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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한국이 이루어낸 성과는 경제성장과 민주화,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의 우등생 남한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것을 이끈 것은 명백히 군부에 근간을 둔 권위주의 정부였으나, 경제성장을 거치며 성장한 한국의 시민사회는 끝내 민주화까지 이루어낸다. 이로써 미군 병사들에게 초콜릿을 구걸하던 아이들의 나라는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근대화를 이루어낸 국가로 변모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설적으로 전쟁의 폐허였다. 국토 대부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지나간 한국전쟁은 일제 치하에서 만들어진 산업기반도 모조리 파괴했지만, 그와 동시에 엄청난 인구이동을 촉발했고 전통적 사회구조를 뒤흔들었다. 이는 휴전 이후 한국 사회를 상대적으로 훨씬 평등하게 만들어줬고, 정부는 공산화의 압력에 대응하여 내키지 않는 토지개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출처: Korean War Photos, United States federal government
한국전쟁 (출처: Korean War Photos, United States federal government)

조 스터드웰이 [아시아의 힘]에서 잘 지적하였듯이, 이때 정착한 사회구조는 한국 사회가 훨씬 물질적으로 빈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를 금세 뛰어넘게 만들어준 기초가 되었다. 지주와 토지에 묶여 있던 소작인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도 없었고 그에 대한 인센티브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지주들에게는 농업생산성을 끌어 올릴 인센티브도 없었고 지대추구 행위가 횡행하여 국가 경제는 소수의 대토지 가문들과 그에 기반한 군부의 협잡질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토지개혁만으로는 한국의 경제성장이 온전히 설명될 수는 없다. 결국, 어느 순간 국가는 번창하는 도시경제를 중심으로 부를 축적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제조업이 성장해야 한다. 한국은 발전국가가 만들어지고 적극적인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운도 엄청나게 따라주었다.

특히 이 과정의 꽃이라고 할만한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할 1970년대의 중공업 육성 정책이었다. 국가적 명운을 걸고 산업이 팽창했으며 전 사회가 이들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동원되었다. 만약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삐끗했거나 이후 적절하게 시행된 구조조정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외부 금융환경이 적대적으로 흘러갔다면 오싹한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중공업 선셋 황혼 노을 바다 항구 조선업

하지만 어쨌든 이 산업정책은 성공했고, 한국은 조선, 자동차, 철강, 기계류 등에서 다른 어떤 후발국가들도 제대로 이룩하지 못한 성과를 쌓으며 산업대국의 자리에 등극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민주화를 향한 조건도 성숙시켜주었고, 민주화의 초기 과정을 이끌 대학생들과 정치인들이 성장하고 지지기반을 넓혀갈 수 있었다.

만약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떠안고 유의미한 경제성장이 없거나 극히 제한적이었다면, 그 결과는 민중 반란의 형태와 보수적 권위주의 정부의 비생산적인 힘겨루기였을 것이다. 터키나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가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저항운동들도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대중적 민주화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전쟁이 번영을 만들다

전술한 것과 같은 시나리오대로 20세기 현대사를 그려온 나라는 남한과 대만밖에 없다.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한다 치더라도 친미 성향에 자본주의를 지향한 나라들도 한국과 대만처럼 경제성장을 이뤄내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첫째, 그토록 격렬하게 인구이동과 기존 사회질서의 해체, 그리고 토지개혁을 겪은 나라 자체가 많지 않다. 둘째, 권위주의 정권의 절박함에 있다. 국가 경제에 막대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그와 같은 공격적 개발정책은 군부 엘리트의 합리적 정책 결정으로는 설명되기 힘들다.

실제로, 무리하게 확장한 이들 산업은 70년대 말 오일쇼크와 외채 위기에 얻어맞았고, 이때의 경제적 혼란은 사회적 동요로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과 마산의 시위는 최종적으로 유신정권 내의 분열로 이어졌고, 이는 박정희 정권 자체를 끝내는 도화선이 된다. 민주화로의 연착륙을 원했던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궁정동에서 제거해버린 것이다.

