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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주 간단하고 초보적인 탈식민주의 얘기를 해보자. 나도 학교 다니며 귀동냥으로 들은 수준이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본군 ‘위안부’(이하 위안부) 문제가 해결이 지난한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한일 양국의 국력 차이, 일본의 자세, 한국의 전략, 미국의 태도, 정권교체 등등 여러 국제정치 이슈가 이 문제 해결을 계속해서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런 국제정치적 원인을 배제하자면, 결국, 한일 양국의 입장 차이는 하나로 좁혀질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지식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

순서

세 개의 억압 

주지하다시피 위안부에 대한 인권 유린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보다는 다층적 권력이 가한 억압들이 교차한 결과물이다. 그 억압들은 세 가지로 추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하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
  2. 둘은 식민지에 대한 제국의 억압
  3. 셋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억압이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이루어진 일본의 전쟁범죄는 이 세 범주가 어떤 식으로 교차하는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내지민 남성들에 대해서는 세 번째 범주만이, 내지민 여성들에 대해서는 첫 번째와 세 번째 범주가, 식민지 남성들에 대해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범주가, 그리고 식민지 여성들에 대해서는 세 범주 모두가 해당된다. (물론 억압의 ‘강도’ 문제도 존재한다. 일상을 누린 식민지 여성과 징집되어 전쟁에 나간 내지 남성은 누가 더 심한 억압을 당한 걸까?)

일본군 위안부

위안부 문제는 따라서 ‘전쟁 수행을 위해 자국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자 했던 총력전 국가인 일본이, 그 자신의 가부장적 권력에 근거하여 여성의 성까지 전시에 동원하고자 한 폭력이 식민지와 전쟁 점령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문제’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중층적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비판은 어떤 범주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식민지 문제에만 천착했을 때 위안부 문제는 ‘민족의 여성을 유린한 일제의 만행’으로 이해되었다. 가부장제 문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조선인 남성도 공모했을지 모르는, 어쩌면 민족을 초월한 남성의 여성 착취’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나는 이 두 관점도 충분히 주의깊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래도 ‘순결한 소녀 이미지’에 몰두하는 NL식 낭만적 민족주의는 물론 지양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일 양국의 입장차이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세 번째 억압, 즉 근대 국가의 개인에 대한 억압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이 문제를 이해하는 건 더 어려워진다.

근대 국가… 그리고 기억의 독점  

먼저 근대 국가의 특징을 살펴보자. 국가는 ‘폭력의 독점체’라는 유명한 명제에서 드러나듯, 폭력은 국가의 본질이다. 국가는 자신의 권위가 미치는 곳 아래에서는 사적 폭력을 일절 금지한다. 국가 폭력은 대신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개인, 사회, 자연을 향하며, 자원으로 동원된 이들 ‘대상’들은 국가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코로나 방역에서 잘 드러나듯 효율적으로 자원을 동원해 집행할 수 있는 국가는 오늘날 번영의 원천이다.

그러나 국가의 힘은 단순히 폭력을 통한 자원 동원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근대 국가는 관료 조직의 힘으로 지식과 기억마저 독점할 수 있기에 진정으로 대단한 것이다. 관료 조직이 남기는 대량의 문서들,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고위직과 명사들의 영향력으로 국가는 자신을 위한 신화를 만들고 그걸 아주 탄탄하게 입증할 수도 있다.

여기서 더 강한 발언 권력을 쥔 측과 쥐지 못한 측의 운명이 사실상 결정된다. 국가기구의 권력을 통해 체계적으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쪽이 후세에 더 많이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대신 기록해준 것들’에 의존해서만 ‘역사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초강대국 미국과 아메리카 원주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피터 퍼듀의 [중국의 서진]에 이런 다층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 청 제국은 더 많은 기록과 후대로 이어지는 정치체를 남겨 자신들의 기억을 재생산했다. 준가르 국가는 많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후대에 정치체도 남기지 못해 많은 전모가 잊혀졌다. 할하 몽골인들은 그나마 자신들의 국가를 만들어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스펙트럼에서 경향성 하나는 확실했다. 기록의 일관성, 체계성, 양의 방대함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이들은, 결국 ‘기억 전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서진

개인의 기억도 ‘지식’이 될 수 있는가 

위안부 문제, 아니 일본의 전쟁범죄를 둘러싼 논의도 결국 마찬가지다. 물론 이는 독일, 소련, 미국 등 다른 참전국도 공유하는 문제고 이후의 한국이나 베트남 같은 국가에도 모두 해당되는 문제다. 강력한 국가기구를 통해 기억을 계속 재생산할 수 있는 국가가 있고, 반대편에는 두뇌 기억의 한계로 인해 파편화된 채로 일관성도 계속 의심받는 진술만을 하는 개인들이 있다.

