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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코리아 칼럼] 800조 메가 프로젝트와 ‘수축사회’의 생존 경쟁, 그리고 수도권 집중과 부족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적 공간 정의 세우기. (은재호/한국외국어대학교 EU융합전공 겸임교수)

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가 격렬한 지역 간 전장으로 변질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서남권에 800조 규모의 반도체 생산 거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그간 영남과 충청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매서운 반발이 터져 나온 탓이다. 정부는 ‘산업 다극화’를 통한 ‘국가 균형발전’을 내세우는데, 지역사회는 이를 ‘소외’와 ‘홀대’라는 서슬 퍼런 단어로 번역한다. 국가 발전을 위한 거시적 청사진이 왜 다른 지역에게는 실존적 위협으로 읽히는 것일까.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 청와대.

메가 프로젝트가 촉발한 제로섬 생존 경쟁

이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 정치경제학자 앨버트 허쉬먼과 마이클 로스차일드가 제시한 ‘터널효과’를 국토 공간의 차원으로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 꽉 막힌 터널 속에서 옆 차선의 차량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차선의 운전자들이 처음에는 분노하기보다 곧 우리 차선도 움직일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품게 된다. 인접 집단의 도약이 내 미래의 이동 가능성을 알려주는 신뢰할 만한 정보이자 희망의 신호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과거 고도성장기 한국 사회에서 경부축 중심의 독주를 호남을 비롯해 주변화된 지역들이 묵묵히 견뎌낸 심리적 버팀목도 바로 이 사회적 기대였다.

그러나 성장의 시차가 세대를 넘어 굳어지고 터널의 출구마저 좁아진 ‘수축사회’에 진입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인구 감소와 저성장, 지방소멸의 실존적 위기 속에서 다른 지역의 자원 유치는 이제 희망의 선례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지역의 미래를 영원히 차단하고 한정된 생존 기회를 빼앗아 가는 약탈적 행위이자, 패배는 곧 도태를 의미하는 잔인한 제로섬 경쟁으로 각인된다. 반도체 거점, 의대 신설, KTX 노선, 신공항 건설 등 국가 메가 프로젝트가 발표될 때마다 전국에서 ‘발작적인’ 반발이 폭발하는 이유는 바로 이 다차선 터널 속 도태의 공포가 만들어낸 분노의 파열음이다.

‘수축사회’는 파이의 전체 크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전방위 갈등이 제로섬전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포착해 큰 관심을 모았다. 은재호는 인구 감소와 저성장, 지방소멸의 실존적 위기 속에서 제한된 자원을 둘러싼 지역간 경쟁 및 갈등의 심화를 ‘수축사회’를 들어 설명한다. 

지역 갈등의 구조적 본질… 수도권 집중 비대칭성과 파편화된 부족주의 정서

여기서 목격되는 전방위적 지역 갈등의 배후에는 ‘수도권 집중’이라는 구조적 비대칭성이 도사리고 있다. 비수도권 지자체들이 사생결단으로 벌이는 제로섬 투쟁은 실상 자본과 인프라를 블랙홀처럼 흡수하는, 수도권이라는 절대 권력 차선의 독주를 무력하게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이전투구를 벌이는 터널 속의 착시이자 이차적 생존 투쟁에 불과하다.

수도권과 비수도권만 존재했던 과거 고도성장기의 2차선 터널에서는 역사적 상흔과 정당 일체성에 기반한 영호남 대립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5극 3특’으로 재편되는 오늘날의 다차선 터널에서는 물질적 자원 배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든 지자체가 모든 지자체에 대립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역 간 발전 격차가 일상화하는 이 상황에서 지역 정치인들의 가장 손쉬운 지지획득 전략은 권역, 광역, 기초라는 인위적인 영토 안에서 아군과 적군을 나누고 다른 지역에 대한 피해자 서사를 구축하며 ‘우리가 남이가’라는 ‘부족주의’ 정서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발전 전략을 제시하는 대신에 주민들의 불안을 자극하는 이 전략은 이제 갈등의 단위를 말단 기초 수준까지 잘게 쪼개 놓기에 이르렀다.

