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말이다.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해라.”

– [위대한 개츠비], 김석희 옮김 (열림원) 9쪽

번역과 연주는 모두 본래의 것을 전달한다는 면에서 유사하다. 전달의 과정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번역과 연주는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직역’을 중시한 전통적인 번역에 대한 견해는 슈베르트의 “연주자는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즉, 오롯이 악보 그 자체를 재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연주가 좋은 연주로 여겨지곤 했던 태도는 번역의 영역에서도 요구되었다. 하지만 원작 그 자체로서의 재현과 전달자의 재해석이 가미된 재현 사이에 번역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

번역이 원작의 의도와 느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이질감을 독자에게 느끼지 않게 할 때 좋은 번역이라 말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번역은 원작의 진정한 공유를 위해서는 문장의 의미를 매끄럽게 하여 읽는 사람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언어의 이질감 때문에 작품에 몰입을 방해하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의역은 우리말의 느낌을 살릴 수 있고 번역자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좋은 번역’이란 작품 그 자체로의 재현이 아니라, 전달자의 재해석이 가미된 재현의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번역’이란 원문에 대한 충실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오역과 누락이 넘쳐나는 번역본은 아무리 문장이 명문이라고 할지라도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번역’을 찾아서

독자들은 좋은 번역본을 만나길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번역가들의 결과물로서 한 권의 외국 서적에 따른 많은 양의 번역본이 출판되곤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번역본의 등장은 독자들이 좋은 번역과 만날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책이 좋은 번역의 결과물인지 선정하기 위해 우리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본을 비교·분석하였다.

위대한 개츠비, 펭귄북스 1950년 커버

[위대한 개츠비]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미국 소설로 꼽히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필독 영미 고전 목록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다. 이와 함께 2013년 저작권 만료 시기와 영화 개봉이 겹치면서 많은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본이 시중에 나왔다.

우리는 지난 2003년에 출간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에서 진행한 15명의 번역본(해방 이후부터 2003년 7월까지) 비교·분석에 뒤를 이어 2003년 7월 이후 출간된 번역본 중 판매량 상위 9권의 책과 구체적으로 번역의 방향을 명시한 5권의 책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더불어 주제의식이나 캐릭터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문장 16개와 그렇지 않은 4개 문장을 분석했다.

위대한 개츠비

‘좋은 번역’의 김석희, ‘매끄러운 번역’의 김영하

먼저 2013년 출간된 김석희의 번역본과 2009년 출간된 김영하의 번역본을 주목해보자. 이들의 번역본은 매끄러운 번역으로 원문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살렸다. 비교적 직역의 방식을 취한 다른 번역본도 많지만, 대표로 김태우와 김욱동의 번역본과 비교해보면 이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음은 데이지가 한 대사이다.
[box type=”info”]

  • “바보 같은 여자로 자라주면 좋겠어요. 그게 제일이죠. 예쁘고 머리 나쁜 여자가 되는게.” (김석희)
  • “그 애가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군. 이 세상에서 예쁘고 귀여운 바보가 되는 것이 여자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니까.” (김태우)

[/box]
김석희의 번역본이 한글 소설을 읽듯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이 특징이라면 김태우의 번역은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서 발생하는 남성적이고 고전적인 어투 때문에 딱딱하고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김태우의 번역은 ‘데이지’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특성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례를 보자.
[box type=”info”]

  • “다들 썩었어.” 내 외침이 잔디밭을 건너갔다.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 (김영하)
  • “그 인간들은 썩어 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나는 잔디밭 너머로 소리쳤다. (김욱동)

[/box]
김욱동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만큼 한국어 구조상 의미가 모호한 부분도 존재한다. 예컨대,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라는 부분은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와 비교해보면 의미전달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김영하와 김석희의 번역본이 높은 인기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번역을 통해서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인이 읽는 미국소설’로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가독성과 충실성, 두 마리 토끼 다 잡은 한애경