김재규

결국, 자신들마저도 위태롭게 만들 무리한 경제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비록 남한 사회가 1953년 이래로 단 한 번도 북한의 수준을 넘어선 억압책을 펼친 적은 없다고 해도, 정치에 있어서 남한인들이 질적 차이를 인식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장기적으로 남한 경제가 북한 경제를 가볍게 추월한 것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소련 경제가 높은 성장률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공산권은 순항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남한의 엘리트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체제경쟁 논리에 떠밀려야 했던 것이다.

토지개혁과 전쟁으로 만들어진 전통사회의 해체와 평등한 사회구조, 그리고 체제경쟁을 추동하는 실존적 위협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춘 나라는 남한 빼고는 거의 없었다. 사실상 대만을 제외하고선 아예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중공업 육성정책은 그렇게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마침내 최종적으로 합병하고 북한이 실제로 이에 자극을 받았다는 신호를 보이자 국가적 의제로 떠오르게 된다.

역설적으로, 남한인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이기도 했던 한국전쟁과 분단이 남한을 지금의 번영하는 산업 대국이자 아시아 최고의 민주국가로 만든 토대를 제공해준 것이다. 박정희의 산업정책은 주효했지만, 그 박정희를 그렇게 몰아간 상황만큼은 박정희와는 전혀 상관없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1970년 7월 7일) 출처: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출처: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다른 이들의’ 한국전쟁

그리고 남한인들에게 이런 판을 깔아주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남한인이 아니었다. 남한인들은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처절하게 싸웠지만, 철저하게 수동적인 행위자였다. 진짜 능동적인 행위자 대부분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인이더라도 남한인은 절대 아니었다.

태평양 건너의 맥아더, 트루먼, 아이젠하워이기도 했고, 압록강 건너의 마오쩌둥, 펑더화이이기도 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김일성이 그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38선으로 분단된 한국이라는 장기판을 두고 갖고 있던 서로 다른 구상들이 최종적으로 전쟁과 인구이동, 전통사회의 해체, 토지개혁, 남북으로의 분단과 이후의 체제경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결코 가장 적극적인 행위자는 아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결정적인’ 행위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은행강도 출신의 혁명가, 소련을 농업국가에서 현대적 산업국가로 만들어낸 남자, 반대파를 무참하게 숙청하고 인민을 살아 움직이는 생명 대신 서류상의 숫자로만 보았던 냉혈한, 로마 이래로 나폴레옹도 해내지 못한 유럽 정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히틀러를 문턱에서 좌절시킨 대원수, 그리고 이제 공산주의의 교황이자 세계의 절반에서는 정점에 오른 노회한 크렘린의 회색 인간,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떠오르는 전후 문제들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에서 물러나면서 연합국들은 새로운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일찍이 합의했던 국제체제 하에서 구 식민지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아시아는 미국, 소련, 영국, 그리고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비록 유럽에서는 승전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일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동유럽에서는 나치의 빈자리를 국제연합의 신탁통치 대신에 소련군이 붉은 깃발과 인터내셔널가로 채우고 있었고, 영국이 점령한 이탈리아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렇게 점령군이 자신들의 체제를 이식하고자 하는 ‘점령주의 원칙’은 유럽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될 것이었고, 유럽 밖에서 여전히 얄타의 합의는 유효했다.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20년에서 30년간 한반도를 신탁통치해야 한다고 했고,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면서 기간은 더 짧게 할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얄타회담
얄타회담

그렇지만 루스벨트가 죽고, 해리 트루먼이 스탈린과의 합의를 그다지 존중하려고 하지 않자 이런 합의 사항들은 어떠한 구속력도 갖지 않게 되었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대일전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고, 실제로 1945년 8월에 펼쳐진 만주 전략공세작전, 서방 측에는 ‘8월의 폭풍 작전’으로 유명한 대규모 공세로 이 약속을 지켰다.

