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국회가 개원했습니다.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 한 표를 읍소하며 당선된 300명의 국회의원이 과연 유권자를 위해 제대로 일하는지 지켜보고 감시해야 할 때입니다.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안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지니까요.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칼럼을 통해 유권자의 시각에서 22대 국회와 정치를 비평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이니까요.

다이내믹 코리아의 민주주의는 다이내믹하다. 이제 거의 상식 수준이지만 세계는 한국을 불과 한 세대 만에 민주주의를 안착시킨 거의 유례없는 성공 사례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 성공의 뒤에는 엄청난 피와 땀이 서려 있고,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세대와 세대를 구분 짓는 역동적인 민주주의 경험이 전승되어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

그동안 학생을 가르치는 수업 시간에조차 “계엄”과 “쿠데타”를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내심 무리한 가정과 상상력이 요구되었다. 계엄은 79~80년의 전두환이, 친위 쿠데타는 박정희의 72년 10월 유신이 마지막이었고, 그나마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은 93년 하나회 숙청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오늘날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은 흥미롭지도 않았고, 학생들의 이해를 끌어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변했다. 가장 성공적인 신생 민주주의 국가라 일컬어졌고, 심지어 스스로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 민주주의가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라 자부했고, 정권교체 하나 못하고 빌빌거리는 일본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앞서 있다 자부했던 우리 민주주의가 일격을 당하고 추락했다. 이제 젊은 세대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한 세대가 되었다.

이 위기는 아직 진행형이다. 대통령은 탄핵당하였지만, 많은 난관이 남아 있다. 계엄과 내란의 전모도 밝혀야 한다.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목격하고 있다.

그동안 있었던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많은 사건처럼 앞으로 많은 분석과 연구가 쏟아지겠지만. 지금 12.3 내란 국면의 가장 큰 눈길을 끄는 것은 국회의 위상 변화이다. 이 변화는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가늠할 중요한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이 국회에 관해 느끼던 저 밑바닥 효능감이 갑자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대의민주주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흔한 일이지만, 국민의 참여와 대의제민주주의가 바람직하게 만나 회복탄력성의 정수를 보여주는 지금의 장면은 꽤 희귀한 일이다.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지만, 이 쉽지 않은 현상이 다시 살펴보고 생각해 볼만한 것임은 틀림없다.

국회(Assembly) 어원, ‘함께 모이다’

우리는 의회나 국회라는 단어 정도지만 전 세계에 사용되는 국회를 뜻하는 명칭은 제법 다양하다. 영어 또는 영어에 포함된 단어만 보아도 몇 가지 된다.

  • 근대 의회제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 및 많은 유럽 나라들은 의회를 주로 Parliament라고 부른다. Parliament는 고대 프랑스어인 parler에서 비롯된 말로 “말하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 또 미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같은 많은 아메리카 대륙 국가의 의회는 Congress라고 불린다. Congress는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의 Co와 ‘가다’는 뜻의 gredi를 합쳐서 ‘함께 가다’는 뜻이다.
  • 일본은 Diet라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하루 분량의 일이나 거리를 뜻하는 라틴어 dietas에서 나온 말로 ‘낮 시간(dies)에 모이는 회의’를 뜻하며 신성로마제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주로 귀족, 성직자 또는 도시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회합을 의미하는데 신성로마제국 전통이 남은 독일의 Reichstag, 또 스웨덴의 Riksdag의 의미도 Diet에 가깝다.
  • 많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처럼 한국의 국회는 영어로 National Assembly라고 부른다. Assembly는 라틴어 assimŭlāre 와 고대 프랑스어 assemblee에서 비롯된 말로 “함께 모이다”라는 비교적 단순한 뜻으로 National Assembly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 단위의 모임이란 의미이다. 특이하게도 국회(國會)라는 말 자체가 일본이 유럽의 의회 개념을 번역하며 동아시아에 퍼트린 말이지만, 영어로 옮길 때 우리는 제국과 중세 계급 사회의 잔재가 있는 Diet이 아니라 National Assembly를 택했다.

잡학 상식에 속하는 내용을 굳이 길게 얘기하는 이유는 이번 윤석열 내란 사건에 우리 국회는 “National Assembly”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행태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190명이나 되는 의원들이 대통령이 내란에 해당하는 불법 계엄을 선포한 지 한 시간여 만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와 의지로 모여들었고, 경찰의 봉쇄를 뚫고 담을 넘었고, 군의 원내 진입을 막아내며 “모임”을 형성했다.

2024년 12월3일 밤 11시경 대통령 비상계엄으로 경찰이 통제 중인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담을 넘어 본청으로 향하는 모습. 우원식 의장 페이스북.

