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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dictator’)의 어원은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구술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독재자는 혼자만 말하는 사람이다. (1985년 3월 14일)
– 김현, [행복한 책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9)

KBS 뉴스에 비친 10.29 참사 다음날 중대본 회의의 풍경. 윤석열 대통령은 혼자 말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허수아비처럼 윤석열 앞에 널려 있는 총리, 장관들, 기관장들은 일타 강사 윤석열 선생님을 숭배하는 수강생들처럼 보인다. 윤석열이 혼자 말한다:

‘압사 단어는 빼세요.’

KBS 뉴스, [단독] 이태원 참사 다음날, 대통령 주재 회의서 “‘압사’ 단어 빼라” 결정 (2022. 12. 7.)은 그 자체로 코믹하지만, 그걸 보는 심정은 동시에 참담하다. 회의에 참석한 자들의 그 공허한 가슴과 텅 빈 머릿속에서 나온 회의 결과와 그 결과를 열심히 ‘카톡’으로 전달하는 모습은 코믹하지만, 저들이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고,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며, 심지어 생명을 지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공직자들이라는 사실은 참담하다.

 

독재 정권에게도 가장 어려운 통제 대상은 ‘생각’이다. 저항하는 육체를 가두거나 심지어 그 생명을 앗아가는 극악한 독재 정권도 국민의 생각마저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검열을 한다. 스탈린과 모택동이 그랬고, 김일성과 전두환이 그랬다. 그래서 검열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권력 집단의 도구로 사유화하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윤석열 정부에 관해 나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 일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의식하고, 노력하는 편이다. 정치적 당파에 관해 말하자면, 국민의힘에 비판적인 것만큼, 민주당에 비판적이다. 정치 이야기들에 휩쓸리면 영혼, 그런 게 있다면, 그 영혼이 갉아먹히는 느낌이 든다. 나는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이 두렵고, 인스타의 그 반짝거림이 낯설고, 트위터의 그 거대한 재잘거림이 혐오스럽다.

그런데도 윤석열, 참 해도 너무한다…

나는 윤석열 정부에 관해선 재벌 친화적이고, 검찰 친화적이라는 인상 정도를 가지고 있지만, 솔직히 큰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래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사건이 있다. 동남아 순방길에서 보여준 김건희의 어이없는 ‘오드리 헵번’ 따라하기와 10.29 참사에서 드러난 윤석열의 ‘언어적 통제욕’이 내 정치적 혐오에 바탕한 무관심을 흔들어 깨운다.

2022년 캄보디아 김건희(왼쪽, 출처: 대통령실)와 1992년 소말리아 오드리 헵번 (출처: 유니세프 페이스북) 동남아 순방에서 노골화된 김건희의 이미지 메이킹과 10.29 참사에서 표출된 윤석열의 언어적 통제욕은 서로 닮아 있다. 그리고 괜히 오드리 헵번에게 미안하다.

박정희 시절을 많이 살아보진 못했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시절에 유년기와 사춘기를 통과한 나에게 ‘노동자’라는 말은 ‘빨갱이’라는 더 두려운 말들의 풍경 속에 있는 무서운 단어였다. 그 단어는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정수라, 아! 대한민국, 1983)에서는 금기의 단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언제나 자유로운 곳”의 저편에서 대한민국의 진실을 노래한 가수들도 있었다. 정태춘은 동명의 곡을 만들어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정태춘, 아! 대한민국, 1990)이라고 토로하며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 하루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은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않나”라고 자조적으로 절규했다.

넥스트는 ‘아! 개한민국'(2004)에서 “소녀를 돈을 주고 사고, 교수를 돈을 받고 팔고, 천당을 돈을 주고 사고, 팔아 팔아 있을 때 사거라. 남편은 애 엄마를 패고, 선생은 학생들을 패고, 의원님은 지들끼리 패고, 패라 패라 뒤질 때까지. 아아 개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라고 자신의 조국을 향해 노골적인 혐오와 야유를 던졌다. 사랑이 크면, 증오도 크다.

‘노동자’ 대신 ‘근로자’를 쓰도록 강제한 전두환 정부와 ‘참사’ 대신에 ‘사고’라고 부르도록 지시한 윤석열 정부는  그 단어를 통해 국민의 자유로운 감정과 의사를 호도하고, 통제하려는 그 맥락에서 같다. 전두환 정부와의 유비가 과하더라도, 10.29 참사를 ‘사고’라고 부르자는 정신 나간 정부, 참사 초기 공식 문건에서 ‘압사’라는 단어를 빼라고 지시하는 ‘빨간펜’ 대통령은 정상이 아니다.

국민이 10.29 참사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분노를 정말 조금이라도 공감했다면, 저들이 ‘압사’라는 단어를 빼고 말고하는 저런 고민(?)으로 ‘중대본’ 회의 시간을 채울 수는 없었으리라. 10.29 참사 유가족의 슬픔에 눈곱만큼이라도 공감했다면 ‘희생자’를 ‘사망자’로 부르자는 따위의 생각을 떠올릴 수는 없었으리라. 저들은 적어도 10.29 참사의 풍경 속에선, 국민의 대표도 뭣도 아니고, 그저 스스로 권력의 주체라고 착각하는 불쌍한 권력의 도구들일 뿐이다.

나처럼 초라한 범부도 저 불쌍한 권력자들, 저 영혼 없는 존재들이 가엾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두렵다. 나는 저들의 권력이 두렵고, 저들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걱정스럽다. 참사 다음날, 중대본 회의에서 ‘압사’라는 단어를 빼라고 지시한 ‘족집게 강사 윤석열’이 나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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