스탈린은 그와 동시에 홋카이도 상륙을 할 수 있다고 미국 측에 타진해보았으나 미국은 이 시도를 단칼에 거절한다. 이미 양측은 서로의 군대가 밟는 땅에 상대방의 체제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도 이제 신탁통치 대신 점령주의 원칙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맥아더는 이후 소련, 심지어 영국의 의사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점령한 일본을 마치 쇼군처럼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천황. 1945년 11월 27일 도쿄 소재 미국대사관에서 첫 만남.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천황. 1945년 11월 27일 도쿄 소재 미국대사관에서 첫 만남.

만주와 일본의 상황이 대충 정리가 되어가자 조선반도의 거취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왔다. 우선 항복 시점에서 이미 소련군은 만주의 관동군을 쳐부수고 한반도에 진입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은 한반도에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38선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소련 측에 제의했다.

소련군은 이미 압도적 육군 병력으로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능력이 있었지만, 미군의 이 요구를 수용해주었다. 스탈린이 38선 이북의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일본에 있어서 맥아더는 소련의 개입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고, 이 선은 한반도에만 적용된다. 이제 그렇게 설정된 38선을 기점으로 북쪽에는 소련군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갔다. 이미 양쪽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기반을 만들어놓으려고 하고 있었고, 점령군과 협조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그렇게 한반도 통합정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남북 양측의 불신과 의지 부족으로 무위로 돌아갔고, 1948년이 되면 38선을 경계로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게 된다.

전쟁의 열쇠: 김일성의 요청과 스탈린의 허가

물론 이것이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냉전이 끝나고 공산권 문서고가 개방되자 밝혀진 증거를 통해 우리는 김일성과 박헌영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잘 알고 있다.

1948년 해주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1948년 해주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그러나 김일성만으로 전쟁 발발의 모든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일성은 수차례 모스크바에 찾아가 스탈린에게 전쟁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고, 스탈린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 1950년 1월에 허가를 내리면서, 마침내 6월 25일에 전격적인 남침이 개시된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의 역할을 빼고 남한의 생존을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듯, 전쟁의 배경, 발발, 전개 국면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결정적인 순간에서 북한의 행위를 제약하거나 지원했었다.

왜 김일성은 독립된 국가의 지도자면서도 한국전쟁의 시작에 스탈린의 허가를 필요로 하였을까? 이는 당시 공산주의 세력들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1949년이 되자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아시아에서 신생 공산주의 정권을 이끌게 되었지만, 그 나라는 아직 자주적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멀었다. 모두 민족주의 성향의 좌익 지도자였지만 여전히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대부이자 권위의 원천인 모스크바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만이 스탈린의 권위에 반기를 들 수 있었다.

1945년 9월 19일 자 해방일보
1945년 9월 19일 자 해방일보

후에 마오쩌둥과 김일성도 티토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지만, 아직 그러기에 두 나라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었다. 각자의 나라에서 계급투쟁을 완료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면, 공산주의 정권 이전에 쌓아놓은 근대경제 영역에서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산업과 군사 영역에서 이 공백을 해결하고자 했다. 남한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일본의 배상금으로 산업화에 착수했듯이, 중국과 북한도 소련의 기술지원과 자금지원을 통해서 더 빠른 산업화를 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두 나라가 잡을 동아줄은 당시로써는 소련밖에 없었고, 자신들이 통치하던 나라와 별다를 바 없던 별 볼 일 없는 농업국 러시아를 산업제국으로 키워낸 스탈린의 권위를 거스르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이후 사람들은 스탈린이 한국전쟁의 최종 배후이며 북한 정권은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는 민족의 자주를 내세우는 북한 정권이 역으로 러시아인들에 종속된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들의 정당성에 타격을 주고자 한 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은 공개된 자료들을 토대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스탈린이 처음부터 전쟁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김일성이 수차례나 스탈린을 방문한 이유는 그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한국전쟁에 대한 재가를 어떻게든 받아내려고 끈질기게 시도한 결과물이었다. 스탈린은 처음에 김일성이 남침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해오자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비준을 거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내려보낸다.