20세기 후반 이래로 과거사 문제가 조명되기 전에는 이런 진술들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관되고 객관적 사실로 확정할 근거조차 없는 그저 개인의 기억에 불과한 말을 어떻게 ‘지식’으로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강제연행을 둘러싼 논쟁도 여기서 기인한다. 국가에 의해 확인된 체계적 증거만을 지식으로 채택할 것이냐, 아니면 부정확한 개인의 진술도 대안적 지식으로 인정해줄 것이냐.

물론 논쟁이 이처럼 칼로 자르듯 단순하지는 않았다. 일본 국가 기구가 생산한 지식에 균열을 낸 내부 증언과 문서가 있었고, 반대편에도 일본 국가의 기록에 더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입장의 근본적 차이를 가리는 것은 아니다. 권력을 통해 지식을 독점하였던 전시 총력전 국가의 기록과, 자신의 이야기를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해서라도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립이 위안부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 폭력 논쟁의 본질이다.

체계적이고 객관적 기록에는 기록을 남기는 자의 편향이 담겨있고, 부정확하고 오락가락하는 진술에는 어떤 기록도 담아내지 못한 체험에서 나오는 진실이 숨어있을 수 있다. 지난 수십년 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탈식민주의가 이뤄낸 성과는 결국 현실과 역사의 이 복잡한 면모를 끌어낸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열렬한 탈식민론자는 아니기에, 그래서 ‘국가가 숨겨온 진실을 알려주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무조건 채택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쓴 글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내가 상당히 회색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잘 알 것으로 믿는다. 기억과 자료의 대립은 수십년 전 펼쳐진 거대한 전쟁의 문제만 나타내난 건 아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입니다”로 상징되는, 진술에 대한 과잉신뢰로 피해가 양산되는 것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실체적 진실을 구성하기 위해 권력이 남기는 체계적 지식개인이 남기는 주관적 체험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다시 돌아보는 작업이다.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이 작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체험에 기반한 진술의 가치를 높이 사고, 그것을 대안적 문서자료로 보충했기에 위안부 문제는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기에 ‘체계적이면서도 대안적 기억’을 구성해낼 수 있는 대안적 국가권력, 즉 대한민국 국가권력이 국제사회에서 부상한 것도 결정적이었다. 국가의 힘과 그 가치에 대한 일방적 규정 또한 조심해야 할 이유다.

기억 사진 슬픔

기억의 왜곡? 그럼 일본과는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 

그래서 질문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할머니께서 나이가 많으시고, 코로나19 이후 심신이 취약해지신 상태 (…중략…) 기억이 왜곡되는 것도 있었을 것”(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 출처: 중앙일보)[footnote]중앙일보, 이용수 할머니 비판에···정의기억연대 “나이 많으셔서···해프닝” (권혜림, 2020. 5. 7.)[/footnote]이라는 말의 의미도 명확하지 않을까? 고령자의 기억이 부정확할 수 있어 신뢰할 수 없다면, 총력전 국가를 운영함으로써 기억을 독점했던 일본에 얼마 안 남은 고령의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말도 없는 것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이 고령의 생존자들은 정확한 진술을 할 수 없으니 무조건 자신들이 대리해줘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런데 당사자의 목소리가 의미가 없다면 그 운동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걸까. 내 생각에 ‘기억’이 근대 국가가 독점한 지식에 반격할 수 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입을 통해 고백한 자기체험이 체계성과 정확성이 떨어지더라도 부분적 진실성을 분명 지녔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실이 갖는 강력함이다.

종군위안부
전쟁에서 생존한 한국인 위안부의 모습. 위안부 중에는 십대 소녀가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1945년 9월 3일, 중국 윈난 성)

[중국의 서진]을 읽을 때 나는 이 힘을 어느정도 느낄 수 있었다. 준가르족은 청제국에 의해 멸족당했지만, 그들의 구전 서사시와 설화들은 여타 몽골계 민족에게 전해져 제국 바깥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했다. 그 이야기는 그저 소수민족의 설화에 불과할 수 있었지만, 역사적 진실을 재구성하려는 노력과 맞물리자 전혀 다른 힘을 획득했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은 그 책을 격렬히 비난하고 저자의 중국 입국을 금지시킨 것이다. 그 이야기이가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 국가가 만들어 유통하는 “체계적 지식”을 부식시킬 수 있기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노력이 보편적 가치를 향한 목소리로 인정 받을 수 있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남성에게 성을 착취당한 여성으로서, 제국에게 짓밟힌 식민지민으로서도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그들은 동시에 근대 국가가 지워버린 기억을 다시 부활시켜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음을 상기시켜준 것이다. 물론 개인의 기억은 부정확하다. 하지만 부정확함이 바로 기억의 본질이다. 체계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에 지식을 체계화할 수 있는 권력 바깥의 진실을 드러내주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니 고백의 진실성을 부정할 수 있는 발언을 하면서까지 당사자의 이야기를 묵살하려는 자들의 말과 행동을 믿기란 내게는 너무 힘들다. 이러니 무언가 다른 목적이 이 기억의 ‘대리인’들을 추동한다는 설명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다. 당사자의 기억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체계적 기억’을 관철시키려는 이 구도에서 권력은 누구의 손에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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