거대한 모임의 힘

모두 의회로 모이라는 야당 지도부의 외침은, 조금 민망하게 과장하자면, 영화 ‘어벤져스’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사 “Avengers, Assemble!”을 떠올릴 만한 광경이었다. 190명이 모인 국회는 그 모임을 통해 불법 계엄을 “합법”적으로 무효화시켰다. 우원식 의장이 보여준 것처럼 그 모임이 가지고 있는 명료하고 엄중한 법적 절차의 집행은 총칼의 무력(武力)을 의사봉 세 번으로 무력화(無力化)시켰다. 그렇다. 모임(assembly)의 힘은 무섭다.

하지만 더 거대한 모임과 집합은 국회의 담장 밖에서 생겼다. 계엄 당일 수천 명의 시민들이 국회 앞에 모여 의원들이 담을 넘도록 도와주었고, 군 작전 차량을 둘러싸고, 경찰과 몸으로 대치하며 민주주의의 복원을 달성했다. 며칠 후 모임은 더 커졌다. 2차 탄핵이 있을 때까지 단 두 주 동안 세대를 가리지 않고 수십, 수백만 명이 국회 앞에 모였다. 지난 탄핵 때처럼 청와대와 가까운 광화문이나 시청 앞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심장이자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 앞에 모였다.

국회를 지키기 위해 모였고, 국회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모였고, 국회의 결정을 지지하기 위해 모였다. 꽃병(화염병)에서, 촛불로, 다시 응원봉으로 그들의 손에 든 빛의 종류가 바뀌는 가운데, 거대한 군중의 힘은 민중으로, 유권자로, 시민으로, 그리고 주권자로 대의제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강제했고, 그 대의제라는 방법을 통해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다. 민주주의의 적대자들에게 그 모임의 힘은 크고 무서웠다.

2024년 12월 윤석열 탄핵 집회. 위키미디어 공용.

‘대의’ 실패를 구원한 두려움 없는 ‘참여’

민주주의 연구들은 시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지지(democratic support)로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평가하곤 했다. 그중 일부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다양한 기관과 집단에 대한 신뢰를 측정하는 것이다. 의회, 법원, 대통령과 행정부, 경찰, 군 등 다양한 집단 가운데, 의회와 그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들에 대한 신뢰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하위권에 머물렀다.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대의제에 대한 불만은 모든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심각하게 나타났고, 시대가 변할수록 부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여러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나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대안이자 보완제로서 제시되었던 이유도 이 대의(representation) 시스템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국회와 국회의원은 무관심, 비난, 또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반민주적 성격을 지닌 정치혐오는 사실 국회의원에 대한 혐오였고, 국회에 대한 비난이었다. 기득권과 언론은 이를 가장 잘 활용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12.3 내란에 대한 한국 민주주의의 대응은, 책임성을 갖춘 대의제민주주의와 두려움 없는 참여민주주의의 행복한 만남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최소한 민주주의가 실패와 파국의 국면에 다다랐을 때 서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최소한 야당 의원들은 생각보다 더 강한 책임정치의 자세를 보여줬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있었고, 위기를 돌파할 실행력도 있었다. 인민주권과 의회주권이 공존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이 위기 속에 이 정치적 희망은 지금 우리가 잃은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외교적 손실을 일부라도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일 수도 있다.

위기 속의 희망, 희망 속의 다짐

그러나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긍정적 만남은 일시적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설익은 착각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국회의 1/3은 여전히 헌정과 민주주의의 몰락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이 더 중요하다며 책임정치라는 말을 아예 자신들의 사전에서 지워버리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인다. 정치적 훈련이 조금도 되어 있지 않은 괴상한 생각과 태도를 가진 인물을 후보로 빌려와 표를 던지고 권력을 쥐여 준 유권자 대중이 전체의 4할을 넘었던 것이 3년도 되지 않았다. 국회도 아직 멀었고, 유권자의 안목도 그리 믿을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위기 속에서 희망을 캐내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한 걸음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상상치 못했던 취약점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찾아 메꾸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회는 앞으로 국정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거대 행정부와 빈약한 의회는 현대 민주주의의 상징적 증상이지만, 의회가 약화 될 때 민주주의는 반드시 위기에 내몰린다.

의회가 인민의 의지가 최종적으로 모이는 가장 최상위의 기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헌정 위기를 우리는 국회를 잘 활용해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유권자는 자신들이 국회에 보내는 대표와 그 대표를 우리에게 추천하는 정당을 끊임없이 선별해야 한다. 유권자의 투표 선택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설명이 있지만, 결국 해법은 한 가지다.

똑똑한 유권자가 되어야 한다. 정신 차리고 내가 보낸 대표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다음 선거에서 똑똑히 기억하고 심판할 수 있는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국회가 우리를 위해 싸울 때, 그들이 힘겨워할 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가진 “가장 빛나는 것”을 들고 거리에 나가 국회를 지지하고 민주주의를 지킬 준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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