이미 잘 알려진 김영하와 김석희의 번역본 이외에도 추천할만한 번역본이 두 가지 존재한다. 하나는 최성애가 역을 맡은 번역본이고, 다른 하나는 한애경의 번역본이다. 한애경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짧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와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김태우 번역과의 대조를 통해 더욱 쉽게 살펴볼 수 있다.
[box type=”info”]

  •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만약 이 문장에 뭔가 의미가 있다면, 문자 그대로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일, 즉 거대하고 속되며 겉만 번지르르한 아름다움에 봉사해야 했다. (한애경)
  • 그는 신의 아들이었으며, 그 말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사업, 즉 거대하고 통속적이고 천박한 아름다움에 봉사하는 일을 해야 했다. (김태우)

[/box]
또한 한애경의 번역은 종종 극단적인 의역으로 비판받는 번역본들과 비교해보면 원문의 훼손이 적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I stared at him and then at Tom.”이라는 원문에 대한 다음 두 번역을 들여다보자. 두 번역 모두 가독성이 우수하다는 장점을 공유하지만, 어느 쪽이 더 섬세하게 원문에 충실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box type=”info”]

  • 나는 그를 지켜보다가 다시 톰을 쳐다봤다. (한애경)
  • 나는 그와 톰을 바라보았다. (김영하)

[/box]
따라서 한애경의 번역본은 지나친 의역에 대한 반감을 품은 독자들이 가독성이 높은 번역본을 찾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개성 넘치는 최성애

최성애의 번역본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추천한다. 한애경의 번역본과 비교하여 역자만의 특색 있는 표현으로 원문을 풀어내어 가독성을 높이는 데에 성공했다.
[box type=”info”]

  • 원문: “No amount of fire or freshness can challenge what a man will store up in his ghostly heart.”
  • 번역: “어떤 불꽃도 어떤 새로움도, 한 사내가 자신의 유령 같은 영혼 속에 쌓아올린 그 탑에 감히 도전할 수는 없는 법이다.”

[/box]
여기서 ‘store up’을 대부분의 번역본은 쌓아올린 ‘것’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성애는 쌓아올린 ‘탑’의 이미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선택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

이미 널리 읽히는 김욱동, 김석희, 김영하의 번역본을 제외하고 새로이 한애경, 최성애의 번역본을 추천했다. 우리는 앞서 의역이 더 낫다고 판단하여 그 기준에 따라 추천했다. 물론 원작에 대한 충실성의 문제와 가독성의 문제, 이 두 마리 토끼를 다잡은 번역이 가장 이상적인 번역이다. 하지만 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가 어렵기에 우리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번역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번역자가 독자를 저자 쪽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과 저자를 독자 쪽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이다.”

전자는 원문에 충실하려는 직역을 나타내고 후자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읽히는 의역을 나타낸다.

번역은 새로운 세계와 한 인간의 만남으로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통해 다수의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번역가의 역할이 실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들은 자신이 어떠한 통로를 구축하여 또 다른 이들에게 한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divide style=”2″]

검토 대상 작품 및 참고 문헌 

  1. 위대한 개츠비 – 이화승 역, 반석출판사, 2005년 2월 25일
  2. 위대한 개츠비 – 송무 역, 문예출판사, 2005년 3월 25일
  3. 위대한 개츠비 – 김영하 역, 문학동네, 2009년 12월 15일
  4. 위대한 개츠비 – 김욱동 역, 민음사, 2010년 12월 8일
  5. 위대한 개츠비 – 한애경 역, 열린책들, 2011년 2월 20일
  6. 위대한 개츠비 – 김태우 역, 을유문화사, 2011년 11월 10일
  7. 위대한 개츠비 – 북트랜스 역, 북로드, 2012년 12월 25일
  8. 위대한 개츠비 – 방대수 역, 책만드는집, 2013년 4월 22일
  9. 위대한 개츠비 – 김석희 역, 열림원, 2013년 4월 25일
  10. 위대한 개츠비 – 김보영 역, 팽귄클래식코리아, 2013년 5월 7일
  11. 위대한 개츠비 – 붉은여우 역, 지식의 숲, 2013년 6월 1일
  12. 위대한 개츠비 – 이기선 역, 더클래식, 2013년 6월 1일
  13. 위대한 개츠비 – 최복현 역, J클래식, 2013년 7월 30일
  14. 위대한 개츠비 – 최성애 역, 온스토리, 2014년 10월 20일
  15.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 – 영미문학연구회 저, 창비, 2005년 5월 2일
  16. The Great Gatsby – F. Scott Fitzgerald, London: Penguin, 1950년

