 말미암은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유럽은 이민자를 원하지 않는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이민자에 의해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 이민자를 받아들였던 것도 아니다. 물론 과거 제3세계에 대한 착취나 노예제도가 유럽을 지탱했던 근간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유럽에 밀려온 이민자들은 유럽이 원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째, 제일 큰 문제는 이민자들이 유럽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서 방치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 한정하자면, 한국에 비하면 인종차별이 미미한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이민자가 프랑스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민자가 진짜 프랑스인으로 인정받기 힘든 눈에 보이는 장벽이 있다. 프랑스에서 이민자의 지위를 정확히 분류하자면 피착취자나 피억압자가 아니다. 이민자들은 프랑스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인간’으로 분류된다.

증오 (마티유 카소비츠, 1995)   프랑스 빈민촌 '방디유'를 공간적 배경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유대계 청년 빈스와 아랍계 청년 사이드 그리고 흑인 위베르가 겪는 24시간을 그린 영화.

증오 (마티유 카소비츠, 1995)
프랑스 파리 빈민촌 ‘방리유’를 공간적 배경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세 청년(유대계 빈스, 아랍계 사이드 그리고 흑인 위베르)이 겪는 24시간을 그린 영화. 영화 [증오] 이후 10년 후인 2005년에는 파리 폭동이 터졌고, 20년 후에는 샤를리 엡도 테러가 벌어졌다.

둘째, 이런 상황을 유럽인들 자신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문제는 사소한 듯 보였지만, 나름의 윤리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가 샤를리 테러를 기점으로 터져 나왔다. 터져 나왔다는 것은 유럽인 자신의 입으로 이런 상황에 대한 불만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두 번째 문제를 단순히 국가주의나 인종주의라고 부르기가 좀 망설여진다.

이민자 대하는 프랑스의 태도 

이민자에 대한 유럽인의 태도는, 적어도 프랑스에 한정하자면, 우호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적대라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한 것이다. 프랑스는 이민자들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아버지도 아니었다. 프랑스는 아예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인들은 이민자를 사회에 통합하는 것이 선(善)이 아니라 국가 폭력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이것이 프랑스가 미국과는 다른 점이고,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점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또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양 극단의 대립 가운데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을 양 극단으로 나누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 양쪽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다. 우린 막연하게 그들이 ‘우리 쪽 세계’에 속할 거라고 가정한다. 또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가치와 비슷한 윤리를 갖고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프랑스는 왕조국가 북한이나 불교국가 부탄만큼이나 충격적으로 이질적인 세계에 속한다. 일부 이슬람 국가가 지금도 여전히 중세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프랑스가 지금도 여전히 19세기 말(프랑스의 황금시대, 벨 에포크 Belle Époque)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그들은 우리(즉, 교육을 받은 다른 나라의 문명인들)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민자 통합을 진보적이거나 선(善)한 가치로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이 몰두했던 주제는 오직 유럽 내부의 통합이었을 따름이다.

알프레드 롤(Alfred Roll, 1846-1919)의 작품

알프레드 롤(Alfred Roll, 1846-1919)의 작품

공화주의의 확장

나는 테러 이후 프랑스의 반응, 즉 평범한 사람들 수백만 명이 거리에 쏟아져나온 그 추모행렬을 국가주의나 인종주의가 아닌 공화주의의 확장이라고 본다. 프랑스식 공화주의는 몹시 자국민 중심적이다.

국가 공동체와 구성원들이, 또 구성원들끼리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강하게 결속되어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민자와 같은 외부인에게는 열린 공간이 아니다. 그들은 배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사실 그게 배타적인 것 맞다.

그러나 그걸 우경화라고 말한다면 프랑스인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좋은 교육을 받고 시야가 트인 프랑스인일수록 더욱 발끈할 것이다. 테러의 규모가 다르기는 했지만, 9.11 직후의 미국과 비교해보라.

사람들의 염려와 달리 테러 이후 프랑스는 우익이 세를 넓히기는커녕 사회당(사민주의 성향이다)의 지지율만 크게 높아졌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인종혐오를 부추기는 댓글이 이따금 있지만, 아주 빠르게 자정된다. 우경화가 아닌 것이다. 단지 원래부터 프랑스의 윤리가 이민자 통합을 선한 것, 자국민 중심주의를 악한 것으로 분류하지 않아 왔을 뿐이다.

이민 정책: 프랑스 vs. 미국 

프랑스의 이민자 정책은 미국의 이민자 정책과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프랑스가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거의 교류가 없는 채로 자유롭게 놔두는 것이다.

