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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법리의 교차선 : 왜 우리는 그 판결에 분노하는가?

우선, 김봉수 교수의 ‘김지은이 진실해도 안희정이 무죄일 수 있는 이유’ 제하의 글을 파악해본다.

  • 형법에서 쓰이는 용어에 대한 설명과 이해: 일반 대중이 흔히 알고 있는 ‘위계’에 대한 오해와 더불어 해당 사건에서는 위력만이 문제임을 말한다.
  • 안희정의 행위는 위력인가에 대한 재판부 판단의 이해: 도지사와 비서 관계 자체가 위력이라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며, 형법의 조항에 따르면, 당시 도지사의 행위를 위력으로 간주하거나 추정할 수 없으며 당시 비서관의 주장만으로는 위력 행사에 대한 사실이 없으므로 재판부 판단이 옳은 것이라 설명한다.
  • 그루밍: 심리적 무력상태에 당시 비서관이 놓여있었을 가능성은 단기간이라 배척되며 그런 상태를 감정 입증하는 것은 어렵다.
  • 김지은 말이 사실이라 해도 안희정이 무죄인 이유: 사건의 진실은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를뿐더러 당사자조차 정확히 알기 어렵다. 양측의 시각차에 따라 한쪽은 외로움의 호소이며, 한쪽은 위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주장들에 대해 대중들은 위험한 주장을 펴기 전에 자신이 아는 것이 제대로 없음을 인정하고 자제해야 한다.
  • 결론: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의 다양한 성폭력 실태에 대해 연구하여 합리적인 입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안희정 김지은

이상의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있는 김봉수 교수의 글은 더 짧게 요약하자면 ‘대중은 현재 해당 사건에서 법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부분과 더불어 사실관계도 모른 채 위험한 주장을 펴고 있지만, 자제해야 하며 더불어 입법은 충분한 준비를 거쳐야 한다.’라는 진지하고 성실한 의견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왜 이렇듯 대중의 지적인 오류와 감정적인 억측 자제를 부탁하고 입법은 성실히 하자는 좋은 말씀에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1

대중이 뭘 잘못 알고 있다? 

그 대중의 분노와 별개로 나는 김봉수 교수의 기고문에서 문제점을 그리 많이 읽지는 못한 것 같다. 아니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하나나 둘 정도일까?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나 둘 뿐일 문제의 무게가 무척 무겁고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김봉수 교수는 앞서 ‘위계’라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한자어와 이런 재판에서 다뤄지는 ‘위계’라는 한자어가 완전히 다른 용어이며 그 지점부터 대중들이 뭘 잘못 알고 있음을 일깨우려 했다.

왜 김봉수 교수는 길지 않은 글에서 ‘위계’라는 단어를 대중들이 잘못 알고 있음에 적지 않은 수고와 자리를 들여 설명하려 한 걸까? 그 뒤에 전개된 기고문의 맥락으로 보면 단순히 한자어를 잘못 알고 있어서 오는 오해를 착실히 설명하려 기보다 결론부의 ‘대중들이 뭘 제대로 모르고 있어서 펴는 위험한 주장을 자제해야’라는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꺼낸 서두에 가까워 보인다.

처음부터 김봉수 교수는 ‘대중이 뭘 잘못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해 난해 어려움 모름 문제

그 뒤 김봉수 교수가 한자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일깨워주는 투로 이어 이야기한 것은 다름 아닌 ‘위력에 대해 일각이 무리한 해석을 하고 있음’을 주장한 부분이다.

“일각에서는 유력 대선주자였던 도지사와 비서의 관계 자체가 위력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무리한 해석이라고 본다.”

왜 ‘일각’이라고 했을까? ‘도지사와 비서의 관계가 위력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무리한 해석이다.’ 이성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지적 같다.

하지만 이렇게 바꿔서 써보자.

  •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가 위력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무리한 해석이다.’

다시 이렇게 바꿔 써보자.

  • ‘이등병과 사단장의 관계가 위력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무리한 해석이다.’

과연 그럴까?

‘왜 관계 자체가 위력은 될 수 없는가?’의 ‘왜’를 기다리고 읽어나가던 독자의 눈에 펼쳐진 것은 ‘성관계의 일방 당사자가 도지사라는 사실은 그가 형법 제303조 제1항의 ‘감독자’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로부터 곧바로 ‘위력’이 있었다고 간주하거나 추정할 수는 없다.’ 일 뿐이다. ‘왜’라는 부분에 대한 이유와 답이 절묘하게 생략된 것이다.

이하 김봉수 교수의 기고문은 충분히 일관적으로 왜 법리적으로 재판부가 그런 판결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지, 대중은 왜 자제해야 하는지, 입법에 대해서는 차분히 준비하자는 전개로 나아갈 뿐이다.

분노의 이유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있는 지점은 위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원인이라서도 아니고, 당시 도지사와 당시 비서관이 서로 내민 정황 증거에 대한 판결이 노련한 수사관의 추리와 범인 판정으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감정적으로 성토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비서관이었던 이가 ‘윗사람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 임을 주장했지만, 법리상 ‘그것을 왜 못 피했냐’고 질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판결문의 맥락에 분노하는 것이다.

방대하고 복잡한 해설과 더불어 정조 운운하던 시대가 이미 지나갔음을 설파한 재판부의 판결문 뒤에 있는 ‘피해자의 정황증거만을 캐묻고 그것이 부족하면 가해자를 무죄방면’ 하는 태도.

