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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캉이 열풍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 마리 상어를 특정한 이름으로 부르고, 그 안부를 궁금해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부산 북항 친수공원에는 부캉이를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흑상어를 찾아가는 걸까? 많은 이들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지만, 뒤늦게나마 이 대열에 동참해보려 한다.

표면적 이유는 단순하다. 영화에서나 보던 대형 상어를 안전한 곳에서 직접 보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비일상적인 만남 자체가 특별하고, 지금이 아니면 보기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발길을 북항으로 이끈다.

그러나 이 열풍의 깊은 곳에는 또 다른 심리와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부산광역시(사진: 장차은 어린이 기자).

놓치고 싶지 않은 경험, ‘움직이는 굿즈’가 된 부캉이

우선, 한국 사회 특유의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 심리, 즉 소외되거나 유행을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릴 수 있다. 포모는 다수가 주목하는 경험에 나도 합류해야 한다는 마음이다. 소셜미디어는 부캉이의 모습을 빠르게 퍼뜨리고, 그곳에 다녀왔다는 경험을 공유하게 한다. 이때 사람들에게는 상어와의 만남뿐 아니라 다수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사실 자체가 만족이 될 수 있다. 어느 순간 ‘가보고 싶은 곳’은 ‘가지 않으면 안되는 곳’으로 바뀐다. 포모의 힘이다.

다소 급진적으로 부캉이를 “움직이는 굿즈”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동물을 본뜬 인형과 키링을 소비하듯, 살아 움직이는 존재를 만나러 간다는 설명이다. 이름을 붙이고 친숙한 캐릭터로 받아들이는 순간, 야생동물은 우리가 소유하거나 소비하고 싶은 이미지에 가까워진다. 이 관점에서 부캉이는 동물 굿즈의 원형이고, 부산 북항으로 향하는 길은 그 원형을 찾아가는 순례인 셈이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부캉이를 찾고 안부를 묻는 마음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친수공원. 부산광역시.

부캉이를 찾는 마음에 담긴 ‘야생 가난’

부캉이를 찾는 발걸음에는 우리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근원적인 욕망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야생을 직접 경험하고, 야생과 연결된 상태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이 거꾸로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겪는 심각한 수준의 “야생 가난(Mordernized Poverty)”이다. 이반 일리치는 전문가와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는 자율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 즉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을 잃는 상황을 현대인이 겪는 새로운 형태의 가난으로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야생과 만날 기회와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를 “야생 가난”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는 도시를 확장하며 위생, 안전, 쾌적함을 얻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줄이고 이동 경로를 끊었으며, 우리의 생활공간에서 야생을 밀어냈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야생을 경험하고 이해할 기회는 빈약해졌다.

이렇게 보면 부캉이 열풍은 특별한 볼거리에 대한 관심인 동시에,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워진 야생을 향한 갈증일 수 있다.

방제와 보호, 분리로 이어지는 두 갈래 길

도시에서 야생동물을 만나는 일은 흔히 불쾌하거나 신기한 사건이 된다.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나 동양하루살이 같은 곤충은 불쾌한 방제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반면, 참매나 팔색조, 수달은 경탄과 보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방제와 구조, 보호는 목적과 필요가 서로 다르지만, 인간과 야생을 격리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접촉은 일어나지만, 그 만남의 끝에서 다시 분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부캉이를 향한 관심은 이 질문을 시작할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야생을 보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야생에게는 얼마나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가.

서울 한강. 게티이미지.

도시는 처음부터 생태계 안에 있었다

도시와 야생을 분리해 온 우리의 방식은, 우리의 “야생 가난”은,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경제가 성장하고 생활이 풍요로워지는 동안 야생동물들은 우리의 곁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 과정을 “축출”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부캉이는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귀환한 자”라 할 수 있다.

야생의 출현 원인은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하지만, 어쨌든 자연은 지금 부단히 자기의 일부를 우리 곁으로 되돌려보내고 있다. 코로나19도, 러브버그도, 멧돼지 도시 출몰도, 부캉이도 “돌이키기 어려운 자연의 귀환”이라는 흐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귀환 운동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실은 ‘도시이자 생태계’였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상어 한 마리를 구경하는 사건을 넘어, 이제 야생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야생과 함께 살아갈 도시를 상상하라는 지구의 자극이다. 부캉이는 이러한 자극을 수행하라고 지구가 보낸 메신저일 수 있다.

안부를 묻는 마음을 넘어, 공생하는 일상으로

부캉이의 안부를 묻는 마음은 반갑다. 다만 그 마음이 이름 붙인 한 마리의 동물을 향한 애정에만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이름 없는 야생동물들이 살아갈 공간과, 그들과 연결된 우리의 일상으로 넓어지길 바란다. 자연이 스스로 회복할 공간을 돌려주는 리와일딩(Rewilding)이 필요하다.

부캉이는 새로 발견한 안식처를 유유자적 즐기며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자꾸 밀어내지마. 함께 살아갈 자리를 남겨줘. 자꾸 뭔가 하려고 하지 마. 그냥 내버려둬. 그럴 시간이 되었어. 그 길이 너희도 살게 할 거야.’

부캉이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것은 야생과 연결되어 살아가고 싶다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알아차리는 순간, 부캉이의 안부를 묻는 일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안부를 묻는 일이 된다.

부산광역시(사진: 장차은 어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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