관련 글

7 댓글

  1. ‘따라서 김영하와 김석희의 번역본이 높은 인기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번역을 통해서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인이 읽는 미국소설’로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누구의 번역본이죠?

  2. “역자들은 자신이 어떠한 통로를 구축하여 또 다른 이들에게 한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장에 매우 동의합니다. 그 고민을 하는 것이 역자가 하는 일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어떤 역서에는 그 역자의 ‘어떠한 요소’가 녹아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저가 같은데도 역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질리가 없겠지요. 번역을 순수창작물로 분류하지는 않지만 창작적 요소를 부인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소설가의 소설을 골라 읽듯이 좋아하는 번역가의 번역서를 골라 읽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맨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말하듯 역자는 당연히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직역이냐, 의역이냐’ 차원을 넘어서는 고민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와 독자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듯 역자와 독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향의 크기나 종류 등이 다를 뿐입니다. 이 기사는 독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소비자를 위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3. 때에따라서 다르죠. 예를들면 죠죠의 기묘한모험같은경우 매가톤맨 번역이라고해서 원작의 느낌이 전혀없는 그런 초월번역은 문제죠. 원작을 제데로 이해한 사람이라면부드럽게 번역하는것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그대로 번역하는것이 낮겠죠.

  4. 위대한 개츠비 읽고 있는데요. 원본은 잔디밭이 1/4 마일 이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을 25마일로 함. ㅡㅡ
    25마일이면 40km 길래 아니 무슨 얼마나 갑부인거야. 했는데 오역이었음…
    The lawn started at the beach and ran toward the front door for a quarter of a mile,

    또,’인생은 단지 하나의 창을 통해서만 보면 아주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나의 창’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짐.
    문장이 하도 생뚱 맞게 갑툭튀라 원문 찾아 봄
    This isn’t just an epigram — life is much more successfully looked at from a single window, after all.
    걍 긍정 하는 평범한 문장 임. 실제 소설 단락을 보면 계속 자기는 꾸준히 글쓰기를 해왔고, 그 하나의 창(글쓰기) 그걸 간단히 after all 긍정 하는걸로 끝내는 문장인데, 번역은 뜬금없이 반문 뉘앙스로 맺음

  5. 위대한 개츠비 읽고 있는데요. 원본은 잔디밭이 1/4 마일 이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을 25마일로 함. ㅡㅡ
    25마일이면 40km 길래 아니 무슨 얼마나 갑부인거야. 했는데 오역이었음…
    The lawn started at the beach and ran toward the front door for a quarter of a mile,

    – [위대한 개츠비], 방대수 옮김 (책만드는집) 23쪽

    또,’인생은 단지 하나의 창을 통해서만 보면 아주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나의 창’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짐.
    문장이 하도 생뚱 맞게 갑툭튀라 원문 찾아 봄
    This isn’t just an epigram — life is much more successfully looked at from a single window, after all.
    걍 긍정 하는 평범한 문장 임. 실제 소설 단락을 보면 계속 자기는 꾸준히 글쓰기를 해왔고, 그 하나의 창(글쓰기) 그걸 간단히 after all 긍정 하는걸로 끝내는 문장인데, 번역은 뜬금없이 반문 뉘앙스로 맺음

    – [위대한 개츠비], 방대수 옮김 (책만드는집) 20쪽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