파리의 어느 동네에는 아시아인만 산다. 다른 동네에는 아프리카인들만, 또 다른 동네에는 아랍계 사람들만 산다. 단지 거주자의 인종 구성만 다를 뿐 아니라 그 동네의 거리 풍경과 냄새까지 다르다. 아시아인들만 사는 동네는 정말로 동남아시아처럼, 아프리카인들만 사는 동네는 정말로 아프리카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프랑스의 주류 정체성에 쉽게 동화되지 않는다. 흡사 한 나라 안에 여러 개의 나라가 또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상당한 불안 요소이지만, 나 자신은 개인적으로 정말 재미있었다.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극단주의 종교로 채우는 이민자가 생겨나는데도 말이다.

2005년 프랑스 폭동(10월 27일~11월 16일)

2005년 프랑스 폭동(10월 27일~11월 16일)

반면에 미국은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산다. 대도시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들은 점차 서로에게 동화되며, 세대를 내려갈수록 혼종되어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인다. 이것은 마치 UFC와 비슷하다.

초창기 UFC는 태권도, 유도, 주짓수 선수들이 서로의 기술로 겨루는 경기였지만, 대회를 거듭하면서 서로서로 기술을 배워 급기야 혼종된 종합격투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에서 UFC는 불법이며 ‘이건 너무 미국적이군’이라 일컬어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젊은 남성들은 은밀히 챙겨본다.)

샤를리 테러 = 프랑스 이민 정책 실패인가? 

미국의 이민자 정책과 비교하여 우리는 프랑스의 방식을 게토화라고 손쉽게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샤를리 테러야말로 프랑스 이민자 정책의 실패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린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등을 보고서도 미국 이민자 정책의 결과라고 했던가? 우린 퍼거슨시 소요를 보면서 인종갈등이라고 여기는가, 아니면 계급갈등이라고 여기는가?

여기서 프랑스의 극우파 정당 E&R(Égalité et Réconciliation)은 반유태동맹이라는 기치 아래 이슬람 유권자들을 포섭해왔다는 것을 언급해둔다. E&R의 주요 지지층은 장기실업 상태의 프랑스인 남성뿐 아니라 그들과 전혀 다른 지역에 사는 무슬림 인구다. 그 나라의 정치 지형에선 친-이슬람이 반드시 진보적 가치로 읽히지 않으며, 반대로 반-이슬람도 반드시 극우파의 주장으로 읽히지 않는 것이다.

대외적으론 반미(차베스의 얼굴) 노선을 표방하는 E&R당(평등과 화해당)

E&R당(=평등과 화해당) 포스터 속 얼굴은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 현재는 5%가 넘는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들어 테러 이후 프랑스의 반응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국가주의나 네오나치라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지도 모른다. 우리가 좌파적, 우파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일 수 있다. 프랑스가 이슬람을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점을 이해해야 한다.

프랑스의 이질성…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프랑스의 정치적, 윤리적 결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 그 나라의 공화주의를 보면서 어떤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낀다. “나는 샤를리”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숫자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며칠간이나 생각해야 했다. 일단 불편함의 원천은 프랑스가 정말 이상하고 이질적인 나라라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이질적인 특수성이 미국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된 것 같다는 점 때문이다.

프랑스는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일상 영역까지 깊게 박혀있는 나라다. 그 이유는 아마 국제무대에서 겪는 박탈감 때문이리라. 100년 전만 해도 모두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썼지만, 이제는 모두가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거기에 더해 프랑스어는 금세기 안에 사멸할 거라는 연구까지 나오고 있다. 한동안 패권국가였던 나라지만, 프랑스가 지금도 100년 전과 같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펠탑(1889)과 자유의 여신상(1886). 거의 동시대에 지어진 프랑스와 미국의 상징물. 잘 알려진 것처럼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국민이 미국 독립 100주년을 위해 선물한 것이고, 자유의 여신상을 지은 건축가/회사 역시 귀스타브 에펠이다.

에펠탑(1889)과 자유의 여신상(1886). 거의 동시대에 지어진 프랑스와 미국의 상징물. 잘 알려진 것처럼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국민이 미국 독립 100주년을 위해 선물한 것이고, 자유의 여신상을 설계한 건축가/회사 역시 귀스타브 에펠이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프랑스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오랜 옛날의 예술가들만 알고 지금 활동하는 음악가나 예술가들이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진짜 이상하지 않은가? 프랑스라는 나라는 굉장히 유명한데 우린 그 나라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거다. 심지어 이번 테러 같은 사건이 아니었다면 뉴스에도 안 나온다. 이런 상황은 점점 더 심해져 간다.

아마 50년, 100년 뒤면 리히텐슈타인이나 룩셈부르크처럼, 잘 살기는 한다는데 어디 붙어있는지는 모르는 듣보잡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분명 프랑스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일 테다.