그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대중의 무지와 형법의 해석을 곁들여 ‘응, 윗사람과 아랫사람 관계만으로는 위력 아님,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일각’이라며 중대한 시선과 분노의 지점을 아예 축소해 버리는 태도에 많은 사람이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

OhLizz, CC BY

OhLizz, CC BY

정말 법리적인 해석상, 김봉수 교수도 재판부도 모두 피해자의 주장을 올곧이 받아들여 자신이 당한 피해처럼 여기며 고민하는 동시에 가해자 처지에 놓인 사람의 처지도 꼼꼼히 들여다봐서 이런 판결을 내렸고 또 그 판결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애써 이렇게 일깨워주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그 일깨움의 앞뒤에 일말의 ‘안타까움’ 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윗사람이라면 조심했어야 할 근본적인 자세’ 는 언급이 없는 것일까? 그 언급 대신 있는 것은 ‘윗사람 아랫사람 그 위계 아니다’라는 훈장님 말씀뿐이라는 것은 혹시 내가 무엇을 잘못 읽지 않았나 하고 되풀이해서 기고문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 힘이 빠질 뿐이다.

사례: 인텔 최고경영자의 갑작스러운 해임 

2018년 6월 세계적인 컴퓨팅 회사이자 CPU 제조업체인 인텔의 최고경영자 브라이언 크르자니크가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랫사람과 과거 합의된 성관계를 했기 때문’ 이다. 사내 연애가 발각된 것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며 더더군다나 강압적인 성폭행도 아니다.

그 직원(‘아랫사람’)이 누군지 신원이 밝혀지지는 않았어도 그는 위력 관계에서 크르자니크를 만난 게 아님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회사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윗사람과 그에 따라야 하는 아랫사람’의 관계에서는 ‘합의된 사내연애조차도 문제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인텔사의 판단이 우선한 것이다.

세계 CPU 시장의 87%를 점유한 인텔

김봉수 교수는 위 사건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텔 CEO 비서가 사내연애를 고집했어도 인텔 CEO가 무죄일 수 있는 이유’라고 말이다.

그러나 인텔사는 ‘무슨 관계인지 우리는 알 바 아니고 CEO-직원 사이 연애는 과거의 일이라 하더라도 용납할 수 없다’며 사내에서의 위력 관계를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의하고 실천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법률 전문가에게 듣고 싶은 말 

과연 지금 많은 사람이 김봉수 교수 같은 법학 전문가의 입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장황한 법리적 해석과 정황 증거 없음의 재확인일까? 고작 흥분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제하고 싶어질까?

광장에 피켓을 들고나와서 분노의 고함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은 김봉수 교수의 슬로우뉴스 기고문에 이렇게 의문할 따름일 게다.

  • ‘왜 아무것에도 안타까워하지 않나요?’
  • ‘왜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만으로도 위력이라 못하나요?’
  • ‘왜 우리가 일각인가요?’

[‘김지은 말이 ‘사실’이어도 안희정이 무죄일 수 있는 이유]에 내가 듣고 싶어 한 이유는 없었을 뿐이다. 그것이 아마 진짜 사람들이 화내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분노 화

왜 우리는 인텔이라는 사기업이 갖고 있는 원칙만도 못한 사법부 판결과 논리에 대해 이런 장황한 옹호나 들어야 하는지 그것부터 나는 안타까워진다.

난 솔직히, 김봉수 교수의 기고문이 슬로우뉴스에 실린 사실이 무척 창피하고, 괴로웠다. 그러나 그 또한 사회의 ‘일각’으로서 하고 싶은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소리를 할 자유는 있을 것이다. 그 장소가 비록 내가 아끼는 슬로우뉴스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김봉수 교수 또한 아마 선의의 시각에서 열심히 대중들에게 이번 판결의 과정과 법리를 일깨워주고 입법을 잘하자고 설득하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졌다.

단지 난 ‘아마도 선의일’ 그 기고문에 동의할 수 없을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라서 요즘은 굳이 쓰고 있지 않습니다만, 슬로우뉴스는 토론의 공간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담긴 기고를 환영합니다. 여기에는 편집팀원의 기고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이 글은 특히 슬로우뉴스에서 발행한 글을 비판적으로 메타비평 하는 글입니다. 그래서 그 점에 관해서는 김봉수 교수께 사전에 양해를 구했고, 김 교수는 “비판은 숙명”이라는 말로 넉넉하게 받아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고마움을 전합니다.

다시 한번 굳이 강조합니다. 이 소재와 주제 뿐만 아니라 슬로우뉴스에서 발행한 모든 기사와 칼럼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1. 김봉수 교수의 기고 글은 내가 위 의문을 텍스트로 옮겨보는 현재 페이스북에서 29회의 공유가 일어났으며 그 중 의견을 공개적으로 피력한 6번의 공유 중 5번에 걸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으며, 16개의 페이지 댓글 중 13개 의견이 역시 정중한 비난으로 보인다. 트위터에서는 슬로우뉴스를 검색하면 최근의 의견 10개 중 10개가 모두 슬로우뉴스에 대한 비난과 조롱 일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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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 제어와 Network 에 의미를 부여하며 , 콘텐츠 기획에 일과 흥미를 섞고 있는 nomodem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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