스탈린

“슈티코프 동지(조선 주재 소련 대사)는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나서 다음 사항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한다:

올해 8월 12일 본인과의 대화 중에 귀하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관하여, 본인은 귀하들이 언급한 문제들에 관한 모스크바의 의견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귀하들이 제기한 조선인민군의 남한을 향한 공격 제안은 군사적, 정치적 두 측면에서 진지한 고려가 필요하다.

군사적 측면에서, 인민군은 공격할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없다. 필요한 준비를 하지 않은 공격은 지구전이 될 수 있다. 이는 적을 패배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북조선을 극히 어려움에 빠트릴 수 있다. 이 상황은 당연히 나타나서는 안 된다.

현재 북조선의 무장 역량은 남쪽과 비교할 때, 절대적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북조선은 현재 남한을 향한 군사적 공격준비를 완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이러한 공격을 허락할 수 없다.

정치적 측면에서도, 귀하들은 남쪽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인민들이 국가의 통일을 염원하고 남조선 인민 또한 반동 체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귀하들의 의견에 우리는 당연히 동의한다.

그러나 남쪽 인민 대중을 적극적인 투쟁에 참가시키고, 유격투쟁을 남조선 전체로 확대하며 해방구를 건설하고 인민 봉기를 조직하는 문제에 관하여 지금까지의 성과가 매우 적다. 반동 정권의 기초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인민 봉기가 시작되고, 진정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만, 남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 남조선 반동을 타도하고 전체 조선을 통일된 민주국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

현재 유격운동을 전개하고 남조선 인민 봉기를 위한 준비가 매우 부족하므로, 귀하들이 건의한 남한 공격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옹진반도와 개성 지역을 탈취하여 북조선의 국경을 서울 부근까지 접근시키는 국지전은 이것이 북조선과 남조선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전면전은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북조선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준비 되어 있지 않다.

이 밖에도 만일 북쪽이 주동적으로 개시한 군사행동이 장기전으로 변하게 되면, 이는 미국인들에게 조선 문제에 각종 방식으로 간섭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할 수 있다.

이상을 고려하여, 현재 조선 통일의 임무를 쟁취하기 위하여 첫째, 남조선에 유격투쟁을 전개하고, 해방구를 건설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여 반동 정권을 전복하고 조선 통일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둘째, 조선 인민군을 강화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한다.”

한편 자신의 남침 요청이 계속 무시당하자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도 의견을 구한다. 마오쩌둥은 당시 대만으로 패주한 국민당 정권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이 전역을 1950년에 일으키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요구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떨떠름하게 생각하며 이 문제를 스탈린에게 넘겼고, 스탈린은 외무부 차관 그로미코를 통해 다음의 전보를 보낸다.

[box type=”info”]

북경.
코발료프에게 전한다.
마오쩌둥 동지의 10월 21일 전보에 대한 스탈린 동지의 답변을 마오쩌둥 동지에게 전달하기 바란다.

“마오쩌둥 동지,

우리는 지금 조선인민군이 (아직은) 공격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귀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우리도 조선 친구들에게 그들이 입안한 조선인민군의 남한 공격은 아직은 실행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왜냐면, 군사적 혹은 정치적 측면 모두에서 이러한 공격을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현재 조선통일의 투쟁에서 조선 친구들은 반드시 자신의 역량을 유격전 운동을 전개하고 조선 남부 지역에 해방구를 건립하고 조선인민군을 전면적으로 강화하는 데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집행상황을 전보로 보고할 것.

그로미코.

[/box]

이런 자료를 통해 우리는 스탈린이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음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남침은 승인되었고, 한국전쟁은 발발하고 만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왜 마음을 바꾸었을까? 그것을 위해선 우선 스탈린이라는 인물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리고 스탈린이 바라본 동북아시아 정세는 어땠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계속) 

[divide style=”2″]

[box type=”note”] 오늘날의 한국은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필연일까요? 한국전쟁 전후의 현대사를 돌아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역학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반도의 운명을 회고하고, 우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필자)

스탈린과 한국전쟁 

  1. → 스탈린, 남침 승인을 거부하다 
  2. 스탈린의 체스판
  3. 역사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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