프랑스적 고유성 혹은 미국이라는 가상의 라이벌 

프랑스는 지난 세기 동안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미국을 가상의 라이벌로 대함으로써만 가능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영어에서 온 단어를 불어로 다시 만들고, 미국식 대중문화를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고, 미국식 프랜차이즈 기업의 확장을 통제하는 등(던킨도넛 찾아보기도 힘들다!), 문화적으로 또 이념적으로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또한 우리가 일본문화를 싫어하면서도 은밀하게는 지대한 관심을 두는 것처럼, 미국문화를 싫어하면서도 사실은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어쩌면 그건 사실 자기 나라가 여전히 문명화와 근대화의 중심에 있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은 아닐까? 프랑스가 패권국가 미국과 견줄만한 유일한 나라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미국으로 중심이 넘어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프랑스에 사는 한국인 10명 중 9명은 이런 경험이 있을 거다. 프랑스인이 외국의 영화나 음악을 접하고서는 “이건 너무 미국적이군.”이라고 말하는 것 말이다. 심지어 그 영화나 음악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 등 다른 나라의 것이어도 그런 말을 한다. 그들에게 적어도 문화는 프랑스 문화와 미국 문화, 딱 둘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후자에 속하는 것을 무시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이다.

영화 [몽상가들] 통해 프랑스 이해하기 

유럽이 미국과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프랑스에 살 때 이민자 문제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지점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그들보다 훨씬 많이 미국식 윤리를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곤 했다. 앞서 썼던 것처럼, 나는 프랑스가 왕조국가 북한이나 불교국가 부탄만큼이나 충격적으로 이질적인 세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은 이런 프랑스의 이상함을 잘 나타내주는 영화다. 영화 속 프랑스인 남매는 실제로는 성적인 관계가 아니며, 금기를 깨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다.

몽상가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2003)

몽상가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2003)

그렇지만 관객의 눈을 대신하는 미국인 청년은 정말로 그 남매가 그런 비밀스레 섹슈얼한 관계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미국인 청년은 끝까지 그 남매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남매 또한 끝까지 그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샤를리의 만화들도 마찬가지다. 그 만화들은 프랑스의 기준에서 그저 개그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을 대신하는 미국인 청년이 있다면 그는 그 만화를 정말로 지저분한 인종차별 만화로 볼 것이다. 그는 끝까지 그 개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프랑스 만화가들도 끝까지 그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고맙다” “오늘만큼은 파리가 세계의 수도” 

테러 이후 프랑스인들이 보인 행동 중 진짜 이상했던 것이 한가지 있다. 그들은 외국 언론사의 테러 사건 보도에 연신 “고맙다”는 댓글을 달고 있었다. BBC, CNN, 로이터, 알자지라, 어딜가나 프랑스인들이 보였다. 심지어 샤를리 신문에 우호적인 보도가 아닐 때에도 말이다. 나는 그런 고맙다는 말을 내 프랑스인 친구들에게 개인적으로 듣기도 했다. 그 친구 중 국가주의나 군중심리에 휩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일은 나에게 마치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는 외국 언론에 대고 우리가 “고맙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드디어 프랑스가 국제적 이슈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 고마웠던 것은 아닐까? 이런 내 생각이 악의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조금 더 얹겠다. 샤를리 추모 행진에서 올랑드 대통령은 이런 연설을 했다.

“오늘만큼은 파리가 세계의 수도입니다!” (올랑드 대통령) 

이 말은 그의 국민들을 고무시켰을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연설에서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까지 들리는 말이었다. 이 연설은 역설적이게도 파리가 100년 전과는 달리 더는 세계의 수도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더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거기에 더해 이해받지 못하는 이질적인 나라가 되었다는 것, 그것에 대한 프랑스의 콤플렉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기로에 선 프랑스 

이제 프랑스는 강제적으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자신들의 19세기적 가치를 계속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상황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갈림길이다. 이민자 통합이라는 문제는 그들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은 그걸 외부로부터 던져진 윤리적 강요라고 인식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민자를 사회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프랑스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이건 너무 미국적이군.”이라 말할 법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다시 그들 나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 가치가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전자는 곧 고립이다. 그러나 그들은 후자를 그들이 은밀히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왔던 대상, 즉 리버럴하고 상대주의적인 미국식 윤리에 대한 패배라고 생각할 것이다.

남겨진 질문들 

유럽과 미국은 다르다. 프랑스는 정말 미국과 다른 나라가 되려고 해왔다. 그런데 그 다름으로 인해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남의 나라의 일인데도 말이다. 단지 인종차별이나 종교차별인 듯했던 만화 때문일까? 아니면 그 만화가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을 자극했기 때문일까? 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테러를 규탄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을 네오나치와 연결지어 상상하는 사람들 때문일까? 또는 테러와 함께 무엇이 보편적 윤리인지 결정된 듯하기 때문, 즉 “이민자들이 국가에 통합되는 것이 옳다”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 하나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게 정말 옳은지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없기 때문일까? 또는 그 가치에 대한 대안을 실행하는 것이 프랑스처럼 콤플렉스로만 가능하기 때문일까?

정녕 통합과 배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다른 윤리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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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손이상
초대필자. 생활가.

1986년 아시안게임 관람. 1988년 올림픽 관람. 2002년 월드컵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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