이 파괴적인 아우성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균형발전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균형발전은 갈등을 억지로 봉합하거나 기계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시혜적 차원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적 정의와 국민통합을 위한 해법

첫째, 균형발전의 철학을 ‘영토적 연대’(territorial solidarity)로 전환해야 한다. 성장의 이익 일부가 소멸 위험 지대의 삶을 지탱하는 인프라로 수평 환류되도록 세제와 재정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메트로폴(Métropole) 제도나 독일의 지방재정조정제도(Finanzausgleich)처럼 세수와 편익을 공유하는 구조적 결단이 그것이다. 비록 이 제도들이 부유한 지역의 반발이나, 그래도 생겨날 수밖에 없는 땅끝 주변부의 소외 저항 같은 내재적 갈등을 유발할지라도, 야만적인 각자도생의 제로섬 경쟁을 공적인 법적 기준과 수리적 조율의 장 안으로 유인한다는 점에서 국가 신뢰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둘째, 결과의 기계적 균등이 아닌 절차적 정의를 강화해야 한다. 모든 지역에 똑같은 시설을 배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대중은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결정일지라도 과정이 투명하고 중립적이면 기꺼이 결과에 순응한다는 갈등관리 연구자들의 통찰을 받아들여야 한다(김춘석 한국리서치 부문장). 이를 위해 국가사업의 기획 시점부터 평가 기준과 가중치를 완전히 공개하고, 사후에 과학적인 탈락 사유를 밝히는 설명 책임을 다해야 한다.

최근의 신규 원자력 발전소 영덕 입지가 그나마 해당 지역과 주변 지역의 지지와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설 입지의 절차적 투명성에 대한 신뢰와 추후 입지선정 과정의 정당성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시민배심원 등 정교한 숙의민주주의 기제를 입체적으로 직조해 시설 입지선정 전에 특정 지역이 왜 특정 시설을 보유해야 하는지 주민들 스스로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제시할 수 있게 한다면 최상의 해법이 될 것이다.

은재호 교수는 영덕이 신규 원자력 발전소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 해당 지역과 주변 지역의 지지와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절차적 투명성에 대한 신뢰와 추후 입지선정 과정의 정당성 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진은 경북 울진에 있는 신한울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셋째, 국가의 책무를 자원의 산술적 배분자에서 ‘예방적 갈등관리자’와 ‘영토적 연대’의 촉진자로 근본적인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지역의 반발이 터져 나오면 예산을 조금 더 얹어주고 입을 막는 임시방편의 행정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 대전환의 시작은 정책 입안의 최초 시점부터 공간적 비대칭성이 야기할 심리적 불평등과 상대적 박탈감을 구조적으로 추적하고 통제하는 과학적 예방 행정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갈등조기진단 체계를 가동해야 한다. 지자체별 실업률이나 재정자립도 같은 정량적 경제 지표를 넘어 청년 유출 속도, 문화·의료 인프라 접근성 격차, 중앙정부 신뢰도 등 대중의 심리적 상태를 계량화하고 정기적으로 실사하는 게 그것이다. 사업을 강행하는 중앙부처가 동시에 집단민원의 심판까지 도맡는 모순적인 구조를 깨고, 국무총리실 직속 또는 독립적인 국가갈등조정기구를 상설화해 갈등영향평가와 제3자 조정(mediation), 그리고 숙의 절차 설계를 전담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영원한 정체(停滯)를 부정하는 정의의 출발

오늘날의 지역 갈등은 더 이상 영호남이라는 고전적 지역주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수축사회에서 모든 지역이 서로를 비교하며 생존을 경쟁하는 ‘다차선 터널효과’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균형발전을 통해 이뤄야 할 국민통합의 과제는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경쟁이 적대와 배제로 고착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것은 공정한 게임 규칙과 권력을 공유하는 협치 구조, 그리고 성장의 편익을 환류시키는 재정적 연대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민주주의의 건강한 제도적 생태계를 구축할 때 가능하다. 허쉬먼과 로스차일드는 터널 속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단순히 옆 차선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차선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의 붕괴’ 즉, 낙심과 불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한국의 지역 갈등도 마찬가지다. 균형발전을 통한 국민통합의 과제는 모든 차선을 동시에 똑같은 속도로 달리게 하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어느 차선도 영원히 정체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균형발전의 본질이며, 민주주의가 지켜야 할 공간적 정의의 출발점이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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